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6화. >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예를 표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받았습니다."
-회장님, 제가 오늘 바로 그곳으로 갈까 하는데,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얼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무척이나 예의바른 모습.
누가 보면 내가 한참 윗 사람 처럼 느껴질만큼 그의 태도는 공손했다.
"에이, 뭘 또 얼굴을 보고 얘기해요? 피차 편한 사이도 아니고."
-... 간청 드립니다.
"오셔가지고 할 얘기들이 뭐 뻔하잖아요? 살려달라, 선대부터 열심히 키워온 그룹이다 어쩌구저쩌구."
내 말이 맞았는지 말문이 막힌 듯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최태수.
-제가 어떻게 하면, 회장님께서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뭘 용서에요? 최 회장님이 잘 못한게 뭐 있다고? 좀 더러운 방법을 쓰시긴 했습니다만, 서로 속고 속이는 자본주의 사회에 당연한 일이죠."
-......
"내가 졌으면 당신은 오체분시 된 SKY를 맛있게 씹고, 뜯었겠죠. 뭐 그런겁니다."
-회장님의 조건 모든 것을 수용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살 길만 열어주십시오.
"전경련 노괴들 공격이 제법 매서운가 봐요?
-단체로 달려든다 해서 KS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결국엔 지켜내고 빚더미에 오르겠죠, 그리고 그 때 회장님께서 등장한다면, 헐 값에 KS를 잃겠죠.
제법 짱구를 돌렸다.
일찍 회장자리에 올라 세상물정 모른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양반이었는데, 그래도 기본은 아는 사람이었다. 이래서 소문은 믿을게 못 되었다.
직접 보고, 듣고, 느낀것을 믿어야 했다.
"통신 빼고 전부."
툭 하니 당연하다는 듯 내 조건을 뱉었다.
-......
"통신이라는 캐시 카우는 남겨 드릴게. 나머진 가져오세요, 적절한 가격에 사 줄테니."
-처음부터 통신을 원하신 게 아니시군요.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SKY가 그걸 원하겠습니까?"
-매각한 지분의 자금을 토대로, 자유롭게 운용해도 되겠습니까?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최태수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전경련 노인네들한테 단단히 화가 나셨나봐요?"
-박쥐같은 놈들이... 예뻐 보일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재계서열 4위에 있는 KS그룹이다.
지배구조 역시 제법 탄탄한 기업. 순수 내수 시장에만 집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막 '글로벌'시장에 발을 딛으려던 찰나 SKY의 올가미에 걸려든 KS.
모르긴 몰라도 제법 유보금과 비자금을 축적하고 있었을 터.
"흠..."
-천혁수 어르신께 제가 직접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건 뭐 알아서 하실 일이고. 그러니까 KS가 다른 전경련 노인네들 공격하는 걸 방관해달라는 얘기 잖아요?"
-부탁드립니다.
짧은 고민.
내가 다 먹을 순 없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부탁도 무시 할 순 없잖은가.
알아서 바치겠다는데 거절 할 필요가 없다.
"언론들도 그렇고 다른 전경련 노인네들도 그렇고, 최 회장님이 알아서 처리 하신다면야."
-성심을 다해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뭐 지켜보죠, 좋은 조건으로 가져와 보세요. 천천히."
-감사합니다. 회장님.
기분좋게 웃으며 전화를 끊자 호석이 물어왔다.
"잘 처리 되셨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이번 일주일의 육아에서 벗어난 휴가를 아주 효과적으로 보낸 것 같았다.
***
하얀 수증기가 가득한 북한 주석궁 내부의 욕실.
여인네들의 시중을 받으며 몸을 씻던 김일정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다 불쑥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라우."
한 마디 말에 여인네들은 대꾸 없이 빠르게 사라지고, 김일정은 첨벙! 큰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물을 내려쳤다.
"개 간나 새끼들..."
어깨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만지작 거린 김일정.
어느새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말을 거칠게 내뱉고 전혀 위축되지 않은 듯 움직이려 했으나 자꾸만 그 날을 생각하면 아랫도리가부터 이상한 느낌이 온 몸을 지배했다.
뜨거운 물에서 한참이나 몸을 불리던 그가 바깥으로 나와 대충 가운을 걸치고는 준비된 음료를 마시며 채널을 돌려 한국의 방송을 확인한다.
뉴스화면 가득 천혁수의 얼굴이 송출되고 마시던 음료컵을 그대로 던져버린다.
"호위총국장 불러오라."
바깥에서 요란한 움직임이 들려오기도 잠시,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와 경례를 올리는 호위총국장 리인구.
"찾으셨읍네까?"
"내레 남에서 올라온디 석달이 다 됐어."
"기렇습네다."
"기린데, 네 놈들은 아직도 별 말이 없구만 기래."
"... 천지 사방을 이잡듯 찾는데, 도통 보이디가 않습네다."
"감히 내 몸에 구멍을 내놓고, 목구멍으로 밥알을 넘기고 있다는거이 나는 참을 수가 없구만 기래."
"면목없습네다!"
"남조선 대통령 자리에, 천혁수 그치가 오른다지?"
"확실시 되고 있습네다."
"앞으로 그치가 수령이 되믄, 우리 입지가 좁아져. 내가 호위총국을 믿을 수 있어야 대국적으로 움직이지 않갔네?"
"......"
퍽.
음료가 들어있던 주전자가 그대로 날아와 호위총국장의 가슴팍을 때렸다.
"동무래 생각이 없네? 썩어지고 싶어?"
"면목 없습네다!"
"날래날래 움직이라. 없으먼은 찾아야디!"
"근래 활동이 없으시니, 중국의 장저민 주석과 만남을 잡으시는 것은 어떻갔습네까?"
"그거이 이거와 무슨 상관이네!"
"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아직도 건재하고! 인민들을 위해서 격렬히 움딕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네다!"
헛소리만 늘어 놓는다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졌던 김일정.
"후진다오 그치가 꽁지를 뺐다지?"
"그렇습네다."
"장저민 주석이 앞으로 십수년은 더 해먹겠구나 야."
"정보총국의 판단도, 최고 사령관 동지와 같습네다."
"보기는 해야겠구나 야."
"약속 잡갔습네다."
"그리하라, 이 몸이 멀쩡한 것도 선전해야디... 천혁수 그치가 수령이 된다는데, 중국과의 관계도 다져 놓디."
"명 받잡습네다!"
***
사람이 참 웃긴게.
함께 하고 있을땐 썩어지게 내 시간이 필요하다 느껴졌는데, 막상 떨어져 있는 시간이 제법 길어지니까 또, 미친듯이 보고 싶어진다.
일주일간 이곳 저곳에서 바쁜 일정을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루시와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딸을 보니 숨 가쁘게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
"으아아아앙!"
"어이구~ 우리 태양이 똥 싸쪄여? 히이이익! 황금 똥 쌌네?"
"으아아아앙!"
"아이구 우리 귀여운 별이 오줌 싸쪄여? 히이이익! 어이구야 내복까지 다 젖었네?"
언제나 처음이란 것은 서툴지만 설레는 마음, 좋은 마음이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으아아앙!"
"그래, 쌌구나."
"으아아앙!"
"너도 같이 쌌구나."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성장했다.
2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베이비시터를 고용했다. 아이는 엄마가 혹은 아빠가 키우는게 아니라 전문가가 키우는게 옳다는게 확실했다.
일단 몸뚱이가 너무 편하다.
그래도 루시는 아직 뭔가 아쉬운지 사사건건 베이비 시터들과 의견을 교류하고 있지만, 덕분에 난 정말 편해진 가족과의 시간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됩니다."
불쑥 튀어나온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슬슬 한국으로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이 이제는 비행기를 타도 안전하다고 느껴질 시기이고, 또 가장 중요한 할아버지의 대선이 코 앞에 있기 때문.
내 소중한 한표를 행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굳이 내가 투표를 하지 않아도 할아버지의 당선은 확실시 되고 있었다.
"벌레들도 교육이 잘 됐죠?"
"예, 회장님. 문제 없습니다."
"좋습니다. 돌아가서 최종 확인 하고, 미국으로 보낼 놈 보내고, 나머지 한 놈은... 고민을 좀 해보죠."
"예."
호석이 업무처리를 위해 잠시 자리를 벗어난 사이, 나는 데비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장인어른과 체스를 두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날 확인하고는 묻는다.
"할 말이 있는게냐?"
"한국으로 가려고요."
막 들어올리던 폰을 다시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날 빤히 바라본다.
"루시와 함께 가겠다는 얘기구나."
"예."
"끝내 아이들을 한국에서 키울 생각이더냐?"
"이제 언어적으로도 중요한 시기가 아닙니까? 한국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지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영어에 익숙한 것이 더 도움 될 것 같다만."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국어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순간이 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데비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는다.
이내 웃음을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본다.
"꼭, 우진이 네가 그렇게 만들겠다 선포하는 것 같구나."
"가능하다면요."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데비 할아버지.
"오냐, 남자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좋아."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같이 가시죠? 긴 휴가라고 생각하시고 한국에서 사계절을 모두 보내고 오시는 건 어떠세요?"
"흐음."
"증손자, 손녀 안 보고 괜찮으시겠어요?"
"바쁘다고 나를 베이비시터로 부리려고?"
"믿음직한 베이비시터는 언제나 환영이죠."
고개를 돌려 장인어른을 바라보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장인.
"난 됐어, 오래 쉬었으니 다시 봉사활동에 나서야지. 아버지의 빈 자리도 채워야 하고."
장인어른의 뒤로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부쩍 열심히 움직여 주십시오."
"어쩐지 우진이 그리 얘기하니 집에만 박혀 있고 싶구만."
"하하하, 왜요? 장인어른이 유명해지면 좋죠?"
"우리 아버지도, 그리고 미스터 천도 자네 때문에 몹시 바쁘시지 않나? 은퇴해야 할 나이에 말이야."
"아버님은 아직 은퇴하시려면 한창이니 그런 말씀 하지 마시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시는 데비 할아버지.
"그래, 우진의 얘기를 잘 따라 보거라, 우리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올지도 모르니."
장인어른이 나와 데비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본다.
"에이, 설마. 아니죠?"
데비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에이, 설마. 아니지?"
이번엔 내게 물어오는 장인어른.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또 육아를 위해서 이만."
"어허, 우진. 바른대로 말 해보게, 우리 아버지랑 무엇을 꾸미고 있는겐가?"
"명망 높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어요?"
"제발 그 일이 정치는 아니길 간절히 바라네."
"원래 세상 일이라는게 자기 뜻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죠."
데비 할아버지가 내 말을 거든다.
"그래 이놈아, 이 애비는 늙어서 글렀지만 네 놈은 아직 젊지 않으냐."
"아오, 그 쓰레기 같은 집단에 들어가라니. 거절 하겠습니다."
"우진이 말하지 않았더냐? 세상 일이라는게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아 글쎄 싫다니까요?"
"길 바닥에 나 안고 싶으면 계속 그리해도 되고."
"여기서 왜 얘기가 그렇게 튀어요?"
"난 아직도 한 푼도 네놈에게 상속하지 않았다. 그것만 알아 둬."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차하면 미국에서 여자 대통령이 나와도 좋겠죠?"
데비 할아버지가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말했다.
"흠, 확실이 이 놈 보다는 우리 록산나가 더 인물이 걸출하지."
어느새 장인어른까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럼요, 제가 또 외조는 끝내주게 하지 않습니까? 전 적극찬성입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대비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말한다.
"아무래도 내 재산을 가져갈 놈은 우진이 네가 맞는 것 같구나, 이 놈은 배포가 글러먹었어."
"하하하, 나중에 태양이한테 주세요. 태양이가 어른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사셔야죠."
"오냐 그러마."
장인어른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그럼 저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버지."
"왜?"
"태양이가 할애비 용돈 챙겨주게 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세뇌시켜 놔야죠."
"에라이, 못난 놈."
"예예, 못난 놈, 욕심 없는 놈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 역시 장인을 따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참을 앞질러 걷던 장인어른이 우뚝 멈춰 서서는 물었다.
"자네."
"예, 아버님."
"진심으로 하는 말이신가?"
장인어른의 눈에 어느새 희열이 보였다.
"어떤 것을요?"
"대통령."
난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도, 한국의 대통령이시죠."
장인어른 역시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그렇지... 어르신도 대통령이지."
< 제 25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