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8화. >
막 연회장을 벗어나려는데 의외의 인물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email protected]#"
아쉽게도 러시아 어를 할 줄은 모르기에 파틴의 말을 알아 들을 순 없었다. 해서, 난 중국말로 말했다. 파틴이 중국 통역사를 대동했을 건 불보듯 뻔한 일이니까.
"미안하지만 러시아어를 할 줄은 모릅니다."
통역사에게 말을 들은 파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러시아 특유의 발음의 영어로 묻는다.
"대화좀 나눠 볼까 했습니다."
"오, 영어를 하시는군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불패? 뭐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 놓고 미국을 적이라고 말하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공식석상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지만 사석이니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침 저기 좋은 곳이 있군요, 시가 한대 피겠습니까?"
내 말에 파틴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곧 그의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호석에게 다가왔다.
"*!#$((!#@$"
파틴이 인상을 찌푸리고 뭐라고 하자 그들이 뒤로 물러난다. 아마도 몸 수색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
"무기는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내말에 파틴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우리 러시아의 사내들은 두려움이 없지."
누가 불곰국 아니랄까봐 상남자스러운 대답이다.
호석이 건네는 시가를 파틴에게 내밀자 그는 웃으며 거절했다.
"태우는게 있소."
뒤쪽의 경호원이 내민 시가를 입에 물고는 우리는 각자의 시가에 불을 붙였다.
"SKY그룹이 미국과 부쩍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들었소."
"SKY의 뿌리가 대한민국에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우리 러시아가 과거에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을 지지했어야 했는데 나로서는 아쉬울따름이요."
"운이 좋았다고 얘기해야 합니까?"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고 있는 내 농담에 오히려 파틴의 뒤쪽에 있는 보좌진들과 내 뒤쪽에 있는 PMC대원들이 움찔움찔 놀란다.
"파하하,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긴, 우리랑 친하면 지금처럼 부를 쌓지는 못했을지도 모르겠소."
파틴 역시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자, 그래서 대통령께서 굳이 사업가를 보자고 한 이유를 들어 볼까요?"
"호탕한 성격이 우리 러시아랑 더 잘 맞는것 같은데 아쉽군요. 그저 어떤 인물인가 궁금했습니다."
요사스러운 파틴의 눈.
마치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짓을 알고있다.'하고 어느 영화의 제목과 같은 눈빛이었다.
"죽일놈인가 살릴놈인가 궁금했습니까?"
다시 한 번 내 말에 뒤쪽에 있던 파틴의 보좌진이 움찔거린다. 곳곳에서 당장이라도 권총을 뽑을 것 같은 얼굴들이 보인다.
내 뒤쪽에 우리 대원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대원들의 머릿속에는 바쁘게 저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작전이 세워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크크큭, 부정하지 않겠소."
파틴이 순순히 인정했다.
"근데 여러가지로 정보를 수집한 결과, 나와 같은 적을 두고 있다 싶었소."
"내가요?"
"그대도 결국은 미국을 삼키고 싶은게 아니오?"
"오우야, 대통령께서는 미국을 삼키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희번득하게 눈을 빛내는 파틴.
지금도 러시아의 대통령인데, 전삶에서도 내가 죽을때 까지 파틴은 러시아의 대통령이었다.
제법 많은 사고를 치기도 하는 대통령이었지만 어쨌든 러시아라는 커다란 함선의 키는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쥐고 있다는 뜻.
"해서 살려둘 생각인가 봅니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다 들었으니까요, 그것도 여기 중국의 말이던가?"
피식 웃고는 연기를 내뱉었다.
"헌데 잘못 생각 하시는 게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겨우 미국쯤에 만족할 생각이 없거든요."
"크하하하하, 이 사람 정말이지..."
파틴이 크게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우리 땅에도 당신같은 인물이 나왔어야 하는데 아쉽군."
"에이, 천재가 어디 쉽게 볼 수 있나요."
"크크큭, 내 앞에서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사람이 얼마만인지 모를 정도로 새롭군요."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하실 말씀은 다 하셨습니까? 내가 좀 바빠서 말이죠."
"아, 또 어디 돈이라도 벌러 가실 모양입니다. 아니면 또 누굴 납치하시러 가셔야 하나? 빈 라덴과 후진다오에게 그랬던 것 처럼?"
막 돌리던 발걸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파틴이 마치 '모든것을 알고 있다'하는 눈으로 다시 날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뭣하면 대통령도 납치 해 드릴까요?"
"크크큭, 거절하겠습니다."
"알 카에다에 빨대를 꽂아 놓으셨나요? 빈 라덴을 알고 계시군요."
"아프간은 오랫동안 약을 치던 곳인데, 웬 놈들이 그곳을 홀라당 먹으려고 하니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래서 감시를 붙여 놓으셨다?"
"예측일 뿐이었는데 맞았나 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다시 몸을 돌렸다.
파틴이 알고 있다면 미국의 정보부들도 어쩌면 알고 있을지 몰랐다. 호석 역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나 궁금한게 있소."
뒤통수에 들리는 파틴의 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보았다.
"뭡니까."
"중국땅에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것이오?"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업가가 남에 땅에서 뭐 하겠습니까? 돈 벌지."
"돈이라..."
"궁금하시면 그 좋은 정보원들 굴려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거 내가 실수를 한 것 같군, 그대의 경계심이 부쩍 오르겠습니다."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발전할 계기가 된 것 같아서."
"미국 놈들은 모를겁니다. 우리도 운이 좋았거든."
"글쎄요? 러시아가 알았다면 미국이 아는 것도 시간문제 일 것 같은데?"
파틴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생각하기에 따라 오해할 소지가 있는 발언이군."
"러시아가 미국에 사람을 심은 것 처럼, 미국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나도 한 방 먹었으니 돌려줬을 뿐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미친듯한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은 모양.
"그 입 때문에 오래 살기는 글렀군."
"욕을 하도 먹는 편이라, 오래 살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귀가 간지러운게, 혹시 대통령님이 속으로 욕을 하고 계시나요?"
"파하하하하하."
파틴이 웃으면서 손을 휘젓는다.
그대로 뒤 돌아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차량에 오르자 마자 호석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뭐가요?"
"정보가 흐른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밝혀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기에 잠시 당황했을 뿐이에요."
"보안에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죠, 파틴이 제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운이 좋았다고."
"중국 땅에서의 일이라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파악하기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호석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파틴은 아프간에서부터 라고 얘기했지만 아마도 내가 빈 라덴을 움직여 중국내에서 테러를 일으켰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걸 알았다면 오늘 '경고'의 의미가 아닌 '협박'을 했을 것이다.
미국의 부를 늘려주는 방향이 아니라, 제 놈들의 부를 늘려주는 방향으로 날 컨트롤 하려 했을 터.
그게 아니었단 것은 러시아 역시 완벽하고 디테일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뜻.
"예정대로 진행하려던 일정 살짝 비틀죠, 약속장소 바꾸고 해당 약속장소부터 철저하게."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두 시간 소요될 예정이니 편하게 쉬고 계십시오."
"그러죠."
***
달그락.
온더락 잔에 위스키를 마시면서 한참을 중국 수도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석이 말한 2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점.
"음?"
창 밖을 바라보는데 검은색 인영이 창문 가득 날 바라보고 있었다.
"등장 참."
피식 웃으며 끝 쪽 창문을 열어주었다.
내부로 들어온 복면인.
"문 놔두고 굳이 이 높은데를 올라 왔어요? 그게 더 눈에 띄겠네."
"위에서 내려 왔습니다."
대답과 함께 복면을 벗은 인물은 이제는 완벽한 내 사람이 된 이재형이었다.
"그거나 그거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북한 생활은 할 만 합니까?"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다행이고."
"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몇 없어서 움직이기는 편합니다."
"북한 사투리는 적응 됐습니까?"
"내레 인제 완벽하게 적응이 되아서 누가 봐도 남조선의 색깔은 없이야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일만 끝나면 이제 내근직으로 돌려 드릴게,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예, 회장님."
이재형, 아니 현재는 리재형이라는 신분으로 김일정의 친위대 내부 비밀경호를 맡고 있는 그.
모든게 지난번 김일정이 대한민국을 방문했을 때 이뤄졌던 일이었다. 아주 비밀스럽고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복수할 방법을 찾던 나는 대원 둘을 김일정의 최측근으로 투입시켰다.
친위대 내부 비밀경호 인력들의 얼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는 김일정의 실수라 할 수 있었다.
본래 김일정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경호하던 현해철이 숙청을 당한 시점,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물론, PMC 정보부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
"얼굴이 알려졌다고요?"
"그날이후, 리인구 호위총국장이 친위대 비밀경호단의 인상착의를 파악하고 과거를 조사했습니다."
"위험했겠군요."
"애초부터 존재가 없던 인물들이라 저와 다른 대원 역시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겁이 많아서 어떻게든 암살당하지 않으려던 제 술수에 제 놈이 넘어간 꼴이군요."
"예, 다만. 그일 때문에 현재는 다른 비밀경호단이 조직되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경호에 빈틈이 생겼고, 아무도 모르게 돼지놈의 몸에 구멍이 두개나 뚫린 상황, 비밀경호를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었다.
주섬주섬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본의 아니게 북한 신분증이 생겼습니다."
처음보는 양식의 신분증에 호기심이 동했다.
"오, 제법 그럴싸 하네요."
쩝, 하고는 입맛을 다시는 이재형.
"동생분은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앞으로 우리와 직통 핫 라인을 개설 할 테니, 보안에 주의 하세요."
"예, 회장님. 그 부분은 정대표님과 대화 나누겠습니다."
시계를 슬쩍 보며 물었다.
"허락된 시간이 많지는 않죠?"
"예, 앞으로 40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럼 얼른 두분 대화 나누세요."
호석과 이재형이 빠르게 이러쿵 저러쿵 앞으로 해야 할 직통라인 개설에 열을 올리는 사이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홀짝였다.
며칠 남지 않은 대한민국의 대선.
그때부터가 시작이 될 터였다.
마치 지금처럼 세상은 아무것도 모르고 흘러가겠지만 내겐 저 모습이 마치 폭풍전야처럼 보였다.
이제는 의도하지 않게 러시아까지 나를 인식하고 경계하는 상황이 되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모가지가 날아갈 터.
이제는 정말 과거의 지식따위는 쓸모가 없어졌다.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회장님."
이재형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시 복면을 쓴 이재형.
"예."
"최종 임무 목표가 무엇입니까?"
"돼지 멱을 따야죠."
"역시..."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적당한 꼭두각시를 세워 봅시다."
"통일 입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낭만을 바랄리가 있겠는가.
"지배입니다."
"아."
잠시 제자리에 굳어 있는 이재형.
그러나 이내 요사스럽게 빛나는 눈을 하고는 말했다.
"기대됩니다. 지금의 북한은 정말이지..."
"어떤 세상이던 북한 보다는 나은 세상일겁니다."
"예, 회장님."
< 제 25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