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7화. >
할아버지의 파안대소가 쩌렁쩌렁하게 홀에 울리자 연주자들이 잠시 연주를 멈추고, 저마다의 정치질로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고요하게 내려 앉은 연회장.
나와 김일정은 똑바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만 기래."
푸들푸들 떨리는 볼로 힘겹게 입을 연 김일정,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기대하겠소."
먼저 손에 힘을 푸니, 나 역시 손에 힘을 풀어주었다. '강골'이니 어쩌니 하더니 순수한 비곗덩어리인 모양, 손은 굳은살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손목은 두꺼운 지방에 둘러쌓여 있었다.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놈이 기름기가 잔뜩 껴 있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혐오감이 올라온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심지어 오늘 내가 볼 또 한명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장저민 보다 못한 몸뚱이었다.
핏줄의 힘으로 깜냥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차지 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쯧."
뒤통수를 보이며 사라지는 놈에게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 놈이, 할애비가 할 얘기를 제 놈이 다 하고 있구나."
"하하하. 그래요? 육회만 주고 계시길래요?"
"이 놈아, 이 시뻘건 피가 곧 저 놈이 흘린다고 얘기하려 했었다."
"적당히 북한의 굶어 죽는 사람들도 언급하면서 약도 올리고요?"
"그렇지."
어느새 돼지 놈의 일행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와 할아버지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는 자리로 변했다. 할아버지의 살벌한 웃음소리 때문이었는지 우리 주변에 다가오는 인물들은 없었다.
"영, 인기가 없으시네요?"
푸스스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던 할아버지.
"흔들리는 갈대들은 바람을 피하고 싶은 법이지."
"바람을 맞아야 후손을 남기는게 갈대인데 말이죠."
"그럴 깜냥이 없는 놈들인게야."
피식 웃으며 아직도 두 눈에 '분노'라는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담구기에는 좀 시기상조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이 놈아 지금 시국에 돼지놈 멱을 따면 난리가 날 게다. 천천히 가야지."
"아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내 몸뚱이에 구멍을 두개나 냈으니 보답 정도는 해 줘야지."
"아산댁 아주머니에게 난 구멍때문이 아니고요?"
쫙.
무척이나 아픈 등짝 스매시였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신음을 삼켰다.
"할아버지 여기 바깥입니다."
"네 놈이 할애비 놀리는 것은 괜찮고?"
"크음, 어쨌든 경고는 제가 따로 할테니 할아버지는 편안하게 쉬십시오."
경고라는 단어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호석에게 눈빛을 보내 신호를 주었다.
이제는 PMC의 대원들이 알아서 해 줄테다.
"뭐, 기대하고 있으마."
"예."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그럼요."
할아버지가 육회가 가득한 접시 위에 홍색 연어살을 넣으며 말했다.
"빨간놈들 사이에, 덜 빨간놈을 심어볼까 싶은데."
수저로 그것을 퍼 올려 입에 넣고는 말했다.
"백대표에게 언질 해 놓으시죠, PMC쪽에 첩보부 따로 있으니까."
"그런 것도 만들어 놓았더냐."
"세상만사가 완벽해야 하니까요?"
"어쨌든 네 놈은 찬성이란 얘기인줄 알고 있으마."
"SKY가 우리 천가가 커지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이죠."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시기상조라 하지 않았더냐?"
"예, 아직은요. SKY항공우주기술이 아직은 함부로 나설 단계가 아니라서."
"또 뭘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미사일 준비 중입니다."
"그게 완료되면?"
난 웃으며 샴페인이 담긴 잔 안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뻘건놈들이 가진 새빨간 것을 가져와서 합치면, 그때는 마음놓고 일을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육회 위 달걀 노른자를 터트리며 말했다.
"이 놈을 말하는구나."
"그렇죠? 곧 위성 발사를 할 예정입니다."
"위성을 발사하면 미사일 작업은 끝나는 것이냐?"
"그렇진 않은데, 그게 본격적인 시작인거죠."
"몇년을 보느냐, 미사일."
"적어도 할아버지가 대통령으로 계시는 중에는 확실하게."
피식 웃는 할아버지.
"이 놈아, 당선 되면 삼선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만. 내가 죽는 것이 더 빠른건 아니겠지?"
"아아, 정정하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첫 임기 안이라고."
"오래 기다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 역시 수저를 들어 노른자가 흥건한 육회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피를 봤으니, 더한 피를 보여줘야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인내심이 사라져."
"예, 최대한 빠르게."
"오냐, 알아 들었다."
***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SKY호텔의 펜트하우스.
"반갑소, 장 가요."
비밀리에 모인 장저민과 부쉬가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둘을 작은 밀실로 안내해 한바탕 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 안에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시시콜콜한 사담이 오가고 어느새 술병이 하나 둘 늘어날 즈음.
"그래서, 천 회장이 가지고 있는 후진다오에 대한 약점이 무엇이오?"
평소와 달리 제법 예의를 갖추고 있는 장저민, 확실히 노련한 정치인 답게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여기 있는 부쉬 대통령에게 후진다오가 접촉을 했다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얘기겠죠?"
장저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내에서 후진다오의 입지는 별로 좋지 않겠군요? 어쨌든 미국을 끌어드리려 했으니 말입니다."
부쉬가 있지만 말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나는 영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장저민은 중국말을 하고 있지만 영어를 알아 듣는 사람이었다.
부쉬를 위한 배려였고, 그것은 장저민도 동의 한 상황.
"그렇소, 당내의 내분이 생기고 있는 상황이고, 군부 역시 망할 놈들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오."
나는 웃으며 부쉬를 바라보고, 이어서 장저민을 바라본 후 말했다.
"내 조건은, 우리 PMC를 미국과 중국이 5:5의 비율로 고용하는 것입니다."
부쉬도 장저민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SKY PMC는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알 카에다 놈들에게 제법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는데는 스페셜리스트라는 방증이겠죠."
"우리 공안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오!"
장저민의 입장에서는 군부 세력의 축소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짜증나는 일이었을 터. 나는 장저민의 말을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 인근, SKY의 땅에 중앙 아시아 및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부대 건설이 조건입니다."
쾅!
장저민이 테이블을 내려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안되는 조건이군, 우리 공화국의 땅에 미군이 발을 들여 놓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외다."
장저민이 나와 부쉬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그만큼 현재 그가 매우 흥분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장 주석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해서, 방금 말한 조건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입장이었고, 내가 제시하는 중재안은 타클라마칸 사막에 미국의 군 부대가 아닌, 미국 중앙통제실의 통제를 받는 SKY PMC가 운용하는 레이더기지와 방공망 만을 설치하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번엔 부쉬가 인상을 찌푸렸다.
부쉬의 계획은 어쨌든 뭐가 되었든 미군을 중국 땅에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야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중국'을 억제 할 수 있다는 계산.
"그것은 결국 우리 국방비로 중국을 보호하는 꼴이 되는 처세입니다. 나 역시 굳이 그러고 싶지 않군요."
부쉬와 장저민이 뜨거운 눈빛을 교환한다. 서로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제 슬슬 둘의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 무기를 꺼내야 할 때 였다.
"알 카에다 세력에 의한 중국 공안들의 피해는 앞으로도 더 커질겁니다. 놈들은 여태껏 상대하던 테러리스트들과는 다릅니다. 잔인하고 극악무도하죠, 인민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방법을 사용할겁니다."
"크음."
실제로도 현재 중국땅에서 이뤄지고 있는 일이기에 장저민은 입술을 달싹일뿐 뭐라 말을 내뱉지 못했다.
중국땅에 전쟁이 사라진지도 오래되었고, 계속해서 당내 군부 쳐내기가 실시되고 있었기에 과거 '중공군'이라는 위명은 많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게다가 사사건건 후진다오가 발목을 잡으니 현재 공안부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의문인 상황.
그렇기에 '삼합회'혹은 '흑사회'라는 폭력단체가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알 카에다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는 프라이드에 금이가는 소문이 널리 퍼지는 것은 비난을 종용하는 일이 될 겁니다. 실제로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큰 변동이 있다죠? '전쟁광'이라는 흠집 역시 심심찮게 들리고 있는 상태고요, 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크음."
부쉬역시 반박하기 어려운지 헛기침을 내뱉으며 가만히 내 말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SKY PMC. 그리고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겁니다. 중국의 자존심도 미국의 자존심도 모두 지키는 일 아니겠습니까?"
설득력 있는 개소리에 불과하지만 부쉬도, 장저민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게 반드시 얻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장저민은 후진다오를 쳐낼 무기가.
부쉬는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 지지율을 끌어올릴 무기가.
그들의 저울에 과연 '국가'라는 개념이 들어 있을까 싶었다. 그들은 바깥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정치인들처럼 애국자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위선자일까?
딸깍.
나는 조용히 녹음기를 재생시켰다.
-그렇소, 후진다오요.
-갑작스러워서 조금 놀랐습니다.
-이해하오,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 이미 장저민 주석과의 관계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익숙한 음성이 들리는지 장저민은 팍 인상을 찌푸린다. 부쉬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언제 이런것을 준비했는가 하는 표정.
부쉬는 후진다오와 다르게 전화로 얘기할때 신중을 기한다. 가령 녹음이 불가능한 전화를 쓴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발달한 미국이 생각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발달이 덜 이뤄진 중국 정치인들의 생각은 그 만큼 차이가 벌어져 있는 것이었다.
후진다오 역시 아재였기에 현대 문물을 몰라 저지른 실수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혹은, 변화하는 시류와 함께 성장해야 하건만 욕심에 사로잡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라 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헌데 내게 전화를 주신 이유는?
-정치라는 게, 그리고 사업이라는 게, 어디 한쪽에만 편중되어 있겠습니까? 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양쪽을 오가야 하겠지요.
......
-그대가 장저민 주석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오.
-장저민 주석이 그대에게 한 약속이 지켜질것이라 확신하시오?
-군부의 힘이 악화 된다면 장저민 주석은 끈 떨어진 연이 될 신세요.
부들부들 떨던 장저민이 이내 참지 못하고 크리스털 잔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밀실 안 누구도 장저민의 분노를 위로하지 않았다.
-크큭, 당신 때문에?
-오냐, 당장 오늘부터 SKY그룹의 공장 건설에 차질이 생기게 해 주마.
-어이쿠 무서워라, 어디 한 번 그렇게 해보던가. 주석이 과연 가만히 보고 있을까?
-장저민이 언제까지 하늘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는 이미 저물어가는 해 임을 어찌 모르지?
-그럼 네 놈은 떠오르는 해인가?
-뉘에있어 나보다 높은곳에 있을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군.
-두고 보지.
빠드득 이를 갈며 녹음기로 손을 뻗는 장저민.
내 손이 먼저 녹음기에 닿았다.
"이 정도면 확실한 약점이지 않겠습니까?"
당내 지도부 인사가 감히 주석에게 역심을 품었다.
그 역심에 대한 물증까지 뚜렷한 상황, 중국에서 이것은 그 어떤것보다 강한 명분이 되어 줄 터였다.
아무런 명분 없이는 후진다오의 목을 칠 수 없다. 그러나 이 녹음기가 있다면 후진다오의 목을 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 당내에 반발 역시 누그러트릴 수 있을 만한 파급력을 지녔다.
"부정하지 않겠소."
고개를 돌려 부쉬에게 말했다.
"6개월 안에, 오사마 빈 라덴의 목을 드리죠."
부쉬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생포를 장담 할 수 있겠습니까?"
"아프간 지역에서 생포하는 그림으로 포장도 가능하지요."
부쉬와 장저민이 눈을 맞춘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로 스윽, 사전에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에는 내가 얘기했던 중재안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중국의 돈과 미국의 돈으로, SKY가 움직일 수 있는 내용이.
< 제 24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