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9화. >
오후 3시가 살짝 넘어가는 시각.
"오셨어요 어르신~"
아산댁 아주머니가 반갑게 할아버지를 맞이한다.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난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할아버지는 곧장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 놈아, 간 밤에 무슨 짓거리를 했기에 북한의 돼지놈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가느냐."
"도망을 갔어요?"
"그래. 아침 댓바람부터 모든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 통보하고는 설득에도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넘어가더구나."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할아버지 손자가 얼마나 효자입니까 예? 그대로 갚아줬죠."
고개를 돌려 철웅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네 놈도 알고 있었더냐?"
철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회장님의 단독 지시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모른다는 말을 어렵게도 한다."
다시 내게 시선을 옮긴 할아버지.
"읊어 봐."
"다리에 한 방, 어깨에 한 방."
"총?"
"불에 달군 칼."
"하! 그래서 돼지놈이 쩔둑이며 걷는다는 보고가 올라왔구나."
"이 손자 덕분에 오후 일정은 널널하게 집에서 휴식도 취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피식 웃으며 아쉽다는 듯 말하는 할아버지.
"이 놈아, 그 놈 골려줄 생각에 신났다가 김 샜다."
뭔가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김일정이 달아났으니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을 터.
"그래도 제대로 쫄았을 겁니다."
"김일정이가 겁을 먹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 했거든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철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이게 가능한 얘기더냐?"
철웅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호석이 할아버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위장침입한 대원들이 적당한 타이밍에 김일정에게 수면유도제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단잠에 빠졌을때,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가 유리를 뜯어낸 뒤, 침입 해 조금 더 강한 수면제를 주사하고 토치로 달군 대검으로 어깨와 허벅지. 정확히 백부님이 당한 위치에 칼침을 놓았습니다."
"불에 달군 대검이니 총상과 비슷한 느낌이겠구나."
"예, 내부 화상이라 고통이 오래 남을 것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할아버지.
"헌데, 뜯어낸 유리는 어찌하고?"
"김일정의 피로 흥건한 시트와 이불등은 사전에 준비한 새것으로 교채하고, 말끔하게 상처를 봉합한 뒤, 유리 역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재설치 후, 다시 로프를 타고 옥상을 통해 나왔습니다."
아직도 의문이 많은 표정의 할아버지.
"김일정이의 경호가 그리 허술하다라... 신빙성이 없는데?"
뭔가가 더 없냐는 물음이었다.
"아직도 김일정은 '사과한다'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죠."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에게 설명을 이었다.
"유감이라는 성명은 발표했습니다만, 사과의 의미로 보기 어려우니,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존심은 챙기면서 대한민국에게는 사과의 뜻을 담은 행동."
"그러니까, 사과를 하기 위해 굳이 서울 깊숙한 곳 까지 들어왔다?"
"예, 그 점을 파고 들었을 뿐이고요."
"사전에 심어둔 대원들로?"
난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이놈, 그게 다가 아니구나."
"정답."
"무엇이냐, 더 얘기 할 것이."
"과연 옥상에는 북한군이 없었을까요?"
한참을 생각에 잠긴 듯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하고 절레절레 흔들기도 하신다.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풀어 말해 보거라."
"에이, 또 왜 이러실까? 재미 없게."
"어허, 이놈이 또 의뭉을 떨어?"
힐끗 호석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석이 준비되어 있던 서류를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샤락, 샤락.
서류를 확인하는 할아버지.
"흠, 돼지놈의 호위군은 서로 얼굴을 잘 모른다?"
"친위대 놈들은 알겠지만, 이하 특수훈련받은 그림자 놈들은 얼굴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겁 많은 돼지 놈이 혹시 모를 동선 노출에 신경을 쓰는 모양이구나, 아니면 호위군 주변에 달라붙을 날파리들을 경계하거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놈... 도대체가."
할아버지가 잠시 말을 잊고는 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너무 위험하고 무모했어."
"완벽하게 설계 된 계획이었습니다."
"쯧... 사람이란 실수를 하기에 사람이다. 항상 그 것을 명심하거라."
할아버지의 노파심을 모를 수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하고는 대답했다.
"김일정이 그 놈이 조금더 미친놈이었거나, 욕심이 덜한 놈이었다면 전쟁이 났어도 이상할 일 없는 일이다."
난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그 놈이 제 놈의 전부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쯧..."
할아버지 역시 김일정이 가진 바 절대권력과 누리고 있는 권세를 포기할 일 없다는 것을 아시는 모양.
"뭐, 알아서 할테니 이쯤 하고."
할아버지가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미 보고를 받았기에 초대장이 대충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반응들은 어때요?"
"놈들?"
"예, 전경련 전귀들 만나고 오신 것 아닙니까?"
피식 비웃음을 흘린 할아버지.
"내가 놈들을 전부 상대 할 성 싶으냐? 머리에 앉은 최가 놈만 상대하고 왔느니라."
"아하. 정가 놈과 구 회장도 올 게다."
대현그룹 정 회장과 GL그룹 구 회장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한국 100대 기업은 다 온다고 봐야겠네요?"
"불참하는 놈들도 있겠지."
"참석하는게 살 길인지도 모르고요?"
"그래."
"과연, 내일 스크린에 상영될 이벤트가 뭔지 궁금한데요?"
"놈들을 흔들기에는 충분한 무기가 될 게다."
"알겠습니다. 저도 당연히 참석해야죠. 할아버지 행사인데."
"그래."
고개를 끄덕이시던 할아버지가 다시 한 번 나를 빤히 바라보며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 가놈에게도, 구 회장에게도 제법 많은 덩어리를 양보 하거라."
"에헤이, 또 그 얘기 하시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깜냥이 된다면 얼마든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경쟁이 없으면 발전도 없는 법이야, 그게 자본주의 시장의 기본 중에 기본이지."
취지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가 전경련 전귀들 살려둔 이유도 그것입니다만."
실제로 어지간한 100대기업을 다 씹어먹어도 흔들리지 않을 자금력이 현재의 SKY에게는 존재했다.
글로벌 기업과 한국 내수시장에서 제법 떵떵거리는 기업의 차이가 이런 것이었다.
물론 100대기업 대부분 해외시장 역시 제법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전 세계 전자 시장 1위 점유율의 SKY와는 비교자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은 세상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쇼셜'이라는 사업 역시, 현 SKY를 따라올 수 있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대부분의 주요 서비스들이 '무료'이기에 더욱더 가파르게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는 추세.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부를 축적하고 현금을 끌어 올 수 있었으며, 커져가는 반도체 시장의 주요 소재와 파인드리 공정을 완벽하게 갖춘 SKY의 철옹성은 더욱 더 두터워지고 있는 과정이었다.
"후우, 건드리는 놈들을 용서할 자비가 네게는 없지 않으냐?"
"그릇이 큰걸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많이 양보하거라."
대충 할아버지 뜻은 알았으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놈들이 하는 걸 봐서 결정할 계획이다.
***
불과 며칠전에도 대형 연회가 열렸던 SKY 호텔의 연회장에서 이번에는 북한과 미국의 인사들이 아닌, 오로지 한국의 인사들로만 채워진 연회가 시작되었다.
며칠전과 다른게 있다면 세팅되어 나오는 술과 안주용 음식들이 차원이 다르다는 것.
검소한 것을 보여주기 좋아하는 정치인들과 다르게 이곳에서는 '검소'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기에 최고급 요리들과 술이 즐비했다.
"좋~단다."
흡연실에서 토해낸 혼잣말에 호석이 사례에 들린 듯 쿨럭인다.
전귀들의 가면들을 보자니 역겨웠다. 서로서로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인자하고 착한 사람들 뿐이었다.
주인공은 언제나 늦게 등장하는 법이라더니. 저 멀리 흰색의 정장을 입은 노신사. 우리 할아버지가 당당히 보폭을 옮겨서 등장하신다.
정치 하신다는 분이 어찌나 패션에 관심이 많은지, 이태리에 정장을 입고 가시면 사진 수백장이 찍힐 것 같은 비쥬얼이었다.
"읏짜~"
기지개를 켜며 남은 시가를 대충 비벼 끄고는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모두가 말을 하진 않지만 할아버지를 주목하고 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사회자가 할아버지의 등장을 알리고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걸어가 단상 위에 올랐다.
"연회들은 잘 즐기시고 계십니까?"
정중한 말 속에 그들을 낮잡아 보는 뜻이 깔려 있다는 걸 전귀들은 모르지 않는 듯 곳곳에 인상을 찌푸린 인사들의 얼굴이 보인다.
"예전에도 이런 자리가 있었던 듯 합니다. 아마 그때가 IMF이후였던가요? 아아, 내가 역사바로알기 재단을 만들었을 때도 비슷한 자리가 있었던 것 같군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벌써 세번째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할아버지.
눈치가 빠른 장사치들 답게 모두 할아버지의 말 뜻을 알아 듣는다.
첫번째 연회에서도.
두번째 연회에서도.
너희들은 우리 천가에게 고개를 조아렸으니 이번에도 그리하는게 좋을 것이다란 말과 같았다.
"항상 국가를 위해, 또 서민들의 복지를 위해 큰 돈을 쓰는 여러분들이 우리 국가의 기둥이 아닐까 싶습니다."
속으로 박수를 치며 할아버지가 이제는 정말 완벽한 정치인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술 줬으니, 술 값내라. 그것도 아주 비싸게.'란 말을 돌려하고 계셨다.
"최근들어 몇몇 기업인들이 정치인들과 결탁해 불법선거자금을 돌리고 있다는 얘기가 자꾸만 들립니다. 쯧쯧, 이 얼마나 통탄을 금치 못할 일입니까?"
네 놈들 자꾸 다른데 돈 쓰더라? 감당 할 수 있겠니란 뜻.
곧, 철웅을 필두로 한 많은 대원들이 재계 인사들에게 작은 명함을 돌리기 시작했다.
역사바로알기 재단의 재단장 공식 명함이었으며 뒤집으면 재단대표 계좌가 선명하게 찍혀있는 것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불철주야 대한민국의 역사를 지키기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계신분들이 본을 보여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여기로 돈 넣어라, 그러면 내가 선거자금으로 잘 쓸게.'란 뜻이었다.
자연스럽게 전귀들, 그러니까 전경련 인사들의 표정은 좋을리 없었다.
차명에 차차명까지 열심히 돌려돌려 비자금을 만들어 놓고 있는 상황 '자금 이동'을 최소한으로 해야만 위험을 피할 수 있기에 큰 돈이 이동할때면 언제나 리스크를 가져가야 했다.
그들도 알고 나도 알고, 할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KS그룹 최태수 회장이 보란듯이 명함을 구겨서는 바닥에 버린다.
그리고 그 장면을 나와 할아버지, 여러 전경련 인사들이 지켜보았다.
"아쉽게도 회사가 어려워 기부금은 낼 수 없겠습니다."
누구하나 나서지 않고 당하고 있으니 자존심이 심히 상했던 모양, 최태수가 선봉을 서자 그를 따르는 전귀들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명함을 건넨 대원에게 다시 돌려주거나 그냥 바닥에 버린다.
"크하하하하하, KS그룹 자금 사정이 많이 힘든 모양입니다. 요즘 대한금고에 싸이는 부가 적지 않으니 대출을 알아보는 것은 어떻겠소?"
할아버지는 '흉포하다'라는 말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웃음과 함께 최태수의 발언을 비꼬았다. 한껏 얕잡아 보고 있음을 최태수 역시 모르지 않는 듯 할아버지에게 퉁명하게 말했다.
"대한금고는 전신이 전신인 만큼, 이자를 믿을 수 없어 다른 곳을 찾아볼까 합니다."
대부업이 시작이라는 얘기를 돌려까고 있었다.
"좋군. 나는 자네가 부디, 계속해서 그렇게 뻣뻣했으면 좋겠어. 이 나이쯤 되면 삶이 무료하거든."
완벽한 하대에 최태수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연회장의 문이 커다란 소음과 함께 닫히고 밝게 빛나던 샹들리에들이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이내 완벽하게 정치인의 가면을 벗어던진 할아버지가 말했다.
"부디 자네들이 계속해서 싸워줬으면 해, 그래야 내가 조금 더 재미있을 것 같거든."
최태수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할아버지와 나의 뒤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파나마 현지에서 대통령의 성명문이 발표되는 화면이었다. 그리고 그 화면은 현재 전국에 송출되고 있는 6시 뉴스의 화면과 같은 것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 후보자 천혁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고자 합니다. 파나마 최대의 범죄 카르텔을 척결하고......
장내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최태수를 필두로 한 전귀들이 열심히 물어 뜯고 있던 할아버지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순식간에 장정으로 탈바꿈 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
-인신매매, 마약유통, 장기매매등 상상하기 힘든 범죄행위에 타국의 대통령후보자가 직접 나서서......
파나마 대통령은 마치 할아버지를 영웅처럼 포장하고 있었다.
지이이잉.
다시 샹들리에의 불빛이 밝게 들어오고, 똥 씹은 얼굴들을 하고 있는 전귀들이 보였다. 최태수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장내 모두가 아는 것이다.
대세는 할아버지에게 기울었음을.
할아버지는 치아를 보이며 밝게 웃는 표정으로 한명 한명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크게 말했다.
"계좌 번호 보이시죠?"
명함을 바닥에 버렸던 전귀들 몇이 황급히 명함을 줍는다.
"자, 성의들 보겠습니다."
최태수는 부들부들 떨며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싸늘한 침묵이 내려 앉은 연회장.
할아버지는 뚜벅뚜벅 단상을 내려와 최태수와 마주 섰다.
"돈이 많이 필요 할 게다. 내 손주놈은 아귀와 같으니까."
툭툭 최태수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연회장을 벗어나는 할아버지. 그리고 최태수를 비롯한 전귀들 모두가 나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액수에 따라. 진심을 담은 성의에 따라."
작게 말했지만 모두가 내 말을 경청하고 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살려는 드릴게."
싸늘한 침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제 놈들의 비서들을 찾는 전경련의 회장들.
"황비서! 당장 이쪽으로 사내 유보금 입금 해!"
"무조건 황보 건설보다는 1원이라도 많이 입금 해!"
"이런 개 자식이!"
< 제 24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