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4화. >
예로부터 명동엔 감히 천가를 무시 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 만큼 나의 할아버지는 명동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적으로 손을 뻗으며 대한민국의 암흑계를 주름 잡았다.
"아이고야, 많이도 들어 온다. 그렇죠?"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현금유동 장부였다. 지하경제에서 한 발 물러났다고 하나 어쨌든 대한민국 지하경제 시장은 내것이었다. 정확히는 우리 천가의 것이지만 천가의 것이 내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할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손을 떼셨으니 관리는 내가 해야 했다.
끼이이익.
차량이 멈춰서고 명동에서 제일가는 대부업체 건물을 올랐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직원 하나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어? 어어! 어어어!"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는지 뱉을 줄 아는 말이 '어'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예, 내가 바로 천우진입니다."
"회, 회, 회, 회, 회."
"그래요, 박무성 사장님 안에 계시죠?"
"네, 네네네."
나까지 정신이 없어질 것 같으니 서둘러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서 뭔가를 보고 있던 박무성 사장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그간 너무 소홀했죠? 너무 오랜만에 왔다, 그렇죠?"
"아닙니다!"
"김장원 사장이 감사도 하고, 기분도 나쁘셨을 것 아닙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 경제가 살만 하니, 요즘은 이자 수급도 수월해서 먹고 살기 좋아졌습니다."
"이야, 칭찬이 수준급이신데요?"
"하하하, 앉으시죠."
자연스럽게 소파 상석에 몸을 묻었다.
처음 이곳에서 서슬퍼런 기세 싸움을 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내가 상석에 앉는 그림이 자연스러워졌다.
박무성 사장의 얼굴에서도 나를 향한 진심어린 충성심이 언뜻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공손하게 내 앞에 손수 우려낸 차를 내려 놓고는 자리에 앉은 박무성 사장.
"정말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서운하다고 돌려 까시는 거에요?"
"하하하, 그럴리가요. 우리 일이라는게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회장님께서 방문하시니 더 불안 합니다."
말은 불안하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여유롭기 그지 없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표정. 저것은 그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는 방증이리라.
"딴 거 아니고, 요즘 자금 흐름을 보니까 외자가 제법 들어 오는 것 같더라고요?"
"아, 예. 어디서 생긴 것인지 요즘 부쩍 시장에 돈이 흐릅니다. 이거 저 같은 놈들 다 굶어 죽으라는 소리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가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음?"
"아, 용정차입니다. 입에 맞으시나요?"
"예, 차 향은 좋은데... 용정차라."
"중국 대사관이랑 살짝 일을 했는데 선물로 주더군요."
"중국 대사관이랑 일을 하셨다?"
"명동에 우리가 자리 잡은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중국 대사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시중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을 수 없으니 종종 이용하곤 했습니다. 물론 저리로 내주었고요."
"중국 대사가 돈을 빌려갔다?"
"예, 회장님."
"좀 봅시다."
"예?"
"중국 대사가 빌려갔다는 돈, 차용증 좀 보자고요."
"아, 예."
박무성이 빠르게 사장실 책상 뒤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 장부 하나를 들고 다시 소파에 앉는다.
"저쪽이 금고인가 봐요?"
"하하, 예. 저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요?"
"흐음, 오늘 소주 한 잔 사신다고 약속하신다면 들여보내 드리겠습니다."
"어이쿠, 애가 둘이라 주머니가 가벼워서 그건 안 되겠네요."
"파하하, 서운하게 그냥 가시지는 않겠죠?"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박무성과 이렇게 편하게 얘기가 진행된다는게 어색해서도 있었다.
"이겁니다."
농담은 끝났는지 장부와 함께 중국 대사가 작성한 차용증을 보여주는 박무성.
"20개?"
"예, 상환일은 8개월 뒤 입니다."
"이 새끼 뭐하는데 20억이나 빌려 갔을까요?"
"안 그래도 이번에는 액수가 제법 크더군요, 평소에는 많아야 5개를 넘기지 않았는데 저도 의아해서 물어봤습니다만, 워낙 신용이 좋았던 놈이라 믿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명동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리고 튀지는 않는다.
이 '사채'라는게 참 무서운 것이라 중국, 일본 사채시장의 우두머리들도 한국 사채시장에 제법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일종의 동맹관계가 설정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돈을 빌리고 제 놈의 나라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차용증을 도망친 나라에 판매하면 된다.
손해 볼 장사는 하지 않는게 대부업이라는 소리.
그걸 아는 박무성 역시 크게 의심하지 않고 돈을 내 준것이다. 대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돈을 갚지 않는다? 사채는 대통령이 빌려가도 반드시 갚아야 했다. 추심꾼들은 정말 미친놈들이 많으니까.
"20개라... 뭐, 이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요즘 외자가 어디서 자꾸 들어오는거죠?"
"중국 쪽으로 보입니다."
"중국?"
"예, 넘어오는 조선족들이나 한족들이 제법 돈을 풀더군요."
내가 말하는 '외국자본'은 단순한 사채시장의 자금 흐름을 얘기하는게 아니었다. 명동에서 대부업을 관장하고 있는 박무성이지만, 지하경제의 '수장'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러니 지금 나와 박무성이 얘기하는 '외국자본'은 암흑계에 흐르는 자금출처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게는 유흥주점들의 매상액부터, 아가씨들이 갚는 돈, 오락실에 흐르는 현금. 크게는 사설카지노와 경마장 같은 곳에서 흐르는 자금등이 본래 흐르던 사이즈와는 다르게 마치 장마를 맞은 강 처럼 유속을 빠르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중국 자본이라."
호석에게 눈빛을 보내니 고개를 주억거린다.
내 뜻을 알아차린 모양.
"아무래도 떼 놈들이 뭔가 할 모양입니다."
"짱깨들이 움직인다는 말씀이십니까?"
박무성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허허롭게 웃고 있던 박무성의 얼굴이 흉신악살 처럼 잃그러졌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박무성은 할아버지가 꼭대기에 앉아 있을 때에도 서열 2위 3위를 하던 사람이었다. 결코 이 시장에서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라는 뜻.
"감히... 명동도 탐한답니까?"
"글쎄요, 대국, 대국 하는 놈들이라."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 들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겠습니다."
"경계 하라는 얘기에요. 이상하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부업체 전부에 전달하시고."
"예. 회장님."
***
국을 한 수저 퍼 올린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 놓으셨다.
"아산댁의 들깨 미역국이 그립구나."
픽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왜요, 청와대 음식 맛있다고 소문 났는데."
"너무 건강식이야, 간이 영."
"크크큭."
"웃기는, 그나저나 또 왜? 청와대가 네 집 안방도 아니고 너무 자주 드나드는구나, 바깥에서 소문이 안 좋아."
"손자가 할아버지 본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요?"
"세상 사람들이 꼭 그렇게만 보겠더냐."
"중국놈들이 뭔가 수작질 벌이는 것 같은데, 알고 계세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시며 젓가락을 옮기신다.
"중국 대사가 명동 박 사장에게 20개를 가져갔다고 하더군요."
"20억이라. 어느 놈에게 기름칠을 하려고 그랬을까."
"그러니까요, 안테나 세우고 계신가 해서 여쭤봤습니다."
"새로운 정당을 만드려고 바쁘구나."
"새 정당 만드실 때, 다른 정당들 처리 해 놓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할애비는 그냥 꼭두각시나 서면 어디 덪나느냐?"
"덪나죠, 그럴려고 어깨랑 허벅지에 구멍 뚫으신 거 아니잖아요?"
"이놈아, 집밥이 그립데도."
어깨를 으쓱였다.
"네 놈도 바깥으로 도는 것을 보니 집구석에 앉아 있기가 싫은 것 같은데, 그것도 네 놈이 맡지 그러느냐."
"그럴까요?"
"오냐, 태양이랑 별이는 내가 알아서 하마."
"확 끌리긴 하네요. 전 요즘에 할아버지가 스트레스 받으실까봐 그렇죠?"
"내가 무슨 스트레스를 받느냐?"
"육식동물이 사냥을 해야죠, 요즘 너무 풀떼기만 뜯으셔서요."
"파나마에서 실컷 피를 마셨더니 한 2년은 쉬어도 될 것 같구나."
"그러시다면야."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할아버지.
"그럼 오늘은 집으로 퇴근을 해볼까."
"그러세요, 말씀 잘 해 주시고. 루시한테."
"오냐, 네 놈이 공사가 다망하다 얘기해주마."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죠 뭐."
할아버지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는다.
"이 놈이 이미 준비를 해 놓고 나를 떠 봤구나."
"아니, 저는 할아버지가 가실 줄 알았죠?"
"어디를 말이더냐?"
"중국 대사가 오늘 요정을 예약했더라고요?"
"그 현장에 직접가겠다?"
"해야 할 일이 한 두개가아닌데, 국개의원 놈들한테 휘둘릴 수 있나요? 쇠뿔도 단숨에."
"으음... 그건 좀 끌리는구나."
"아쉽지만, 할아버지는 집으로 퇴근하시는 걸로."
"커험, 그 원로라는 놈들이 똥 씹은 얼굴을 보면 체증이 가라 앉을 것도 같은데..."
"그건 뉴스로 보시는걸로."
"커험, 내가 또 네놈에게 당했구나 쯧. 다녀오거라."
"하하, 예."
***
중국 대사 하이밍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긴 장소는 북창동의 유명한 요정.
한옥으로 예쁘게 꾸려진 요정에 고급 세단이 즐비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간 그를 반기는 대한민국 원로 정치인들.
"좀 늦었습니다."
한국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창한 발음의 한국어가 하이밍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오랜만이오 대사."
"그러게요, 자주 봬야 하는데 요즘 통 바빠서 걸음을 못했소."
"괜찮습니다. 우리도 제법 바빴던 지라."
"하하하, 천혁수 그치가 요즘 정당을 새로 만들려고 움직이고 있다지요?"
대한민국의 원로 정당이라 불리는 두 당의 정치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놀리자고 부르셨습니까?"
하이밍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파하하하, 그럴리가 있습니까? 내 친우들이 힘에 붙이는 것 같으니 친우들에게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고자 왔지요."
"그럼 술이나 자십시다. 술맛 떨어지는 얘기는 그만 하시고."
하이밍이 뒤쪽에 자신의 보좌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럼 더 술맛을 돋궈 줄, 안주가 필요하지요."
원로 정치인들이 눈을 빛내며 하이밍의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방 안의 정치인들의 수를 맞춰 준비된 007 가방들.
"급하게 준비하느라 미흡하지만 그래도, 당장 오늘 술 맛은 좋아질 것입니다."
차근차근 국회의원들 앞에 놓여지는 가방들.
성격이 급했던 4선 의원이 가방을 여니 그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만원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하하하, 이거 벌써 술맛이 좋아집니다 그래?"
"그렇습니까?"
어느새 술 자리에는 다시 웃음꽃이 피고 바쁘게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모두가 싱글벙글한 술자리가 무르익자 하이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공화국과 한국이 비밀리에 사업을 하나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짖는 국회의원들.
"사업? 공동으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사업입니까?"
"유라시아 횡단철도라는 사업이라 하더군요."
"유라시아? 우리나라에서 출발하는 철도가 유라시아까지 가겠다?"
"그렇습니다. 한국을 출발해 북한, 중국을 거쳐 유럽, 중동, 동남아까지. 갈 수 있는데가 많지 않겠습니까?"
국회의원들이 바쁘게 눈빛을 주고 받는다.
말만 들어도 젖줄이 줄줄 흐르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당장 '건설'만 해도 그랬으며 철도가 깔리고 기차가 지나다니기 시작하면 재계발 열풍이 미친듯이 불어 닥칠게 뻔했다.
인건비 또한 상상을 초월할 사업이었으니 정치인들은 저마다의 머리에 딴 생각을 품기에 충분했다.
"어디까지 협의가 된 겁니까?"
원로 정치인의 말에 하이밍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당 지도부에서 그런 얘기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흐음... 아직 천혁수 대통령도 별 말은 없었습니다만... 문제는 북한과의 협상이겠군요?"
"그 부분은 우리 공화국이 관여하는 만큼 쉽게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북한이라면."
하이밍이 슬쩍 저마다의 품에 소중히 갈무리 된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서, 우리 공화국 쪽에 유리하게 움지여주십사 간청을 드리러 왔습니다."
"커험, 글쎄요... 워낙 이권이 많이 개입될 사업인지라."
국회의원의 의뭉에 여유롭게 웃는 하이밍.
"그렇지요, 많은 이권. 맞습니다. 그 이권에 여기 계시는 존경받아 마땅한 의원님들도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공화국이 대국의 자존심이 있지, 섭섭하게 챙겨 드리겠습니까?"
"험험. 대국이라면야 그렇겠지요."
한 의원이 돈가방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하긴, 한국은 예부터 사대부의 나라가 아닙니까?"
"허허, 그렇지요 사대부들은 수백년을 호령하던 정치인들이 아닙니까?"
하하호호.
시끌벅적한 요정의 VVIP 룸.
드르륵 쾅!
그 현장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이 거칠게 문을 열고는 들어왔다.
"아주 놀고들 있다. 사대? 지랄들 하고 있네."
"처, 천우진?"
< 제 27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