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67화. >
따사로워야 할 봄 볕 아래.
대한민국보다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해서 일까, 4월이 다가오는데도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풍이 몰아치는 함경북도의 작은 마을.
"재형 동무."
김은정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이재형.
"왜 부르십네까?"
"이거이 정말로 하전사들이 거뜬히 수행하는 훈련이 맞네?"
"이거는 훈련도 아니야요, 진짜 훈련은 더 혹독하디."
"후우..."
김은정은 비지땀을 흘리며 잠시 쉬잖은 듯한 얼굴로 한 팔을 들어 올린다.
원래라면 평양에서부터 함경북도까지 이동했어야 하지만, 김은정을 위해 굳이 중국에서 국경을 넘어온 이재형이었다.
"조금 더 힘 내시라요, 이제 다 왔으니."
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김은정이 이내 다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얼굴도, 살색도 에법 하전사의 티가 납네다."
그런 김은정을 독려라도 하듯, 이재형의 입에서는 립서비스가 쏟아졌다.
"됐으니, 서둘러 가지."
"따라오시라요."
황량한 국경을 지나 함경북도의 작은 시가지가 나타나자 김은정이 가뿐숨을 내쉬며 이재형의 팔 목을 잡는다.
"다 왔디? 길티?"
제발 다 왔다고 말해줘 하는 표정으로 간절히 외치는 김은정.
"후우... 군장도 없이 겨우 60km를 걸었습네다. 힘든 것도 아닙네다."
"내레... 운동을 하디 않은 것을 후회할테니, 그만 하라."
입술을 삐죽이며 김은정이 털썩 주저앉아 이재형의 등짐에서 단물을 꺼내 마신다.
지나는 인적이 거의 없어 황량하기만 한 시가지.
"여기가 어디네?"
"함경북도 청진입네다."
"애미나이 하나 안 보이는 구만 기래."
이재형이 손목 시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다들 어딘가에서 일을 할 시간입네다."
"길쿠만... 평양이랑은 확실히 다르구만."
"비교가 안 되디요, 직접 보시면 아실겝니다."
"우리 공화국에... 빈부격차가 심했구만 기래."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김은정에게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김은정도 이재형도 북한 인민군 하전사 군복을 입고 있으니 더욱 긴장한 아이들.
이재형은 아이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김은정이 들고 있는 단물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뭐이네? 저 아새끼들은."
"동무의 단물이 마시고픈 모양입네다."
"단물?"
"예, 동무. 이쪽 아이들은 아마 구경도 못해봤지 싶습네다."
"여기는 단물이 유통되지 않는다는 말이간?"
쯧, 하고 혀를 찬 이재형이 되려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 60km를 걸어 오면서 '차'를 봤습네까?"
"못 봤지."
"여기는 기런 곳입네다."
무슨말이냐는 듯 이재형을 바라보는 김은정.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라는 얘깁네다. 굶어 죽는 인민들이 새로 태어나는 인민들보다 적은 곳이야요."
김은정의 고개가 스륵, 다시 아이들에게 향한다.
"저 간나들이... 굶어 죽는 것이 많다?"
"하루이틀 있을 것도 아니고, 더 있다보면 알게 되실겝니다."
입맛을 다시던 김은정이 마시던 단물을 조심스럽게 내려 놓고는 걸터 앉아 있던 시멘트 덩어리에서 엉덩이를 떼고는 일어났다.
"가디... 내레 이 땅이 어떤 곳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갔어."
"똑똑히 보시라요, 미래에 동무의 땅이 될 곳이니."
이재형의 말에 굳세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김은정.
"길티, 내 땅이 될 곳이디."
***
차가운 북풍에 김은정이 몸에 떠는 사이.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볕아래 제 정신이라고 볼 수 없는 몰골로 입을 '헤' 벌리고는 침을 흘리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물 하나.
"허억, 허억."
숨이 어찌나 거친지 폐라도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여기저기 쩍쩍 갈라진 피부하며, 걸치지 않은 웃통 피부 위로 허연 소금기가 자욱 한 것이 땡볕 아래 벌써 몇 시간 째,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음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전방에 보이는 물병, 갖고 싶나?"
"갖고 싶습니다!"
잔뜩 군기가 들어 갖고 싶다 기계적으로 외치는 인물, 그는 한 때. 중국의 부주석 자리에까지 올랐던 후진다오였다.
"뛰어!"
"뛰어!"
복명복창을 외치며 언제 지쳤냐는 듯 미친듯이 달려가는 후진다오.
그가 막 도착해 타클라마칸 사막 위 모래밭을 슬라이딩 하는 찰나.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밧줄이 당겨 지며 그의 손에 쥐어지려던 철제 수통이 쭈욱 어디론가 딸려나간다.
"놓치면 물은 없다! 뛰어!"
저 멀리 벼락같은 호통에 이를 질끈 깨물고는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 후진다오.
어느순간 뛰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느릿느릿한 속도로 움직이는 후진다오, SKY PMC의 대원들은 정말 딱 죽기 직전까지만 훈련시키고 있었다.
강한 육체에 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어떤 사람의 조언처럼, 지금 그들은 후진다호의 육체를 강제 개조 시키고 있었다. 강한 충성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뚝 멈춰 선 수통을 움켜쥔 후진다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잡았다아아아아아!"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해도 저 보다 더 좋아할 수는 없을 것 처럼, 수통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후진다오.
삐이이이이익!
멀리서 호각소리가 들리자 흠칫 몸을 떤 후진다오가 소중히 수통을 갈무리 하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666번."
"666번 교육생! 부르셨습니까!"
"네가 충성해야 할 국가는 어디인가?"
"대한민국입니다!"
"네가 충성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SKY! 하늘!"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목소리가 작다!"
"그렇습니다아아악!"
흡족한지 고개를 끄덕인 PMC 대원이 사막용 오토바이에 몸을 싣는다.
"좋다, 현재시각 14시 20분."
"14시 20분!"
"18시 00분까지, 주둔지로 올 수 있도록."
툭.
대원이 후진다오의 앞에 지도와 작은 초콜릿 한 덩이를 꺼내 놓는다.
"오늘 식사는 주둔지에 도착하면 배급받는다."
"알겠습니다!"
"해산!"
"해산!"
부아아아아아앙.
오토바이는 모래를 튀기며 사라지고.
후진다오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초콜릿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어 혀를 굴려 천천히 녹여먹으면서 지도를 살핀다.
"1... 14km?"
주둔지까지 직선거리 14km
이 사막에서 땡볕 아래에서 후진다오가 걸어가야 할 거리였다.
"왜... 도대체 왜! 왜에에에에에!"
푹 고개를 숙이고 짧게나마 가만히 있던 후진다오가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지도의 방향과 반대 방향이었다.
퍼억!
모래가 비산하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멈춘 후진다오.
투웅.
이내 멀리서 총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늦게 도착하고 탄이 먼저 도착했다는 것은 먼 거리에 저격수가 있다는 뜻, 저격수는 후진다오를 올바른 길로 가라 위협하고 있었다.
뚝, 뚝.
후진다오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내 발걸음을 다시 뒤로 돌려 SKY PMC의 타클라마칸 사막내 주둔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이번 중국행의 마지막 스케쥴은 SKY전자 베이징 공장을 둘러보고, 장저민을 만나는 것이었다.
전자의 공장 내부 보안시설이 주효 체크 리스트였다.
"어떤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타 부서간 업무 얘기 자체를 금하고 있습니다. 사규로 엄중히 얘기 해 두었으니, 아직까지 어기는 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기본중에 기본이 되는 보안 사항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다른 사람이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었다.
게다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어떤 부분을 담당 하더라도, 프로젝트가 완성 될 때, 결과물이 무엇일지도 예측 할 수 없어야 했다.
"철저한 시스템화로 본인의 업무에만 충실하게 만들어 주세요."
"예, 회장님. 직원들에게 그 부분은 주기적인 교육을 하고 있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베이징 지사장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호석을 보니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내가 이곳에 방문하기 전에, 이미 PMC정보부에 의해서 지사장의 신상정보는 물론, 외부 인사와의 만남같은 것들을 감시하고 있었을테니, 호석의 고갯짓은 안심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좋습니다. 생산라인에는 전혀 문제가 없죠?"
"위생은 물론 회장님의 특별 지시사항으로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고 있으며, 8시간 3교대 근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번 2분기 부터는 케파의 증가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슬슬, 이 공장에서도 숙련공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회장님. SKY 항공우주기술이 개발한 자동화 설비 역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생산량을 늘리고 실적을 쌓는 것 보다. 우리 기술을 중국에 빼앗기지 않으면서 실익만 가져가는게 더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명심하겠습니다."
책임자가 내 말을 확실히 알아 들은 것 같으니 나는 빠르게 공장을 벗어나 차에 올랐다.
장저민을 만나는 일은 상당히 피로한 일이기 때문에 조금 쉬어줄 필요가 있었다.
장저민도 나도, 현재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후진다오'라는 정적을 완벽하게 제거한 장저민은 불도저 처럼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안면을 바꾸어 'SKY 철수!'를 외칠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놈의 욕심에 SKY의 기술이 충족되었을 때 그렇게 될 터였다. 아직 중국이 SKY의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최소 10년은 넘게 걸릴터였다.
과거, 그러니까 전 삶처럼 순식간에 중국놈들에게 기술을 내 줄 만큼, 나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쪽 산업 스파이들, 명단은 나왔습니까?"
"예, 회장님."
호석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드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산업스파이라는게 매우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뤄져야 할 일인데 누가 중국 인구 많다는 거 모를까 봐 그런지, 명단이 끝도 없다.
"총 428명?"
"예, 회장님."
"미치겠구만..."
"대부분 한직이나 단순 작업에 투입 했습니다."
"이건 뭐 너무 노골적이라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요."
장저민이 SKY의 그늘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파 하는 욕심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근래 들어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의 SKY영역에도 자주 공안들이 들락거린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후진다오가 사막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지 꼭 3개월만에 일이었다.
"하여간 중국놈들 믿을게 못 된다니까."
혼잣말에 피식 웃는 호석.
"아직 중국에서 빨아 먹을게 제법 많이 남았으니까, 보안에 더 투자를 하세요. 장저민이 바보도 아니고,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기 전까지는 SKY를 문닫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예, 회장님."
"그러고 보니까 후진다오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흐음..."
호석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않지만, 눈으로 질문하고 있었다.
'처리할까요?'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일단 좀 더 두고보죠, 우선 일본부터 정리하고... 오늘 장저민 놈도 좀 만나보고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후진다오를 쓴 다는 방향 쪽으로 정보부에서 미리 작전의 얼개를 짜 보세요."
"예, 회장님."
< 제 26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