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0화. >
연회장을 벗어난 할아버지는 바로 호텔 연회장 앞 모여 있는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북아일보, 그리고 고조선일보의 보도가 거짓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나는 그런적이 없다고 계속해서 외치고, 주장했으나! 세상은 이 천혁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말이 기자회견이지 거의 연설과 선동에 가까웠다.
"거짓으로 기사를 쓰고, 모 기업인들과 결탁해 정치적 성향이 맞지 않는 후보자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썩은 언론들! 언론을 '돈'으로 통제하며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썩어빠진 경제인들! 이 천혁수가 대통령이 된다면! 감히 국민여러분의 눈을 어지럽히는 언론들을 싹 뿌리 뽑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자들.
그들은 천혁수가 당선된다면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절로 고조선일보의 기자들과 동북아일보의 기자들을 날카롭게 쏘아볼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두 언론사의 기자들은 거북이가 목을 숨기는 웅크렸다.
"인간 천혁수가 대통령이 되는게 얼마나 두려우면! 거대 언론사들과 경제인들이 결탁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경제인들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들은 어째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바로 이 천혁수가! 대한민국의 썩어빠진 대들보를 뽑고, 기둥을 뽑아! 새로운 대한민국, 더 나아진 대한민국을 만들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플래시가 터지고 있는 카메라들을 쓰윽 둘러본 할아버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이 천혁수! 대한민국의 최전방에 서서! 선봉에 서서!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행정으로 썩어빠진 적폐를 때려 부수고! 쓰레기 같은 언론을 탄압하고! 부패한 공직자들을 쳐 내, 그 어떤 대한민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 공정한 나라! 청렴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기자들 사이를 벗어나는 할아버지.
나 역시 슬그머니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이야, 할아버지 진짜 정치인 같네요."
"이 놈아 네놈이 이리 만들지 않았더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시다니."
"크흠."
민망해하는 할아버지를 더 골려드릴까 하다가 이내 본론을 꺼냈다.
"고조선일보, 동북아일보 그냥 놔두시려고요?"
"처리해야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현재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 '악'이었다.
"아마 오늘 할아버지 연설 때문에, 더 발악할겁니다.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 싶겠죠."
"반대는 아니고?"
"에이, 그렇게 눈치빠른 놈들 아닙니다. 여태까지 하던 방식이 계속 먹힐거라고 생각하는 놈들인데요."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그것 말이구나."
"그렇죠? 제 놈들 뜻대로 기사를 요리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바뀔리 있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할아버지, 이번엔 반대로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해서, 네 놈은 전경련을 어찌 할 셈이냐."
"우선 좀 지켜보죠, 아까 보니까 열심히 기부금도 내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네 놈이 자비를 베푼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절대자란 때론 자비로워야 하는 법이죠."
"천가에 자비는 없다더니?"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복수 중 하나가 아닐까요? 하루하루 할아버지의 지지율 상승을 보며 얼마나 속 끓이고 있겠습니까?"
할아버지가 피식 웃는다.
"다른 목적도 있는 것 같다만."
"미국에 다녀오려고요."
"우리 똥강아지들 보러 가느냐."
언제 태양이와 별이가 똥강아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이제 옹알이 할 때가 되었다는데 붙어 있어야죠? 엄마 다음은 아빠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들어오느냐?"
"적당한 시기에, 루시에게 말 할까 합니다. 한국으로 가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내가 힘을 보태마."
"힘이요?"
"데비에게 소원 하나가 남았거든."
"호오? 확실히, 데비 할아버지가 도와주신다면 설득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루시는 한국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내 증손주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지."
흠칫 놀랐다.
점점 할아버지가 정말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대통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이, 아직 당선 되신 것 아닌데, 김칫국 사발드링킹은 그만 하시죠."
"푸핫, 오냐 알겠느니라."
"당분간은 미국이랑 중국 스케쥴이 주니까, 한국에는 최소 석달 이상은 비우지 싶어요."
"대선은 걱정 말거라, 이미 끝났지 싶으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선거까지 넉 달이나 남았습니다. 방심 하지 마시죠?"
"석 달이던, 넉 달이던. 질래야 질 수가 없지 않으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선거 막바지에는 철수가 움직일 겁니다."
"호오, 그 아이가 벌써 그럴 힘이 생겼어?"
"이제 '인터넷'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세상이 알아야 하니까요?"
"기대하마."
"옙."
***
게이트가 열리자 눈물이 흐를 뻔 했다.
막상 보기 전까지는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는데, 어째서 지금 순간이 감동적인지 모르겠다.
겨우 한 달.
그러나 마치 한 10년은 떨어져 있었던 것 처럼, 그리움이 충족되며 느껴지는 이 감정은 참 특별했다. 전삶에서는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 종류의 감정이니까.
"잘 있었어?"
루시 역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존재들.
루시와 함께 아이들을 꼬옥 안아 주었다.
"허니, 나 힘들어 팔 아파."
"어이쿠! 우리 마누라 팔 아프면 안 되지."
얼른 태양이와 별이를 양 손으로 안았다.
한달 전 보다 제법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
"잘 자라고 있었나 본데? 제법 무거워."
"그렇지? 하루가 다르게 크더라, 신기해."
"루시가 고생이 많았어."
""으아아앙!""
태양이와 별이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
나는 최대한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우쭈쭈를 해 보았으나 먹히지 않았다.
"우진 품이 오랜만이라 어색한가 보다."
루시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꽃히는 것 같았다.
"......"
결국 아이들은 다시 루시의 품으로 옮겨지고, 난 아쉬움에 입맛을 달랬다.
"며칠 아빠 노릇 열심히하면 태양이랑 별이도 인정해줄거야 허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
"어... 그래야지."
"가실까요?"
"옙, 마님."
차량에 올라서 루시와 손을 꼭 잡고 있지만, 베이비 시트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마침 루시가 내 손을 풀고는 시트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요즘 자꾸 졸려."
"그래?"
"응, 호르몬 불균형 때문인가 봐."
"아직 산후조리 더 해야지, 푹 쉬어 푹. 아이들은 내가 보고 있을게."
"알겠어."
루시가 눈을 감는 걸 확인하고는 나는 별이와 태양이의 볼을 콕 찌르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으아아아앙!""
"......"
"허니, 겨우 5초만에 애들 울리기야?"
"어... 미안."
***
나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우리 천가의 핏줄 때문인지. 자식놈들 우는 소리가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덕분에 40분동안 달리는 차 안에서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이 없었다.
루시의 손이 닿으면 뚝 울음을 멈추고, 내 손이 닿으면 울기를 반복했다. 결국 루시가 내 양손을 자신의 가슴팍 안으로 넣어서는 봉인하고 나서야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덕분에 난 뾰로통했다.
나도 모르게.
아빠가 되어서는 자식에게 삐쳐버린 아이러니한 상황.
"어머, 우진 한국에서 너무 바빴나보다. 얼굴이 반쪽이 되었는 걸?"
"아... 음..."
루시가 픽 웃으며 장모님께 말했다.
"애들 못만지게 했다고 저래."
"음? 왜 애들 아빠한테 그랬어?"
"우진 손만 닿으면 애들이 자꾸 우네."
"어머."
장모님이 내 두손을 잡아주시며 말씀하신다.
"아직 아이들이 우진이 어색해서 그래, 조금만 더 노력하면 금방 친해질 수 있을거야,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캐치하니까."
"예, 그래야죠..."
나를 위해 준비된 만찬장에서도 태양이와 별이는 내게 '울음'으로 보답을 해주었다. 밥이 콧구녕으로 넘어가는지 목구녕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나는 정말 정신 없이 움직여야 했다.
반사적으로 아이들에게 손이 가는데 루시가 자꾸만 내손을 떨쳐내니 기분이 묘했다.
""으아아앙!""
"흐음, 자네때문에 자꾸만 애들이 울지 않나?"
"어, 음... 아... 죄송합니다."
식사자리에서 끝내 장인어른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나마 장모님 록산나 여사께서 장인어른의 등짝을 후리며 '아이들이랑 친해지게 놔 둬요.'하는 응원이 없었다면 눈물을 떨굴뻔 하였다.
""으아아앙!""
아이들과 함께 놀고자 했을 뿐인데, 카펫 위에서 난리를 치며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덕분에 체스를 두고 계시던 장인어른과 대비 할아버지가 내게 시선을 옮긴다.
"흠... 이놈아 급하구나, 천천히 다가가거라. 쯧, 도무지 다음 수에 집중 할 수가 없군, 자리를 옮기던가 해야지."
체스에 져서 짜증이 나신 것 아니냐고 말 하고 싶었으나, 결국 아이들을 울린건 나이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들은 결국 루시가 오고 나서야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그, 어... 미안."
이제는 루시의 눈빛만 봐도 서운했으나, 육아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지난 며칠간의 일로 알게 되었으니 그저 죄인일 뿐이었다.
그날 밤.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호석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했다.
"회장님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어우, 삼촌 편하게 하시죠. 우리 둘다 휴가인데."
호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묻는다.
"뭐가 문제야?"
"애들이 나만 보면 울던데요."
"큽, 남자들에게 아이란 매우 어려운 존재지. 사랑스럽지만 쉽게 다다가기 어려운 그런."
격하게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주 보고, 자주 느끼게 해주는게 최고의 방법이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란 얘기지."
역시 육아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호석 삼촌의 얘기는 신뢰가 되었다. 사실 루시도, 장모님도, 장인어른도, 데비 할아버지 역시 같은 조언을 했지만, 호석 삼촌의 입에서는 내 현재의 심정까지 공감해주는 듯 해 더욱 신뢰가 되는 것일 터.
"일주일 째 진척이 없네요."
"조금만 더 고생해 봐. 이제 점점 아이들에게 우진이 네가 익숙해질 시기가 되었어."
"그럼 다행이고요."
호석 삼촌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문득 태양이와 별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을 시간, 나는 조심히 나와 루시의 침실 옆방의 문을 열었다.
살금살금 아이들에게 다가가 새근새근 이세상 어떤 광경보다 평화롭고 절로 힐링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사랑스러운 내 새끼들."
콱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너무나 사랑스러운 광경.
뽀뽀를 참을 수 없었다.
쪽, 쪽.
""으아아아앙!""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인 모양.
뽀뽀를 하고 나서야 내가 실수했음을 격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허니!"
"우진!"
루시와 장모님 록산나 여사가 도끼눈을 뜨고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재웠는데 왜!"
"에휴, 또 한 시간은 그냥 날아가겠어."
"... 죄송합니다."
"나가 있어!"
"어... 응... 미안."
"문 닫고 나가!"
"으응."
아이들 방의 문을 닫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에휴... 육아 더럽게 어렵네."
정말 현 삶과 전 삶을 통틀어, 최고의 난이도라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었다.
침실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다시 저택 내부의 바에 도착했다.
"음? 왜 안 주무시고요?"
호석 삼촌이 바에 남아 계셨다.
"그러는 너는?"
"에휴, 구박데기도 아니고..."
"왜? 뭐 했는데?"
호석 삼촌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니, 크게 웃는다.
"크크큭, 아이와 와이프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뭔데요?"
"잠들어 있을때가 가장 사랑스럽다는 거."
"큽."
웃프지만 공감되는 얘기였다.
"어쨋거나, 서러워서 못 살겠네요."
"힘내, 다 한순간 아니겠니."
"옙."
삼촌이 따라준 위스키를 마시고는, 곁에서 시가에 불을 붙였다.
"빈 라덴 추적 되고 있죠?"
갑작스러운 업무 질문이지만 호석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예 회장님, 처음 보고드렸던 4주 안에는 파악 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서둘러 주세요."
"예, 회장님."
"나도 스트레스가 제법이라."
"큽. 예."
***
한 달이 지나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루시를 비롯한 모든 어른들께 구박을 받으면서도 끊임 없이 도전 했더니, 드디어 태양이와 별이가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구구, 아빠가 주니까 더 맛이쪄여?"
내 새끼들이 드디어 내가 주는 과일즙을 맛있게도 먹는다.
""까르륵.""
이제는 볼을 콕콕 찔러도 장난인 줄 알고는 그 조막만한 손을 휘둘러 제법 방어를 하겠다고 나선다.
"파아!"
나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지금 태양이가 내게 '아빠!'하고 부른 것 같았다.
"프아프아!"
별이 역시 '파파'하고 나를 불렀다.
틀림없이 들었다.
"루시, 들었어? 응? 응? 들었냐고!"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던 루시가 부스스 일어난다.
"응? 뭘?"
"방금 태양이랑 별이가 나한테 아빠라고 했다니까?"
루시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에이, 옹알이인데 잘 못 들었겠지."
"아니야! 틀림없이 아빠라고 했다니까? 루시는 아직 엄마 소리 못 들어 봤지? 난 아빠 소리를 들었다고 아.빠!"
"파아!"
"프아프아!"
다시 한 번 터져나온 태양이와 별이의 옹알이.
"봐봐, 아빠라고 하잖아!"
루시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어휴, 내새끼들~!"
나는 아이들을 품에 꼭 안으며 볼을 마구 비볐다.
"파아!"
"프아프아!"
다시 들려오는 아빠 소리.
"허니, 그거 착각이야."
난 격하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한달이라는 고생끝에 낙이 오는 것 같았다.
두눈 가득 습기가 고였다.
"하, 이게 행복일까 루시?"
"아니... 그..."
"됐어, 너무 부러워하지 않아도 돼. 곧 아이들이 마마도 해 줄거야."
"그, 그래."
나는 다시 격하게 부비부비를 해버렸다.
""으아아앙!""
아이들은 다시 울음을 터트리지만, 어쩐지 난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똑똑똑.
아이들 울음 사이로 들리는 노크소리.
나는 자연스럽게 노크소리를 핑계삼아 아이들을 루시에게 안겨주고는 문을 열었다.
"음? 네, 대표님."
"회장님. 빈 라덴 위치 나왔습니다."
"이야, 오늘 날인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예?"
< 제 25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