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64화 (264/458)

< 제 264화. >

북한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상무위원회의.

대충 김일정의 명령을 듣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정기적인 행사 같은 느낌의 그것이 끝나고, 회의장을 벗어나 복도를 걷는 김일정이 불쑥 인상을 찌푸렸다.

"뭐이네?"

"시간 좀 주십시오 아바이 동무."

김일정의 삼남 김은정이었다.

"일 없다 하디 않았네?"

"아바이 동무, 나도 형님처럼 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사명을 다 하고 싶습네다. 어찌 어리다고 안된다고만 하십네까?"

"고저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라!"

김일정이 턱짓으로 김은정을 가리키자, 김일정의 친위대원들 둘이 김은정을 양쪽에서 붙잡는다.

"이거 놓으라!"

김은정의 말은 들은척도 하지 않는 친위대원들은 결국 그를 질질 끌고 가, 김은정의 방 안에 집어 넣는다.

털썩 의자에 주저 앉은 김은정이 젖살 가득한 볼때기를 푸들푸들 떨며 담배를 입에 문다. 84년생 김은정은 아직 제 아비 김일정의 눈에는 한 없이 어려보이기만 하는 모양.

한 명의 친위대원이 나가고 남은 한명의 친위대원이 문 앞에 서서는 김은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무."

"말씀하시라요."

"내레 아딕도 핏덩이 같아 보이네?"

"나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아이같습네까?"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니 기분이 상했을까, 김은정이 피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비벼끄고는 친위대원을 거칠게 쏘아본다.

"어려 보인다는 거이네? 아이라는 거이네?"

"말씀드렸습네다만, 상대적인 거이니. 동무의 행동이, 어려보이디 않는다면, 그렇디 아인것 아이같습네까?"

"쉽게 말해 보라!"

"공화국의 전사 처럼 행동 하시믄, 누가 감히 어리게 보갔습네까? 공화국 전사, 공화국 사내들 처럼. 그렇게 해 보시디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앉아있던 김은정이 벌떡 일어서며 손뼉을 마주친다.

"어리게 보이디 않고 싶으면, 행동을 어리게 보이디 않게 하라? 그 말이 맞소 동무?"

"그렇습네다."

"호오..."

김은정은 솔깃 한지 한참 친위대원을 바라본다.

"동무의 이름이 무엇이오?"

"제 이름은, 공화국 최고 지존께서만 아실 수 있습네다."

"내레 은혜를 받았으니, 잊디 않으려 함이오, 알려주시라요, 동무."

"으음..."

"걱뎡하디 마시라요, 내레 공화국 지존의 핏줄 아입네까?"

"제 이름은... 리재형입네다."

"친위대원 리재형."

"그렇습네다."

"잊디 않갔소!"

김은정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이 되어서는 다시 의자에 앉는다.

"리재형 동무."

"말씀하시라요."

"이 공화국을 좀 먹는 벌라구가 있는데, 그 벌라구가 지존의 핏줄이면, 어이 해야 합네까?"

듣기에 따라 매우 살벌한 얘기.

리재형은 무뚝뚝한 눈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아이 했습네다."

김은정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아, 질문은 바꾸겠소. 공화국을 좀 먹는 벌라구는 어이 합네까?"

"쥑이야디요."

"맞습네까?"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재형.

지금 김은정이 입에 담은 벌라구가 누구인지는 그도 알고 김은정도 알았다.

김일정의 장남 김남정을 일컫는 말이었다.

"벌라구는 디금도, 중국땅에서 돈 지랄을 하고 있갔구만... 쯧. 아바이 동무는 도대체 그 벌라구를 뭐가 이쁘다고 그러는 줄 모르갔소. 동무는 아시오?"

"친위대원은, 지존의 생각을 궁금해 하지 아이합네다."

리재형의 대답에 김은정이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한다.

"동무의 충심이 자꾸만 날 기쁘게 하는구만 기래... 내 동무가 무척이나 탐나오, 식견도 있어 보이고... 두 눈에 공화국 전사의 혈기가 흐르니."

"감사합네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갔소."

"말씀하시라요."

"내레, 공화국의 어른처럼 보이려면 무엇을 해야겠소?"

리재형이 뚫어지게 김은정을 바라보다 무엇인가가 떠올랐는지 작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공화국의 자랑스러운 전사라면, 뭐니뭐니 해도 전사지원이 아이갔습네까?"

눈을 크게 뜬 김은정.

"지금 나 보고 전사가 되라?"

"여태껏 지존의 핏줄들 중에, 전사 출신은 없었디요."

"튀어나온 송곳이 되라는 얘기구만 기래..."

"무시하시라요, 몸뚱이 쓰는 것만 아는 놈이 한 얘깁네다."

"전사가 되어라... 전사가..."

김은정이 관심을 보여서일까? 리재형이 말을 덧 붙인다.

"이왕이믄, 공화국의 하전사로 시작하는 거이 좋을 것 같습네다."

"지존의 핏줄이 하 전사가 된다?"

"공화국의 전사들에게 같은 전사 출신이 같는 의미를 알고 계십네까?"

"대충 들었소."

"음..."

리재형이 무엇인가 얘기하기를 망설이는 듯 보이니 몸이 달았는지 김은정이 그를 독려한다.

"내레 오늘 일은 나만 알고 있을 터이니, 계속 말해 보시오."

"초대 지존께서는 전사 출신이 아입네까?"

"길티... 우리 아바이 동무는 아이지만, 할아버지 동무는 확실히 길티."

"우리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상징성이 중요한 것 아이갔습네까?"

"기리니까, 할아버지 동무 처럼, 전사 출신이 되어라?"

리재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타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동무께서 더 잘 아시갔디만, 민족성, 공통점, 동료애, 뭐 전우애. 그런 거이 중요한 세상 아이갔습네까?"

"바닥 부터 같이 기다 올라갔으이, 희망이 될 수도 있갔구만 기래?"

"그렇습네다."

"됴아... 아두 됴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던 김은정이 품에서 미제 담배를 한 갑 꺼내어 리재형에게 건넨다.

"동무가 참 마음에 드는구만 기래."

"아니 이것은..."

"아는 사람들끼리 빡빡 하게 굴디 않기요?"

"아, 알갔습네다."

품에 미제 담배를 잘 갈무리한 리재형.

"동무는 오늘부터, 내 친위대가 될게요. 문제 있소?"

"죄송합네다만, 내 거취는 지존께서 결정하십네다."

"아바이 동무와 단판을 짓고 오디."

거칠게 문을 열고 나서는 김은정을 보며 리재형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쉽다 쉬워, 애송이."

그의 눈에 김은정은 그저 어린아이로만 보였다.

***

과거, 그러니까 정확히는 전 삶에서 언론을 통해 보았던 얼굴. 김남정이 반원의 테이블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며 카드를 쪼고 있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빈 자리에 앉으며 딜러에게 물었다.

"바이인?"

"밀리언 달러."

최소 참여금액이 백만달러인 테이블, 북한에서 왔다는 놈이 어디서 돈이 나, 이런 큰 게임을 할까 싶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힐끗힐끗 중국인들 몇과 김남정, 외국인 둘이 날 바라본다.

중국인 몇과 김남정은 내게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외국인 둘은 날 바라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내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

"캐리, 왜 놀라?"

중국인 한 명의 질문에 캐리라 불린 사내가 작게 소곤거리자, 다른 중국인들이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린다. 마치 호구라도 본 듯한 표정들이었다.

때마침 호석이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칩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칩을 보며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

김남정 역시 나를 주의깊게 살핀다.

뭐 하는 놈인데 저렇게 돈이 많나 싶은 모양, 자신보다 어려보이니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샥, 샥, 샥.

딜러가 카드를 돌리기 시작하고.

"콜."

"콜."

"다이."

"다이."

"콜."

다들 플랍은 열어보고 싶었는지 무려 세 명이나 베팅없이 콜을 해 온다.

이어진 내 차례.

"올인."

"왓?"

서양인 한 놈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날 바라본다.

얼추 봐도 500만 달러는 되어보이는 칩을 올인했다.

"이봐, 당신 카드 안 보지 않았나?"

서양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쫄리면 뒤지시던가?"

표정이 썩어가는 김남정과 '콜'을 외쳤던 중국인 둘.

잠시 고민하던 김남정은 까드득 어금니를 짓씹으며 '다이'를 외치고는 카드를 딜러에게 던졌고, 다른 중국인 하나 역시 테이블을 쿵 내려치며 카드를 딜러에게 던진다.

남은 중국인 하나는 잔뜩 성이난 눈을 하고는 날 바라보다 제 칩을 거칠게 베팅라인 안쪽으로 밀어낸다.

"콜!"

딜러가 테이블을 내려치는 시늉을하며 '헤즈업!'이라 말하고는 나와 중국인의 카드를 받아가 오픈한다.

중국인은 클로버 A와 J를 들고 있었다.

상당히 좋은 패, 나름 프리미엄 핸드라고 봐도 좋았다.

반면 내 카드는 다이아몬드 2와 4.

누가 봐도 올인할 패는 아니었다.

"미친, 정말 안 봤나 보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김남정.

나는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확률 게임 아닙니까?"

"포커는 실력이지."

나름 게임에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다.

나와 헤즈업(1:1) 플레이를 하게 된 중국인은 벌써부터 이긴것 처럼 싱글벙글이다.

"내가 카지노에서 느낀 격언이 있지."

나를 훈계라도 할 모양이다.

"별로 관심 없습니다만."

아직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제 놈이 이긴 것처럼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계속 말을 잇는 중국 놈.

"겸손, 또 겸손. 확실하지 않으면, 베팅을 하지마라."

"풉."

절로 웃음이 튀어나오는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내 놈이 붉어진 얼굴로 날 째려본다.

딜러에 의해 보드가 열리고.

"하오, 하오!"

중국인은 거의 확신에 찬 얼굴로 입꼬리를 스륵 들어올린다.

그도 그럴게 플랍에 열린 카드들은 다이아몬드 A와 스페이드 J, 클로버 3이었다.

현재 중국인의 투페어가 유력한 상황. 그러나 나 역시 숫자 5가 들어가있는 카드가 나오면 스트레이트.

"아직 두 장이나 남았죠?"

좋아하는 중국인에게 웃음을 날려주었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운에 기대는 게임이 아니지, 포커는 실력이야."

중국인의 말에 여기 앉은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실력이라... 당연히 실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 텍사스 홀덤의 최고의 기술은 카운팅도 아니고, 확률계산도 아니고, '배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배짱'으로 무려 수많은 사선을 헤쳐온 할아버지를 이겼고, 미국의 승냥이 때에게도 살아남은 데비 할아버지를 이겼으며,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저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확신한다. 이 게임은 이미 내가 이겨있다고. 재수없게 이죽거리는 중국인을 쳐다보는데 놈의 얼굴이 한장 더 오픈된 카드에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한다.

오픈된 카드는 다이아몬드 7.

"오~ 플러시 드로까지~"

과장된 몸짓으로 설렌다는 걸 보여주니 중국인의 얼굴은 누군가에게 얻어 맞기라도 한 듯이 푸들푸들 떨린다.

"제발! 제발!"

"푸웁."

왜 제 놈이 제발을 왜치는지 모르겠으나, 오픈된 카드는 중국인의 외침을 무시했다. 다이아몬드 10이 깔리며 나의 플러시 승리.

"제기랄, 운빨 게임!"

중국인이 거칠게 칩을 밀어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요? 한 판만에 가세요? 뭣하면 돈 좀 빌려드릴까? 실력 좋으면 금방 복구 하시겠네?"

"감히... 금방 다시 올테니 기다려!"

딜러가 내게 칩을 전달하고, 칩을 정리하며 보았더니 대충 300만 달러에 가까운 돈이었다.

"휘유, 돈 벌기 쉽네. 이쪽으로 나갈까봐요?"

뒤쪽에 앉아 샴페인을 홀짝이던 호석이 피식 웃어버린다.

"방금 나간 놈은 조심하는게 좋을 겁니다."

바로 옆자리의 서양인의 조용한 경고.

"왜요?"

"이쪽 주변을 주름잡는 갱단의 보스거든요."

"오오~ 그렇다는데요?"

호석은 여유롭게 웃으며 샴페인만 홀짝이자 서양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돈 잃고 속 좋은 놈 없는 법인데..."

"나 누군지 알죠?"

그가 피식 웃으며 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SKY의 제품이었다.

"중국 주석이 와도 어쩌지 못할걸요? 걱정하지 마시고, 게임이나 즐깁시다."

"그렇다면야."

작게 말한 것도 아니니, 테이블 내 모두가 나와 서양인의 대화를 들었을 터. 김남정이 드디어 내게 관심을 보이더니, 제법 유창한 영어로 묻는다.

"유명한 사람 입니까? 영화배우라도 되시나?"

나는 그에게 피식 웃으며 한국말로 말했다.

"나? 당신 아부지랑 원수 하는 사람."

< 제 264화.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