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78화 (278/458)

< 제 278화. >

컴퓨터 본체에서 작은 USB를 뽑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조상근 책임 연구원.

주변에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음에도 그는 뭔가 찔리는게 있는지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품 속에 USB를 갈무리한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커험'하는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최대한 자연스럽게 노력하며 걷는 조상근.

화장실로 들어가 칸칸이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한 조상근이 빈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낸다.

돌리고 돌려 립밤의 끝 부분이 나오자 손으로 조심스럽게 립밤을 잡아 빼고는 그 통 안에 USB를 넣고, 립밤을 다시 채워 넣는다.

립밤이 있어야 할 자리에 USB가 들어가니 립밤 모두가 통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립밤을 잘라내어 변기통 안에 버리고는 입술에 꾹꾹 눌러 발라 완벽하게 USB를 가리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딸깍.

화장실 문이 열리고 바깥으로 나온 조상근이 흠칫 놀라며 거울 앞에 서 있는 인물을 바라본다.

"회, 회장님?"

천우진이 그를 바라보며 밝게 웃고는 말했다.

"네, 천우진입니다. 조상근 책임이시죠?"

"아, 예. 그렇습니다."

"요즘 참 고생이 많습니다."

조상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천우진이 툭툭 두들기며 그를 다독였다.

"아, 아닙니다."

말을 더듬으며 잔뜩 긴장한 조상근.

"에이,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편하게 해요, 편하게."

"예, 예."

"어떻게 요즘에 연애는 잘 되세요?"

"예... 예?"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이는 조상근.

"요즘 왕소연 사원이랑 연애를 하고 계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그, 그렇습니까?"

"네, 그럼요. 저기 한국 본사까지 벌써 소문이 파다해요. 우리 책임님, 아직 퇴근시간까지 조금 남은 것 같은데 잠깐 얘기좀 할까요?"

나는 다 알고 있다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천우진을 힐끗 바라본 조상근이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

SKY 전자 상하이 지부의 작은 회의실.

나와 조상근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호로록."

차를 불어 한 모금 마시며 조상근을 바라보았다. 그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내 입에서 '왕소연'이란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부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철컥.

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조상근이 움찔 몸을 떨었다. 두려움에 찬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을 바라보는 조상근.

"회장님, 말씀하신 서류 가져왔습니다."

"아, 네. 여기 책임께 주세요."

"예."

정호석이 조상근의 앞에 서류를 내려 놓고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회의실을 나섰다.

"서류 한 번 읽어보세요."

"예..."

샤락, 샤락.

"이, 이게 무슨..."

서류를 읽으며 매우 놀란 모습을 보이는 조상근.

그도 그럴게 서류 안에는 '왕소연'의 이력과 우리 정보부에서 따로 조사한 자세한 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아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산업스파이나 다름 없는 왕소연.

그녀는 중국 정보기관인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안전부 소속으로 일부러 조상근에게 접근했다는 증거들이 즐비한 서류였다.

어느새 조상근의 두 눈엔 두려움은 사라지고 쓰라린 배신감에 발로한 분노가 차오른다.

나는 툭, 테이블 위에 USB하나를 올려 놓으며 말했다.

"어때요? 립밤으로 위장한 USB는 이제 돌려주시는 게?"

"제가... 제가 멍청했습니다. 회장님. 제가 미쳐서 스카이를... 스카이를 배신했습니다."

"그러게요, 그런 게 사랑은 아니 잖아요?"

"면목없습니다 회장님... 한국에 돌아가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아뇨아뇨, 그럴필요 없고. 당한 거니까 우리 SKY가 어디 가족을 함부로 버리던가요?"

눈을 크게 뜨고 정말이냐는 듯 날 바라보는 조상근 책임 연구원.

"절 용서해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감봉 3개월, 그걸로 하죠. 아직 미수니까."

왈칵, 조상근이 눈물을 쏟아낸다.

저 소심한 사람이 USB안에 정보를 담아 내느라 얼마나 불안 했을까 싶었다. 간도 작은 사람이 제법 무리를 했나보다.

"크흑흑... 절 다시 믿어주신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회장님."

"괜찮습니다. 중국 놈들 방식이 속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마, 조상근 책임께서 연애 경험이 별로 없다는 점 까지 노렸을 겁니다."

"어쩐지... 어쩐지 소연이, 아니 왕소연 그 여자가 제 이상형에 꼭 맞다 했습니다. 취향도 비슷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접근했을 테다.

중국에 오기전 한국에서 확인한 서류만 보더라도 산업스파이 혐의가 의심되는 '연애'사건에는 이상하리 만치 각 분야의 핵심 연구원들이 연루되어 있었더랬다.

모든 정보가 넘어가기만 해도 당장 기술력으로 SKY의 턱밑까지 쫒아 올 수 있을 만큼이었다.

품에 손을 넣었다 빼더니 립밤으로 위장한 USB를 올려 놓고, 내가 내밀었던 USB를 집는 조상근.

"이것만... 왕소연에게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네, 그러면 됩니다. 아직도 왕소연이 진심이었는지 궁금하다면, USB를 주고 청혼을 해보세요."

"예... 그리 하겠습니다."

"앞으로 꽃뱀 조심하시고요."

"예."

조상근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받았지만 그를 완벽하게 믿을 순 없었다.

감봉 3개월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 할 것 역시 사실이나 그건 나중의 문제고 현재로서는 그가 다시금 왕소연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있으니 함께해야 했다.

"같이 가시죠, 약속 장소로."

"아... 예."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아닙니다 회장님, 제 잘못인걸요."

회의실 바깥으로 나가니 호석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우릴 안내했다.

차량에 오르자마자 조상근의 몸에 마이크 같은 것을 채우는 호석.

"감청 장치입니다. 긴장하지 마시죠."

"아... 예."

"USB를 주면서 다음 약속을 만드시는 게 좋습니다."

불쑥 끼어들어 호석에게 말했다.

"아마 오늘 청혼하실겁니다."

호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조상근을 바라본다.

"그럼 수락한다면 상하이 힐른 호텔 펜트하우스로 오라고 말씀을 하세요, 연구원님이 가지고 계신 USB는 가짜니까, 왕소연은 USB를 확인하고 진짜 정보를 얻기 위해 다시 접근을 해 올 겁니다."

내가 오늘 묶을 숙소를 얘기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호석도 즉흥적으로 작전을 만들어 낸 것이니 그러려니 하고 이해했다. 어차피 왕소연이라는 여자가 그 호텔에서 잠을 잘 순 없을테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아... 청혼 하신다고 했으니 긴장하는 것도 어색하진 않겠군요."

호석이 날 바라보며 '그것까지 생각하신 겁니까?'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런건 아니었는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스쳐가는 상하이 시내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차량은 금새 약속장소 주변에 도착했고, 조상근은 침을 꿀꺽 삼키며 차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야, 오늘 우리 호텔에 미인 한 분 오시겠네."

"오셨다 가실겁니다."

싸늘한 얼굴의 호석을 보니 꼭 그렇게 될 것 같았다.

***

중국은 참 건물을 빨리 짓는다.

해서 나는 이곳 최상층 펜트하우스가 영 불안하기만 했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힐른 호텔 건물이니 무너지기야 하겠냐마는, 중국이라는 브랜드 평판이 있잖은가.

이런, 저런.

실 없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참. 막 하릴없는 상황에 불쑥 짜증 날 것 같은 때에 적절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

"회장님, 왔습니다."

"기다리느라 혼 났네."

호석이 피식 웃으며 문 쪽으로 향하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문을 마주보고 섰다.

호석이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고.

"헙!"

잔뜩 당황해 눈을 부릅 뜬 왕소연이 보였다.

사진으로 봤던 것 보다 더 대단한 외모가 돋보였다. 입고 있는 노출이 심한 옷들을 보니 다시 한 번 세상 순진한 조상근 연구원을 홀리려고 작정을 했구나 싶었다.

"들어오지."

당황한 것도 잠시.

내 말에 분명 왕소연은 한국어를 할 줄 알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며 못 알아 듣는 척을 한다.

문을 열고 기다리던 호석이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왕소연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채 당겨버렸다.

'꺄악!'하는 여성 특유의 비명소리는 없고 그대로 당기는 힘을 이용해 허리를 숙이며 뒷발로 호석을 차려하는 왕소연.

허나, 호석은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 허리를 뒤로 빼며 땅 바닥에 붙어 있던 왕소연의 반댓발을 툭 하니 차버린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는 왕소연.

"오, 전투 훈련도 받았나 봐요."

내 말에 호석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제법 훈련된 움직임입니다."

"어우, 그럼 피곤하겠는데요?"

"어느 나라나 정보부 블랙들이 다 그렇죠."

어느새 문이 닫히고 호석은 한쪽 무릎을 꿇고 왕소연의 머리를 들어 올린다.

"얌전하게 가자. 어디하나 부러트리고 시작하고 싶진 않으니까."

앞으로 넘어지며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가에 피가 흥건한 왕소연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태연하게 앞장서 소파를 향해 걸었다. 뒤에서 불쑥 느껴지는 인기척.

"회장..."

콰당.

본능적으로 나온 회피에 이은 업어치기.

"끄으..."

왕소연은 이번에는 앞이 아닌 뒤로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잠시 당황한 듯한 표정의 호석에게 힐끗 바닥에 누워 답답한 호흡을 내뱉고 있는 왕소연을 눈짓하며 말했다.

"어디 하나 부러뜨리고 시작합시다."

까드득 어금니를 짓씹은 호석이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왕소연에게 다가가 거칠게 몸 수색을 하고는 작은 칼을 찾아내 다가온 PMC대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발목 하나, 손목 하나."

하나가 아닌 두군데를 말하는 호석.

"감히 회장님께 술수를 부린 죄입니다."

"도망은 못치겠네요."

"예, 그래야죠."

"그럼 교육 시키고 계세요, 잠시 아이들이랑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예, 회장님."

잠시 조용한 곳으로 향하는 사이 뒤 쪽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답답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늘은 밤이 길겠구나 싶었다.

얼마 뒤.

그러니까 대충 아주 작은 시가를 태우고 나서야 다시 바깥으로 나갔으니 대략 1시간쯤이 지났을 때였다.

"오우야..."

처음 왕소연의 몰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현재 왕소연의 몰골과 확연이 대비되었다.

제법 좋은 머릿결을 자랑하던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입고 있던 치파오는 걸레짝으로 변했으며 발목과 손목은 퉁퉁 부어 바늘로 찌르면 풍선처렁 '펑'하고 터질것만 같았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두 눈은 벌써 판다꼴을 하고는 잔뜩 떨리는 두 눈으로 날 바라보는 왕소연.

"말 할게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교육이 무척, 확실히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뜻.

"확실해?"

"네, 네! 정말 확실해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 말 하겠습니다."

"내가 중국, 그러니까 장저민한테 좀 받아야 될 이자가 있거든?"

"네? 이자요?"

"그래, 이자. 돈."

"아..."

"국가안전부도 블랙들 활동자금은 따로 관리할 거 아냐?"

두 눈을 크게 뜨는 왕소연.

"그, 그런 것까지는 저 같은 말단은 알 수 없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호석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왕소연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지부장! 지부장은 알거에요! 정말이에요! 나는 몰라도 지부장은 제법 높은 직책이니까! 정말이요!"

"그 놈은 어디있는데?"

"제가 안내 해 드릴게요! 잘 할 자신 있어요!"

호석이 날 바라본다.

"대원들 준비 시키세요, SKY전자나 건설에 비어있는 창고 같은 곳 보안 갖춰 놓으시고."

"예, 회장님."

< 제 278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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