< 제 282화. >
요사스럽게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보는 장저민.
"꼭, 김일정에게 문제가 생길 것 처럼 말하십니다?"
"세상일이라는게 항상 변수에 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변수에 대비 한다라... 뭐, 어쨌든 당내 지도부에 김은정에 대한 후계안을 얘기 해 두었으니 대충은 알아 두었을 겁니다."
"아하, 그럼 뭐 상관 없겠군요."
"헌데, 김일정이 정말 몸이 안 좋소? 얼마전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소만."
"얼마전 그러니까 정상회담 이전에 분명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잖습니까?"
"그랬지."
"아마 그때 이후로 뭔가 변고가 생긴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장저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따로 알아 봐야 겠군요, 만약 그대의 말 처럼 김일정의 신변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면 조금 서두르는게 좋을테니까."
"그러시죠."
지금 장저민의 말은 따로 김은정에게 접촉한 적은 없다는 뜻이었다.
번뜩, 제법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놈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기도 좋을 것 같았다.
만약, 중국의 지지 없이, SKY의 도움으로 김은정이 북한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렇다면 내 입맛대로 요리하기 더 쉽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우선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의 정신이, 생각이 김은정에게 기울기 전에.
"이제 공적인 얘기는 그만 둘까요?"
"오, 벌써 용건이 끝이났소? 오늘은 빠르구려."
"시간이 남는것 같은데 오랜만에 주석과 술 한잔 기울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좋지요, 언제나 식견이 넓은 사람들과의 곡차는 뜻 깊은 일이 아니겠소?"
갑자기 대단한 성인이라도 된 듯, 허허롭게 웃는 장저민. '술'이라는 얘기에 이렇게 좋아한다.
"오늘은 주석께서 원하는 대로 따르지요."
"오호라, 소문이 무성한 내 사택이 궁금한 모양입니다."
"오, 벌써 설레는데요?"
"하하, 갑시다. 그럼, 내가 오늘 제대로 대접 하리다."
"예, 나가시는 길에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곧장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하니 천천히 오시오."
"예."
장저민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바깥으로 나가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호석을 바라보았다.
"예, 회장님."
"저 돼지 새끼 좋아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드네요."
"그렇습니까."
"오늘 바로 작전 진행하죠, 어쨌든 비자금이 털리면 바로 장저민의 귓가에 들어갈테니까."
"예, 회장님."
슬쩍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12시 쯤으로 하시죠, 그때쯤이면 자리가 무르익었을테니까."
"예."
***
베이징의 이화원이라는 옛 궁전.
각종 예술품들과 중국의 역사가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구시가지.
그리고 그곳에 비밀스럽게 자리잡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뭉뚱그려 중국의 정보총국이라고 보는게 맞았다. 대게 어느나라던 정보를 관장하는 기관들이 그렇듯, 중국 역시 꽁꽁 감춰두었다고 보는게 맞다.
주변의 사람들은 해당 건물이 정부의 소유인지도 모르는게 태반이니 여태껏 제법 그럴듯하게 속여왔다.
그러나 오늘 밤은 특이하게도 그 곳에 못보던 차량들과 못보던 인물들이 지나치고 있었지만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들은 없었다. 워낙 유동인구도 많고, 관광객도 많은 곳이라 하루에도 수십번씩 특이한 사람들이 지나니 특별하되 특별하지 않은, 그런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웅성웅성.
시끌벅적.
항상 관광지 주변이 그렇듯, 12시가 다 된 시간에도 주변의 노점상들과 작은 가게들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가벼운 안주와 미적지근한 맥주를 파는 가게들. 그리고 그런 음식과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
드르르륵.
검은색 벤에서 내린 사내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천혁수를 비밀리에 경호하는 백철웅이었다.
"준비되는데로 보고 하도록."
옷 소매쪽을 입에 대고 말 하니, 그가 끼고 있는 인이어에 속속들이 보고가 도착한다.
-치익, 1팀 준비 완료.
-치익, 2팀 준비 완료.
-치익, 3팀 준비 완료.
-......
-치익, 지원팀 준비 완료.
"전 후방 경계조 경계 철저히 하고, 0시에 일괄 진입한다."
-치익, 확인.
용건이 끝났는지 다시 팔을 내린 철웅이 술을 마시며 저마다의 하루를 풀어내며 하하호호하고 있는 인파들을 스치듯이 지나 작은 골목길에서 주변을 확인하고는 뒤쪽으로 손을 내민다.
그를 따라왔던 PMC의 대원들이 9mm 토카레프 한 정과 방탄조끼, 복면을 내밀었다.
별 감정 없는 얼굴로 해당 장비들을 모두 착용한 철웅은 구둣발로 계속 걷기 시작했다. 미로처럼 얽히고 섥힌 구 시가지의 골목들을 걸어서 마침내 목적하던 걸물 앞에 선 철웅.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후우'하는 심호흡과 함께 권총집에서 토카레프를 꺼내어 언제들 발포 할 수 있게 자세를 취하고는 작지만 단호하게 외쳤다.
"진입."
온 몸을 검은색으로 위장한 PMC의 대원들 역시 권총을 꺼내 무장하면서 방탄헬멧 위로 드러난 작은 조명을 깜빡이며 어디론가 신호를 보내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검은색 일색의 PMC대원들이 사방팔방에서 일제히 건물을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진입이 시작되자 철웅은 살짝 고개를 들어 지붕을 확인했다. 5층짜리 낡은 건물의 중국 특유의 기와장식 지붕.
그곳에서는 로프를 타고 내려온 대원들이 빠르게 창문을 깨고 진입하기 시작했다.
쨍그랑~!
여기저기 유리가 터지고 잠시후 '펑!'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빛이 번쩍이기도 하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연막탄과 섬광탄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대원들.
그것까지 확인한 철웅역시 언제든 발포할 수 있게 권총을 파지하고는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
장저민의 사택이라는 곳에 가장 처음 와서 본 것은 휘황찬란한 '금'장식들이었다. 도대체 이런데는 왜 금을 썼을까 싶을 정도로 쓰잘데 없고, 낭비가 심해 보일정도로 여기저기 금을 도배해 놓았다.
예전에 TV에서 봤던 사우디였나 하는 곳의 어떤 왕자의 집도 이 모양이던데, 그것을 모티브로 했을까 싶을 정도로 꼴 뵈기 싫은 사택이었다.
권력과 금이 비례하는 느낌이랄까?
하여간 무진장 촌스럽다는 얘기였다.
참 중국인들은 디자인 적 센스가 없지 싶었다. 이러니 그 많은 인구와 넓은 땅덩이를 가지고도 발전이 없지.
"아직도 준비 한데요?"
이곳 사택에 들어와서 벌써 30분째 대기를 하고 있었다. 나름 응접실이라는 곳에서 곡차를 마시고 있는데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호석이 살짝 내 눈치를 살피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확인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호석을 자리에 앉히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지루해서 그랬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잘 하고 있겠죠?"
"지금 한창 동선체크 하면서 시뮬레이션 하고 있을 시간입니다."
"백 대표님 오셨으니까 잘 되겠죠 뭐."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돼지가 감히 날 기다리게 하네요, 얼마나 대단한 준비를 하려고."
"자존심을 세우고 싶을 겁니다. 저번에 우리 천가키즈의 바텐더들이 좀 화려했어야죠."
"아아, 그건가 진짜? 확실히 신빙성 있네요."
슬쩍 손가락 사이에 끼여져 있는 시가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편안하게 시가 필 수 있는게 어디겠습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집에서는 도무지 필 엄두가 나지 않으니 이렇게 편안하게 즐기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요즘 점점 취미가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진짜 다 좋은데, 이런 자유가 조금씩 억압받는게 단점이다. 물론 아이들이 크면 그것도 달라지겠지만... 헌데, 태양이 별이를 보고 있자니 요즘 부쩍 셋째를 가져볼까도 싶다. 슬슬, 루시도 다 회복 한 것도 같고 말이다.
어렸을 때 부터.
나는 항상 혼자였다.
당연히 고아원에서 자랐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랬기에 나는 항상 외로웠다. 이번 삶에서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지금도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일까?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가족의 포근함을 알게 되니 내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가족이란게 '다다익선'은 아니란 걸 알지만, 어째서인지 그 잣대가 '내 가족'에게는 들이밀어 지질 않는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잖은가. 나와 루시가 가족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에 행복해 하는 사람이라면, 내 아이들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역시 가지고 있었다.
"셋째 생기는데 어떠세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시가 향을 즐기던 호석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하, 참."
많은 것이 함축된 숨소리와 탄식이었다.
"왜요?"
"좋죠, 좋은데, 막막하기도 하고. 육아란게 언제나 참, 전쟁같은 놈이라... 이번이 셋째니 저도 짬밥이 늘었습니다만, 인간이라는 동물이 워낙 변수가 많잖습니까? 항상 긴장해야 하죠."
"그래도 좋다는 전제는 깔려 있으니 다행이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석이 날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셋째 생각하십니까 벌써?"
"이제 슬슬 가져서 낳으면 2살 차이니까, 서두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회장님도 사모님도 건강하시니 그렇긴 합니다."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호석.
"꼭 갖으시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라? 그 표정 뭔가 복수를 꿈꾸는 표정인데요?"
"글쎄요? 그럴리가요?"
시덥잖은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한시간이나 훌쩍 지나 버렸다. 이제 대단한 준비가 아니면 나는 대놓고 성질을 부릴 자신이 있었다.
"이 정도면 무시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냥 일어나시죠, 감히..."
호석역시 속이 부글부글 끓는 모양이다.
"작전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감히 내 시간을 허비한 죄를 물어야겠어요."
"예, 반드시 그러시지요."
"비서실에 연락해서 내 시급을 파악하라고 말씀하세요."
"예?"
"내가 1시간에 얼마를 버는지에 대해서 계산기를 두들겨 보라는 얘기입니다."
입을 떡 벌리는 호석.
"정확히는 몰라도... 어마어마 할 것입니다만."
"그걸 받아내야겠습니다. 원래 블랙들 활동자금만 이자로 받아가려 했는데... 장저민 이 새끼 선을 넘네요."
"후우, 예.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털 수 있는 모든 비자금을 싹 수거해 가야겠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저기 국외에 비자금 빼돌려놓은게 많을겁니다. 언제나 욕심이 많은 놈들은 제 놈의 자리가 끝났을 때를 두려워하니까요."
"음... 확실히, 후진다오와 대립도 있었을테니 신빙성 높은 말씀입니다."
"그거 싹 털어 오자는 얘깁니다."
"그럼 장저민의 보좌관에게도 마커를 붙여야겠습니다."
"예, 연애하느라 바쁠 김장원 사장에게는 미안하지만, 보좌관 후다를 따보라고 하세요."
내 거친 언사에 호석이 미미하게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때마침 호랑이라도 되는지 보좌관이 응접실의 문을 열고는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허나, 기다리신 보람이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제법 호언장담을 하는 보좌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살짝 고개를 숙여 날 안내하는 보좌관.
"이름이 왕충헌이었던가요?"
"아,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군요, 그렇습니다."
"타클라마칸의 왕 공안부장이 육촌이시고?"
"커험, 예."
"주석과는 오래 일을 하셨나봅니다."
"예, 나고 자라길 그랬고, 제 아버님때부터 모셨던 분입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메인 홀로 나가니 확실히, 제법 준비를 했다. 문제는 준비를 한 게 음식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무슨 준비를 했나 했더니..."
북한의 기쁨조가 있다면 중국엔 알려지지 않은 기쁨조가 있다더니, 각지의 미인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나 싶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들이 하늘하늘한 중국의 전통복장을 입고 있었다.
옷이 하도 얇아서 저거 만드는 것도 기술이겠다 싶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시스루와는 또 다른 이상야릇한 분위기.
화장을 상당히 옅게 한 여인들인 것 같은데 피부가 정말 대단했다. 확실히 없던 정욕도 불러일으키기 충분할정도로.
왕충헌놈이 안내한 자리에 앉으니 저 멀리 양문형으로 문이 열리며 장저민이 나체에 가운만 걸치고는 약간 휘청이며 걸어온다.
"새끼 다리 풀렸네?"
툭 튀어나온 말에 호석이 움찔거렸다.
"크흠."
민망한지 헛기침을 뱉은 호석.
장저민의 곁에서 붙어 따라오는 여인들의 옷 매무새가 이곳에 있던 여인들과 달리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을 보니 장저민 저 돼지놈의 다리가 풀린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준비가 그 준비였던 모양입니다."
"노인네가 길게도 했네."
"큽."
"씻고는 왔나 모르겠네요, 와서 악수부터 건넬까봐 무섭네, 손은 피하는 걸로."
호석이 센스있게 술 잔에 술을 채워 내게 하나를 내민다. 놈의 손을 잡지 말고 술을 건네라는 의미.
"크하하하하, 어떻소이까 천 회장. 보기 좋지 않소?"
양손을 크게 벌려 주변의 여인네들을 자랑하려는 듯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짓는 돼지새끼.
"예, 보기 좋네요 몇 가지 빼고?"
"음? 몇 가지?"
"뭐, 그런게 있습니다. 한잔 하시죠."
내 시선이 묘하게 놈의 아랫도리를 훑었다.
못 볼걸 봤네.
저거 내가 언젠간 꼭 떼어내리라 다짐했다.
빨리 작전이 진행되서 놈의 똥씹은 표정을 보고 싶었다. 저 멀리 고급스러운 금 장식과 다이아 장식으로 된 시계의 시침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순간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오늘은 마음껏 즐기시오! 저번 칵테일 대접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 오늘은 내가 향락을 깨우처 드리지."
"예, 부디 오늘 하루 종일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하, 나보다는 손님인 천 회장이 더 즐거워야 하지 않겠소?"
그래, 난 즐거울 것 같다.
네 놈의 시시각각으로 굳어가는 얼굴을 볼 때 마다 말이지. 마음껏 웃어 두라고, 이제 그것도 몇 시간 안 남았으니까. 며칠은 네가 좋아하는 여자도 없이 한참을 보내야 할 것이다.
< 제 28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