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6화. >
딴~ 따라단.
가벼운 클래식이 흐르는 호텔의 연회장.
언론인들이 사라진 그 곳에서 대한민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고위인사들의 작은 연회가 열렸다. 대부분이 수행원들이지만 그 수행원들 사이로 따로 '협의'를 해야 할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가며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정상회담이 열리는 곳이 한국이었던 것 답게, 한국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볼일 보세요 할아버지."
"그래, 김일정이 놈 얼굴이나 봐야겠구나."
어쩐지 할아버지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스테이크 나이프나 포크같은 걸 치우라고 할까 싶다가 생각해보니 굳이 그런게 없어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맨손으로도 가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부쉬에게 향했다.
한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쓴 웃음을 짓고 있던 부쉬가 날 보더니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오, 미스터 천."
그의 곁에서 마치 여왕벌을 호위하는 것 같던 병정들이 나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시선을 회피하며 사라졌다.
"음?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스터 천을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부쉬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에 보기로 했으니, 술은 적당히 드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부쉬.
부쉬가 지나가던 웨이터의 쟁반위 샴페인을 두잔 들어서는 내게 한잔을 넘기며 말했다.
"알 카에다, 특히 오사마 빈 라덴이 중국으로 넘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제 놈도 살길을 찾으려 한 것 아니겠습니까?"
부쉬가 주변을 살피다 내게 조용히 말한다.
"SKY PMC가 주둔하고 있던 곳을 지났다는 첩보가 있더군요."
왜 놈들을 중국으로 넘겼냐는 추궁이었다.
나는 숨길 게 없다는 듯 말했다.
"중국 놈들이 배 불리고 있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테러의 위험에서 미국이 벗어나는 것 만으로도, 나스닥 포인트 상승을 무시 할 수 없을텐데요."
"미국을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아니겠습니까? 겸사겸사."
부쉬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러는 김에 SKY의 중국 진출을 더욱 공고하게 하고 말이죠?"
"세상 만사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짠~!
부쉬와 잔을 부딪히고는 샴페인으로 목을 적셨다.
특별히 제법 질 좋은 샴페인을 풀었기 때문인지 맛이 훌륭한 편.
"혹, 빈 라덴이 미스터 천의 말을 듣나 궁금하군요?"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테러단체의 수장이 기업가의 말을 어째서 듣겠습니까? 제 놈들 뜻대로 하는 것이겠지요."
"듣기로는 중국 내륙으로 깊숙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하더군요."
"어이쿠, 장저민 그 사람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습니다. 공안부의 위명이 말이 아니겠네요."
부쉬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위로 팔을 두른다.
멀리서 나와 부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우리의 관계를 추측하기 바빠보였다.
"이번에는 미국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 내가 미스터 천에게 고맙다고 얘기해야겠습니다."
부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고있고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그 속에 내 행동에 대한 꾸짖음이 들어 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니, 어느새 제 놈이 세상의 대통령이라도 된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이래서 나라가 힘이 없으면 세상살이가 팍팍한 법이다. 그렇다고 내 뜻을 굽힐 정도로 난 그렇게 모자란 놈이 아니었다.
"나는 장사치고, 이득에 따라 움직이죠."
부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네 놈의 부하도 아니고, 네 놈에게 명령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 언제든 이득이 된다면 미국이 아니라 중국의 곁에 설 수도 있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 부쉬가 말했다.
"하하, 사업가이니 어디가 더 이득이 될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미스터 천."
"물론이죠, 내 계산기는 세상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명심해야겠군요, 그 계산기에 언제나 미국이 가장 큰 숫자를 차지할 수 있게."
"지금도 잘 하고 계십니다."
"이거 칭찬을 받았으니 춤이라도 춰야할까 봅니다."
부쉬의 비꼼에 개의치 않고 샴페인 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전달하고는 물었다.
"전쟁 준비는 잘 하고 계십니까?"
"하하하 미스터 천, 누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입니다."
눈썹을 찡긋 거리는 부쉬.
모두가 쉬쉬하고 있을 뿐, 이 안에 부쉬가 이라크에게 복수하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해서 생 떼를 쓰고 있지 않은가? 생화학무기, 탄저균 등을 핑계로 말이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을 가지고 있다는 미국이 몇몇 몽상가들의 말에 속았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저 명분으로 삼았을게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중국은 커지면 커질수록 귀찮은 나라죠."
"그래서 알 카에다를 그리로 보내셨습니까?"
"에이, 설마요."
"내가 시선을 다른곳에 두고 있으니 대신 중국을 견제해주셨다 그리 말하고 싶은 겁니까? 미스터 천."
"겸사겸사 아니겠습니까 겸사겸사."
어느새 내 팔도 부쉬의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낮게 말했다.
"언제든 벌레의 시체가 필요하거든 말씀만 하시죠, 벌레라는 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니까."
부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미군도, 미국의 정보기관들도 하지 못한 일을, 기업이,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기업이 할 수 있다 얘기하고 있었다.
내 말 속에는 경고도, 그리고 화해의 제스쳐도 공존하고 있었다. 노련한 정치인인 부쉬가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언제는 원한다면 알 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의 모가지를 주겠다는 나의 말에 부쉬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이내 활짝 웃으며 다른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넨다.
"역시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아니겠습니까?"
나 역시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요, WIN-WIN 하며 삽시다."
"좋은 말입니다. WIN-WIN."
그도 나도, 서로의 등을 툭툭 두들기며 모종의 눈빛을 주고 받았다.
"하하 대통령님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한국의 대통령이 등장하고, 나는 부쉬에게 작게 속삭였다.
"연회가 끝나고 펜트하우스에서 한 잔 더 하시죠?"
"오, 오랜만에 미스터 천과의 한 잔이라. 이거 설렙니다."
"그럼 이따 뵙는걸로."
"그러시지요."
미국의 대통령과 서슴없이 대화를 나누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대통령, 그의 눈에는 부러움과 '기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 일 보십시요 대통령님."
"예, 천회장께서도 연회를 즐기시지요."
대통령에게 목례를 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현재 전경련은 나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다른 정치인들은 나의 곁으로 다가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직 수 싸움이 한창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모양.
덕분에 나는 조용하게 통유리로 된 흡연실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한창 서로의 탐욕과 기회에 목 말라 있는 사람들이 인맥 쌓기로 바쁜시간, 자연스럽게 흡연실 내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호석의 두 손에는 시원한 칵테일과 시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난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시가를 입에 물고는 말했다.
"오, 저기는 무슨, 시베리아 한 복판 같네요."
내 턱짓에 고개를 돌린 호석.
그의 눈에는 아마 김일정과 마주보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을테다.
"오우야, 나만 손 시려운 거에요? 찬바람이 거의 칼바람인데?"
내 농담에 호석이 피식 웃는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 하실지 궁금하긴 한데, 얼어버릴까 봐 차마 다가가고 싶진 않네요."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백 대표에게 물어 봅시다."
"예, 회장님."
***
천우진이 부쉬에게 걸음을 옮기는 것을 확인한 천혁수. 그의 눈에는 이 연회장에서 오직 한 명만 보였다. 저 멀리서 가증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꼴에 절대자처럼 무게를 잡는 놈이었다.
뚜벅, 뚜벅.
천혁수가 걷기 시작하자 그의 앞에 있던 정치인들과 관계자들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천혁수와 얼굴을 맞대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이내, 연회장 내부의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저들만의 복장을 입고 있는 집단에게 다다른 천혁수.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천혁수의 앞을 막는 존재들.
철웅 역시 천혁수의 앞으로 나서며 양복이 아닌 군복을 입은 이들에게 짧게 말했다.
"비켜."
철웅의 태도에 김일정을 호위하는 군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최고사령관 동지의 곁에는 허락을 받은 자만이 갈 수 있소."
철웅이 고개를 돌려 천혁수를 바라본다.
김일정을 빤히 바라보던 천혁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철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천혁수가 앞으로 나서며 김일정에게 물었다.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천혁수가 먼저 질문을 던졌고, 김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동무들이 옳게 준비해 만족하고 있소."
그러면서 김일정이 손짓하자 군인들이 길을 열어준다. 천혁수는 당당히 군인들을 스쳐가 수 많은 음식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서 비스킷 위에 육회가 올라가고 그 위에 와인소스가 뿌려져 있는 음식을 입에 넣어 씹으며 말했다.
"뻘건게 맛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뻗어 같은 음식을 집더니 김일정에게 내민다. 김일정은 그것을 받아 입에 넣고는 말했다.
"허허, 시뻘건게 꼭 피 같구만 기래? 안 그렇소 동무? 허긴, 소 괴기가 피 많이 흘린 사람한테 그렇게 둏디, 많이 자시오 동무."
천혁수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이 놈으로 골랐습니다. 안 그래도 누가 준 선물 덕분에 피를 많이 흘려서."
"동무도 나이를 생각해야 하디 않갔습네까?"
"위원장께서도 나이를 생각 해야지 않겠습니까?"
"내레 아딕도 건강하디."
고개를 주억거리는 천혁수가, 방금 먹었던 그 시뻘건 음식을 접시째 들어 김일정에게 내민다.
"위원장도 곧 피가 부족 할 것 같은데, 미리 철분을 좀 보충하는게 어떻겠습니까?"
"피가 부됵하다?"
눈썹을 꿈틀 거리며 천혁수를 바라보는 김일정.
"좋은 선물을 받았으니, 나 역시 좋은 선물을 주는 것이 옳은 일 아니겠습니까?"
경고의 의미를 알아 들은 김일정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거이 참 기대가 되는구만 기래?"
태연하게 주변의 친위대를 둘러보며 호탕하게 웃는 김일정.
천혁수가 내밀었던 접시는 어느새 군인들 중 한명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안 드십니까?"
"내레 디금도 굶고 있을 인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별로 먹고 싶디 않습네다."
"파하하하하하!"
천혁수가 껄껄 하고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회색 일색의 김일정의 몸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꾸 굶으시니 붓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일정의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들어보는 원색적인 비난에 놀란 모양.
"아! 할아버지 여기 계셨네."
뒤쪽에서 들린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지만 천혁수와 김일정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내 천혁수의 시선이 자신의 곁에 선 천우진에게 향한다.
"뭐 한다고 왔더냐."
천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금 아니면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누구를?"
"누구긴요, 여기 김일정 위원장님이죠?"
어느새 붉어진 얼굴을 갈무리한 김일정이 천우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하,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아이디. 반갑소 천우진 동무."
천우진 역시 김일정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예, 반갑네요."
"동무레 날 보고 싶으믄, 언제든 올라오시오 우리 공화국의 문은 자유롭게 열려 있으니."
천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아, 다시 볼 기회가 없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만?"
김일정과 천우진이 맞잡은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천가는 원한을 잊지 않는 편이라."
이어진 천우진의 말에 다시 한 번 천혁수가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파하하하하하하!"
< 제 24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