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7화. >
대통령에 욕심이 없다 말씀하시던 장인어른이 욕심을 보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미국의 대통령이 든든한 우군이라면, 내 계획에 조금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테니까.
"아빠!"
"빠빠!"
제법 좋은 발음을 뱉는 별이와 아직은 조금 모자라지만 귀염둥이 태양이.
기분이 나쁠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기분이 좋을 때 보니까 더 좋다.
"으이구 귀염둥이들 아빠 찾았어?"
활짝 웃으며 아이들을 안으려는데 불쑥 베이비시터가 아이들을 안으며 말한다.
"우리 왕자님, 공주님 이제 모래 놀이 하러 갈까요~"
"......"
직업의식이 투철하신 분들이니 자연스럽게 내 자리는 발코니 창가로 굳어졌다.
저벅저벅.
마침 근처로 다가오는 호석.
"숙모 곁에 지키시라니까요?"
"하하, 아직 산달은 멀어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한창 예민하실 시기잖아요."
"벌써 셋째라, 와이프도 저도 익숙합니다."
"어쩐 일이신데요?"
"김일정이 공식일정을 잡았습니다."
"호오."
돼지놈이 겁에 질려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더니, 드디어 바깥으로 나올 마음을 먹은 모양.
최근, 그러니까 정확히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김일정은 공식 일정을 최소화로 소화하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외신들과 미국, 그리고 한국은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기에 이를 정도로 놈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많은 외신들과 한국, 미국은 김일정의 '건강'을 우려했다. 혹시라도 놈이 갑자기 죽어버린다던가 하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놈이 나로 인해 뜨거운 칼날을 어깨에 한 방, 허벅지에 한 방 맞았다는 것은 모른다. 놈 역시 '체면'을 생각해 바깥으로 유출하지 않았기 때문.
그런 놈이 움직인다면 필시 그래야 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일 터.
"무슨 일정인데요?"
"장저민과 파틴과의 공식만남입니다."
"세 독재자의 만남이라."
"위치는 베이징, 일정은 일주일 후 입니다."
"일주일 후면... 사전 투표가 언제라고 하셨죠?"
"10일 뒤 입니다."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될 게 뻔하니까, 움직이는 모양이네요."
"정보부 역시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미국이 참 시끄러운 상황이니, 러시아도 뭔가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현재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지구평화를 위협하는 '악'들을 정립했다. 게 중에는 분명 북한도 포함되어 있었고, 북한과 남한의 관계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일본 등.
아주 복잡한 세계정세가 이어져 있으니 러, 중, 북이 힘을 합치거나 모임을 한다는 게 크게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미국이 제집 앞마당 근처에서 놀고 있으니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테다. 게다가 얼마전 미군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돈과 중국의 돈이 만나 우리 SKY가 알 카에다를 중국땅에서 몰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더욱 신경 쓰였을 터.
이참에 서로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자 모임을 갖는 것일테다. 김일정 그 돼지 놈이 생각보다 좋은 타이밍을 잡았음은 틀림없는 사실.
"오늘 식사자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 상의 할테니 대표님도 준비 하세요."
"예, 회장님."
"베이징에 있는 SKY공장 방문일정 잡으세요, 넉넉하게 돼지놈이 오는 앞, 뒤로."
"코드 원과 접촉을 시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입니다."
"예, 제대로 된 핫라인을 만들어 보자고요."
"예!"
***
대선 마지막 유세를 위해 바빠야 할 할아버지가 굳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셨다.
"마중 안 나오셔도 된다니까요?"
"이 놈아 내가 네 놈 보러 나왔더냐?"
"말을 해도 꼭."
할아버지는 내 투덜거림은 깔끔하게 무시하시고는 휙 하니 날 지나쳐 뒤쪽에 쌍둥이용 유모차를 끌고 있는 루시에게 다가갔다.
"어이구 똥강아지들~"
우희와 루시, 그리고 우희와 루시에게 안긴 내 아들, 딸까지. 모두를 꼭 안으신 할아버지.
"자네 한창 바쁜 시기가 아닌가?"
데비 할아버지의 말에 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네, 굳이 선거 유세를 하지 않아도 확실시 돼 있어."
"어허, 이 사람 선거가 얼마나 변수가 많은데 그런 소릴 하시는가?"
"아무리 바빠도 우리 증손주들 마중도 못나올까? 사랑스러운 루시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이틀은 안 자도 되니 걱정 마."
루시가 베시시 웃으며 할아버지의 팔짱을 낀다.
"역시 젠틀 천, 말씀도 어쩜."
왜 날 째려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돌렸다.
공항 내부까지는 반갑게 가족들의 대화가 오가다. 차량에 오를 때 난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저 차로 가시죠."
막 차량에 오르시려다가 카 시트에 얌전히 앉아있는 태양이와 별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할아버지.
"굳이 그래야 되더냐?"
"바쁘시잖아요? 시간이 또 언제 되신다고."
"크흠."
"집까지 가는 길만 같이 가시죠, 그 다음부터는 일 얘기 없습니다. 저도 어차피 내일부터 중국으로 들어가야 하고요."
확실하냐는 듯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고개를 끄덕이니 못내 아쉬움을 뒤로 하고는 발 걸음을 옮긴다.
탁.
"해 보거라."
방금전 꿀이 뚝뚝 떨어지던 눈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날 바라보시는 할아버지.
"저도 상냥한 할아버지가 좋습니다만."
"헛 소리 그만 하고, 할 얘기나 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호석에게 서류를 건네받아 할아버지에게 전달했다.
"김일정이의 일정이구나?"
"예, 정확한 건 아니고 대충 뽑은 거죠."
"이게 왜?"
"아마도 중국이랑 뭔가 짝짜꿍을 할 것 같으니까 알고 계시라고요."
"흐음..."
"역대 대통령들만 아는 비밀 정보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PMC 정보부의 정보만으로는 김일정이 죽었을 때,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린 할아버지가 물었다.
"이 놈이 이제 할애비를 스파이짓까지 시키려고?"
"에이, 좋은게 좋은 거죠."
"헌데, 내가 당선이 되도 당장은 어렵다는 것을 알겠지? 청와대에 발을 들여 놔야 가능 할 일 아니더냐?"
"예, 급한 건 아니고. 들여 놓으시거나, 당선되는 순간부터 혹시 확인할 수 있다면 확인해달라는 얘기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날카롭게 째려보며 말씀하셨다.
"용건이 그게 끝은 아니겠지?"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는데요."
"굳이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얘기했어도 될 일 아니더냐?"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 보이셔서 골이 났습니다."
"이 놈이!"
"큽."
호석 역시 가까스로 웃음을 참는 모습.
"겨우 5분 짜리로!"
어쩐히 할아버지가 역정내시는 모습이 사뭇 귀엽게만 느껴진다. 백두산 산군 저리가라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시는데 무섭지 않았다.
"그러니까, 좀 손주놈도 대우 좀 해주세요."
"이 놈아 정보는 커녕, 대통령만 되 보거라 아주 1원까지 싹싹 조사해서 세금 징수 할 테니."
"SKY가 너무 깨끗해서 놀라실걸요?"
"사업 하는 놈들 치고 먼지 안 묻은 놈 어디 있더냐."
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네 놈이?"
"피는 좀 묻었는데, 먼지는 전혀 없습니다."
"썩을 놈."
할아버지가 호석의 어깨를 찰싹 내려치며 말했다.
"네 놈도 똑같은 놈이야! 갈수록 우진이 놈을 닮아가서는."
운전을 하던 철웅은 뚫어지게 정면만 바라보았다.
"호석이 네가 철웅이 한 대 때리거라. 나한테 맞는 것 보다 앙숙인 네놈이 때리는게 더 골 나겠지."
"예! 백부님!"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호석이 철웅을 세게 한대 때린다.
"네가 제일 고약하구나."
"하하하."
***
장저민이 흡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협의할 것들은 끝난 것 같으니 우리의 만남을 축하하며 연회장으로 향합시다."
파틴과 김일정 역시 서로의 통역에게 얘기를 듣고는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각자 나라의 말로 얘기했다.
"중국의 연회는 언제나 마음에 들지요."
"하하, 장 동지께서 준비한 연회는 항상 기대가 되디요."
여느 정상회담 회포 자리와 마찬가지고, 정상회담이 열리는 국가의 지도부가 잔뜩 모여 있는 그곳에는 한국에서 했던 연회와는 달리 주변 가득 미인들이 즐비했다.
그 장면 하나로도 민주주의와 그렇지 않은 사상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이는 듯 했다.
각자의 진영으로 떨어져 연회를 즐기다 장저민이 먼저 김일정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쩍 몸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소?"
"걱뎡많은 애미나이들이 지어낸 헛소리디요, 내레 앞으로 삽십년은 까딱 없이야요."
"하하하, 이 장가가 앞으로 30년은 친구를 잃을 일은 없겠습니다?"
김일정이 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후진다오 그자가 꼬리를 말고 도망을 쳤다지요? 쯧쯧 사내가 배포도 작지. 혁명적으로 썩어지면 될 것을 도주라니."
장저민 역시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는 답했다.
"나 역시 30년은 가뿐할 듯 싶습니다."
"오호라, 과연."
김일정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장저민의 주변에 있는 여인들을 훑는다.
"내레 언제 한 번, 장 동지를 우리 공화국으로 초대하갔습네다. 공화국 여인네들도 격렬히 환영할겝니다."
"아아~ 북조선 여인들의 인물이야 익히 들었으니 기대하겠소."
장저민과 김일정이 잔을 부딪히고는 술잔을 비운다.
"우리 중국의 경제인들에게 가봅시다. 김 주석에게 도움 될 일이 많을 테니."
"멍석을 깔아주시니 그리하겠습네다."
장저민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김일정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중국 당과 커미션이 있는 기업인들을 소개시켜주었다.
항상 경제적인 풍요와 거리가 먼 김일정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어떻게 하면 돈을 끌어 올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
그것을 모르는 장저민은 아니나 위협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 했다. 그 만큼 북한이란 나라를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듯 보였다.
"아! 저기 우리 중국으로서도 아주 중요한 기업인이 왔습니다."
장저민의 말에 스륵 고개를 돌린 김일정이 덜컥 멈춰섰다.
"음? 아, 이런 사이가 좋지 못하시오?"
김일정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볼을 떨다 가까스로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레 아는 사람을 만나 잠시 놀랐을 뿐입네다."
장저민은 웃으며 김일정이 불편해하는 인물을 불렀다.
"천가의 우진!"
그는 SKY그룹의 오너 천우진이었다.
웃으며 걸어와 당당히 장저민과 악수를 나누는 그.
"잘 지내셨습니까?"
"못 지낼 이유가 없지요."
걸림돌을 치워준 천우진이 한 없이 좋게만 보이는 모양.
천우진의 시선이 스륵 옮겨와 김일정에게 닿았다.
씨익 입꼬리를 올린 천우진이 손을 내밀며 한국말로 말했다.
"몸은 괜찮습니까?"
마그네슘이라도 부족한 듯 김일정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린다.
"안 좋을 이유가 없디."
"덜 뜨거웠나? 총상이랑 똑같이 하라고 했는데."
"내레 잘 못 들었소?"
천우진이 깜짝 놀라는 듯한 모습을 취하며 말했다.
"예? 아 이런, 혼잣말이 튀어나온 모양이네요, 요즘 부쩍 일이 많아서 자주 깜빡, 깜빡 합니다."
"크음..."
"그럼 연회 잘 즐기시죠, 문 단속은 철저하게 하시고."
천우진과 맞잡은 김일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절로 힘이 들어가는 모양.
천우진은 그 힘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손에 더욱 힘을 준다. 어느새 김일정의 손이 푸르딩딩하게 변하며 피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장내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하, 천 회장이 아직 젊어서 힘이 좋습니다."
장저민이 적절하게 끼어들며 둘 사이를 떼 놓는다.
"아, 이런 실수를 또, 하하하 힘이 주체가 안 되서."
"한창 그럴 때 아니겠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하군요, 일정이 바빠서 얼굴을 뵀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천우진은 빠르게 사라지고 장저민이 힐끗 김일정을 바라보았다.
김일정의 얼굴이 도저히 연회를 즐길 얼굴이 아니다 싶었는지 장저민 역시 적절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썩어지게 만들라."
김일정의 말에 호위총국장 리인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동무레 내 말 못 들었네?"
"그거이... 천우진이 저 아새끼레 장 주석의 비호를 받고 있어 조심스럽습네다."
"리인구."
"예, 최고 사령관 동무."
"요즘 부쩍 안 되는 거이 많구만 기래, 현해철이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라."
"이, 잊디 않갔습네다."
"안 되면 찾고, 그래도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게 동무레 할 일이야."
"썩어지게 뛰갔습네다."
"중국땅이 걱정이믄, 한국 땅은 되지 않갔네?"
꿀꺽 침을 삼키는 리인구.
"시간이 필요합네다."
다시 한 번 눈썹을 꿈틀거리는 김일정.
"공화국 특급전사들이 천혁수 그 치의 일로..."
"찾으라, 방법."
"예!"
< 제 25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