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5화. >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에 호석과 양갈비를 신나게 뜯다보니 숙취로 인해 조금 늦은 오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탁.
침대 머리맡에 척 봐도 시원해보이는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호석.
"수태차에 자연산 꿀을 섞었습니다."
"이 동네도 꿀이 나와요? 황량한데?"
"하하, 자연은 위대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꿀물 비슷한 것이라니 나는 과감히 원샷을 때렸다. 시원하며 끈적하고, 단백질이 느껴지는 맛.
수태차란 몽골에서 기원한 일종의 동물의 젖으로 만든 '차'를 일컫는다.
대충 우유라는 뜻.
"괜찮네요, 적당한 향도 좋고."
"어젯밤 양갈비를 맛있게 구워낸 요리사의 솜씨입니다. 해장으로 최고라기에 가져왔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지개를 켜고는 발코니로 나갔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그들의 얼굴에 '행복'은 보이지 않았다.
"표정들이 안 좋네요."
"심하게 탄압받고 있으니 그런 듯 합니다. 저들의 심정은 일제를 겪은 조상들과 같지 않을까요?"
"그만큼 탄압이 심한가 보죠?"
"회장님 지시에 따라 PMC정보원들을 풀었는데 정말 인권탄압이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독재가 다 그렇죠 뭐."
호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영웅이 될 생각은 하지 말자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가려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그 길은."
"예, 회장님."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만드는 것에 집중합시다. 아직 철옹성도 다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예."
이제와 호석에게 내 사상과 삶의 모토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영원한 동반자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한국 땅에 다시 '독재'가 자리잡을지 몰랐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아닌 우리 '천가'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물론, 국민들이 선택한 '독재'가 될 것이란 전제가 붙어 있다. 결국 우리 할아버지도 선거에서 진다면 대통령 자리를 내놓아야 할테니까 말이다.
"과연 그럴일이 있을까 싶긴 한데."
여튼, 현재는 중국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원대한 계획.
하나씩 차근차근 진행하다 보면 어느순간 가능하리라 확신 할 뿐이다.
"중국 정세는 어때요?"
"후진다오의 야반도주가 대대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노발대발하는 장저민의 모습도 자주 보이고 있죠."
"연기를 잘 하나 보네요."
"민주주의를 표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곧 언론에서도 시끄럽게 보도를 하긴 할 겁니다."
"무늬도 민주주의가 아닌데 무슨."
어쨋든 중국 당내 정세는 내가 예상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장저민의 힘이 막강해 질 겁니다. 후진다오라는 정적을 없애버렸으니까요."
"예, 회장님."
"뽑아 먹을 건 확실하게 뽑아 먹자고요. 중국내 SKY공장들 보안 더 철저하게 하시고, 무슨 뜻인지 아시죠?"
"예."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산업스파이 짓을 하는 놈들이 있을겁니다. 자비를 보이지 마세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는 호석.
여태껏 나는 SKY의 직원들에겐 한 없이 자비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산업스파이는 직원이, 가족이 아닙니다. '적'이죠."
"명심하겠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위구르 족들이 불시에 공안들의 검문을 받는 장면이 눈에 보였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북한이 떠 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북한 쪽 보고는 받기 힘든 모양이죠?"
호석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회장님... 아무래도 그쪽은 현재 매우 예민한 상황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듯 보입니다."
"돼지 새끼... 바짝 쫄아 있겠군요."
"CIA쪽 첩보에 의하면, 김일정은 주석궁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기쁨조를 불러서 사택에서 놀아다던 김일정의 행보와는 매우 다르다고 보입니다."
언제 어떻게 칼 침을 맞았는지 모를테니까 그럴만 했다. 아무리 타국이었다지만 김일정은 '암살'이란 공포에 뇌가 절여졌을테다.
"곧 있으면 한국에서 이산가족 만남 있죠?"
"예, 회장님."
"그 때를 틈타 소문을 퍼트리세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김일정의 두 아들 중, 손속이 아주 잔인한 놈이 있다고 제 아비도 씹어먹을 만큼 욕심이 많아 극악무도 하다고."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요, 너무 유치한 것 같습니까?"
"크흠."
호석은 아니라고 차마 부정하지 못한다.
"공포라는 놈은 머리를 멍청하게 만들죠. 그리고 북한은 이미 '미신'에 머리가 절여진 집단 아닙니까? 인간을 신으로 추앙하는데."
"흐음..."
"김일정의 경계심이 극도로 올라가면, 친위대도 믿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겁니다. 그때 쯤에는 우리 쪽으로 직접적인 보고도 올 수 있겠죠."
"아아!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예."
***
같은시각 서울의 한 호텔 중식당.
대현그룹, GL그룹, KS그룹의 총수들이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의 주체는 역시 KS그룹이었다.
"회장님들... 도와주십시오."
가타부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KS그룹이 SKY의 도마 위에서 맛깔난 요리재료가 되는 순간, 그 소문은 전국 경제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리 없기 때문.
최태수는 최대한 진솔하게, 정상영과 구운혁에게 도움을 청했다.
"천 회장이 뜻을 품었다면... 우리라고 별 다른 수가 있겠는가?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렸어 이 사람아."
구운혁의 말에 정상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역시, 도움을 주긴 어렵겠네. 분명 말하지 않았는가? 감히 그와 적대 하려 하지 말라고."
최태수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해갔다.
밤낮을 지내며 살 길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살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SKY는 한푼도 쓰지 않고 KS를 꿀꺽 집어 삼킬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기회를 주었다 들었네, 그때마다 그것을 발로 차 버린건 자네고."
정상영의 날카로운 혓바닥에 최태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
분명 천혁수가 두 번이나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독재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이대로 SKY가 그대로 성장한다면 우리는 절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정상영도 구운혁도 동시에 고개를 젓는다.
"쯧쯧, 자본주의 세상은 원래 돈 많은 놈이 다 갖는 세상 아니던가? 자네도 그리 살았잖아?"
"가진자가 없는 자를 핍박하고, 가진자가 없는자의 자유를 살 수 있다는 건 자네도 익히 알잖은가?"
"......"
최태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자네도 대답을 못 하겠지. 없는 자가 가진 것이 갖고 싶으면 빼앗고, 헐값을 던져주며 협박해 부를 쌓은게 지금의 대기업들 아니던가 이 말이야."
"나라고 다르겠냐마는, 언젠가 우리보다 대단한 부를 가진 사람이 나타날 것을 모르진 않았지."
"해서 나와 여기 구회장님은, 시류에 몸을 맡기기로 했네. 그저 흘러가는대로, 우리만의 독자적인 운영방식으로 내부부터 탄탄하게."
최태수는 깨달았다.
두 노괴들은 이미 SKY에게 완벽하게 굴복하고 있음을 말이다. 사실 얼마전 역사바로알기재단에 기부했다는 기부금 내역부터 수백억을 호가 하고 있었으니 알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이 돈에 미친 노인네들이 SKY에게 돈을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을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완벽히 포기하셨군요 회장님들."
최태수의 말에도 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한다.
"애초에 덩치가 맞지 않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정상영이 구운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SKY가 KS를 흡수한다니, 더 커지겠습니다."
구운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글쎄요, 워낙 세계 시장에서 노는 회사라, 크게 변화가 있을까 싶긴 합니다."
"다른건 몰라도 통신쪽으로는 확실히 강세겠군요."
"어느 쪽이던 강세가 아닌 쪽이 있었습니까?"
이제 두 노괴에게 최태수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식사자리에는 나왔지만 KS그룹의 총수라는 직함이 사라진다면, 최태수 그는 감히 두 사람을 마주볼 수 없는 존재였다.
"듣기로는 천 회장이 다른 경제인들에게 KS를 바치라고 했다지."
"그러니 이럴 시간에 서둘러서 지분방어라도 해 보시게, 뭐라도 하나 남기고 싶다면.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는가?"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태수.
그런 그를 멈칫 거리게 만드는 정상영과 구운혁의 말.
"참고로 우리 대현 역시, SKY에게 제물로 KS의 지분을 넘길 생각일세."
"GL역시 마찬가지지."
"이 미친 노인네들이!"
최태수가 폭발했으나 둘은 전혀 흔들리거나 창피해하지 않았다.
"스스로 SKY의 개가 되겠다는 얘깁니까! 그 높은 자존심들은 다 어디갔어! 정 회장 당신은 정부에게도 반기를 들던 양반이 도대체 왜!"
정상영과 구운혁이 최태수를 똑바로 발아보고 말했다.
"나도 살아야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일세."
"미친..."
최태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돈 귀신들... 당신들 뭔가 약속받은게 있는 거군."
정상영과 구운혁은 숨길게 없다는 듯 말했다.
"어르신이 그러더군, SKY가 다 먹진 않을 거라고."
"남는게 좀 있지 않겠는가? 우린 그것을 담을 생각이고."
"언제든 SKY의 탐욕은 당신들을 향할 수도 있어, 그때는 어떻게 방어 할 생각이지?"
"방어는 무슨, 별 수 없지."
"그럼 그때가 내가 이승을 떠나는 날이겠지."
완벽한 굴종.
대한민국 현 최대의 그룹사라 할 수 있는 두 그룹사의 총수들은 이미 SKY의 개가 되어 있었다.
피식 웃어버린 최태수.
"애초부터... 독재가 시작되어 있었군."
"삼현이 끝났을 때. 이미 대한민국은 SKY의 손에 좌지우지 되고 있었네."
"삼현과 다우를 합쳤어. 그러고도 자금난은 커녕 압도적인 자본을 보유하고 있었지. 우리가 감히 그의 상대가 되리라 생각 했는가?"
"세계 최고의 은행 역시, 그의 손에 있지."
"애초에 금력으로 비빈다는 것이 멍청한 일이야."
입술을 달싹이지만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는 최태수.
"살고 싶거든 방법은 하날세."
"스스로 KS를 천회장에게 넘겨, 그럼 최소한 밥은 빌어 먹고 살 수 있겠지."
***
오랜만에 보는 투명한 아크릴 관.
예전에 빈 라덴이 저 안에서 참 즐겁게 놀았던 때가 떠오른다.
덜덜덜 몸을 떨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
"왜 이렇게 긴장했어? 오늘은 네 차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빈 라덴의 공포에 절은 두 눈동자가 날 바라보며 정말이냐는 질문을 담는다.
"못 믿어?"
"미, 믿습니다!"
곧 멀리서 검은색 천에 얼굴이 가려진 후진다오가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나타났다.
이내 대원들이 놈의 얼굴을 가리던 천을 걷어 내고, 빠르게 주위를 살피는 후진다오.
"주, 주군!"
"테스트 시작하자고."
"어, 어떤 테스트이던 반드시 이겨내겠습니다!"
"글쎄, 그건 두고 보자고."
대원들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내니 능숙하게 아크릴 관의 뚜껑을 열고는 후진다오의 양손과 양발을 묶고는 관 뚜껑을 닫아 버린다.
세차게 떨리는 두 눈으로 날 똑똑히 바라보는 후진다오.
"이런 땡볕, 반드시 견뎌 내겠습니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그래, 아주 기대가 커. 정 대표님 저기 전갈이 500마리 들어 있다고 하셨나요?"
호석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짧은 중국어로 말했다.
"천마리입니다."
"들었지? 전갈이 천마리 들어있데."
몹시 놀란 얼굴이 된 후진다오.
스멀스멀 모래가 꿈틀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이더니, 이내 모습을 드러내는 손가락만한 작은 전갈들.
"으아아아아악!"
후진다오의 거친 비명과 함께 온몸을 떠는 오사마 빈 라덴.
"잊어라, 모든걸 잊어."
빈라덴은 40도가 훌쩍 넘는 사막의 햇살 아래 마치, 시베리아 한 복판에서 추위에 떨 듯,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회장님, 전화가 왔습니다."
대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둔지 쪽으로 걸려온건가요?"
"예."
"누구죠?"
"KS그룹 최태수 회장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놈이 내게 전화 할 일이 있을까 싶기에.
"우선 가보죠."
< 제 25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