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45화 (245/458)

< 제 245화. >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옮겨 아직도 피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한 발. 그리고 다리에도 한 발을 맞았습니다."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전에 준비된 청와대의 주치의가 단상위에 올라 할버지지의 어깨쪽 상처를 살피다 말했다.

"저는 청와대에서 대통령님의 건강을 책임지고있는 한윤영이라고 합니다. 천혁수 후보자의 치료는 자택에서 직접 청와대 의료팀이 했으며, 당시 천혁수 후보자의 상처는 명확하게 총상이었다고 확언드립니다."

장내가 씻은 듯 조용하게 변했다.

천혁수의 거짓 테러, 표심 얻기 등으로 매도하던 언론들이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믿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결연한 표정으로 허리띠에 손을 가져간다. 청와대 의료팀의 대표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대통령 주치의가 서둘러 할아버지를 말린다.

"후보자님 진정하시지요."

"놓으십시오, 내 다리에 총상까지 확인시켜줘야 믿을 사람들입니다!"

"아닙니다. 믿을 겁니다. 제가 보증하지 않았습니까?"

그 장면을 보던 나는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미래의 어떤 가수가 기자회견장에서 바지춤을 내려야 믿겠냐며 열변을 토하던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 장면 역시 여러모로 패러디 되며 널리 회자되었다. 아마 오늘 할아버지의 기자회견 역시 널리 회자되지 않을가 싶었다.

어쨌든 미래의 대통령이 '벗은' 사건이니까.

오늘일로 다시 여론의 반전을 꿰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여론은 매우 혼란스러운 국면을 맞이 할 것이다. 그것도 결국은 며칠 가지 않겠지만.

"총상 논란과 테러 논란의 의혹은 해소했다고 하더라도, 총상을 입고 파나마라는 휴양지에서 대체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파나마 범죄조직과의 연루설, 사실입니까? 입장발표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인 여성과의 성매매설 사실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하나를 뒤집었으나 아직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과 구설수들이 많았기에 기자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할아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상의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는 입을 열었다.

"국민여러분, 다시 한 번 언론은 지금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저를 매도하고 있습니다. 성매매, 범죄조직과의 연루 등,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일을 대통령 후보자가 했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국민여러분, 더 이상 오염된 언론의 말을 신뢰하지 마옵시고, 이 천혁수를 믿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언론인들을 자극하는 할아버지의 거친 입담에 기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는 질문을 가장한 맹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매매가 사실이 아니라면, 젊은 여인이 굳이 천혁수 후보자를 만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자신감 넘치시는 겁니까?"

"범죄조직과 연루설을 부인하고 계시는데, 그렇다면 여기 이 사진, 범죄조직에게 돈을 건네는 이 사진은 어떻게 설명하실겁니까?"

"무시무시한 북한 간첩들의 테러에서도 끄떡 없이 버티신 분이 설마, 동네 무뢰배들의 협박에 못 이겨 돈을 건넸다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 말씀 해주십시오!"

"한 말씀 해주십시오!"

오우야, 욕만 안 했지 혓바닥이 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할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 천혁수! 극한의 훈련을 받아온 북한 간첩들의 총탄에도 쓰러지지 않고 이 앞에 서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총탄에도 쓰러지지 않은 제가 욕심과 탐욕으로 얼룩진 기득권들에게 매수된 언론에 결코 지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저 간악한 세력과 맞서 싸우고, 몸이 부서져라 싸워 끝내 이겨내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여러분이 웃을 수 있는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남은 숨을 토해내겠습니다 여러분!"

기자들은 질문을 가장한 욕을 하고, 할아버지는 열심히 선거유세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기자들의 맹 질문은 깔금히 무시한 할아버지가 생중계되고 있을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나라를 좀 먹는 기득권들을 몰아내고, 반드시 이 땅에 정의가 있음을 증명해내겠습니다 여러분, 소속이 없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어! 법이, 국가가! 국민께 더 없이 소중한 벗이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그 순간까지 이 천혁수 죽어라 뛰고!"

팡, 팡, 팡.

할아버지가 아직 피딱지가 남아있는 어깨쪽 총상 부위를 주먹으로 마구 두들기며 말을 잇는다.

"아파도 이 악물고 참으며, 그렇게 나아가겠습니다. 부디 이 천혁수를 믿어 주시고 기다려주십시오! 모든 의혹을 깔끔하게 이겨내고 당당히 국민여러분 앞에 인사 올리겠습니다!"

모든 말이 끝났을 때, 할아버지 어깨는 어느새 피범벅이 되었고, 그 피는 할아버지의 쇄골과 가슴, 복부를 타고 밝은색의 정장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다시 총이라도 맞은 것 처럼.

카메라를 씹어 먹을 것 처럼 응시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플래시 세례를 뒤로 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서둘러 사회자가 앞에 나서며 말했다.

"금일 정상회담 일정이 있어, 급하게 간담회를 마무리하는 점 양해를 부탁......"

나는 커다란 타올과 함께, 한복 디자인이 유독 눈에 뛰는 가운을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음?"

"비싼 거예요, 특별히 주문제작."

"허허, 이런 것 까지 마케팅? 그걸 하느냐."

"이미지 메이킹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피식 웃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거부하지 않는다.

본래는 세단에 올라야 했지만, 할아버지의 상처 치료를 위해 커다란 벤에 오른 우리들.

탁, 탁, 탁.

의료용 스테플러로 할아버지의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는 사이.

"연설 좋던데요?"

"푸핫, 효과좀 있겠더냐?"

"예, 오늘만 해도 총상, 간첩테러 의혹 반전되니까 세상이 멈췄잖아요?"

"기득권과 언론을 너무 매도한 것 같기도 하고."

"곧 사실로 밝혀질거라면서요? 파나마의 영웅씩이나 되시면서."

피식 웃는 할아버지.

"반전 되면 아마도, 언론들도 살아남기는 힘들 겁니다."

***

대현그룹의 회장 정상영이, SKY전자의 TV를 통해 회장실에서 천혁수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다 한숨을 내쉰다.

"후우... 다행이야."

비서실장이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 회장 그 친구 얘기에 살짝 흔들리기도 했었거든."

"그렇습니까."

"거절하길 잘 했구만, 안 그래?"

"예, 회장님 결과적으로 그래 보입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안도하던 정상영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자신의 몸을 한번 쳐다보고는 비서실장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나저나, 저 노인네는 몸도 좋구나. 나도 운동을 해야 할까 싶어."

비서실장이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건강에도 좋고, 저는 적극찬성입니다."

"나도 천혁수 저 노인네처럼 되려면 제법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

비서실장이 정상영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음, 회장님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음..."

다시 TV로 시선을 돌린 정상영이 차를 홀짝이며 고소하다는 듯 웃고는 말한다.

"그나저나, 최 회장 그 친구,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법 난장을 피고 있겠구만."

"하하하, 건설쪽 사람들을 보내 요정의 인테리어 견적이라도 뽑아줄까 싶습니다."

비서실장의 맞장구에 피식 웃는 정상영.

"우린 동남아 시장에 집중하자고... 서구권은 너무 강력한 경쟁자가 탄생할 것 같으니."

"예, 회장님."

대현자동차의 미래에 한계점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천혁수가 대통령이 되는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압도적으로 성장할 SKY 자동차를 생각하며 내리는 속쓰린 결정이었지만, 정상영의 얼굴에는 속이 쓰리다는 것 보다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비춰지고 있었다.

***

KS그룹 최태수 회장이 조양구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크흠..."

장내의 모두가 최태수 회장의 눈을 피했다. 그의 분노를 받아내고 싶지 않기 때문.

"조 회장이 가장 먼저 천혁수 후보자를 견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놓고는 요즘 통, 별 말이 없습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내뱉은 최태수의 질문에 조양구가 '커험'하고는 대답했다.

"여야가 단일화 되는 모습을 지금쯤에 보여주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직 성매매 의혹등과 더불어 시끄러운 지금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싶습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였습니다."

"현재 천혁수 그 노괴에게 언론과 여론이 집중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시선을 빼앗아 올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나도 가르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조양구는 절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혁수의 연설에서도 '탐욕에 물든 기득권'이라며 우리를 저격하지 않았습니까? 저렇게 공공연하게 저격하고 있는데 실제로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조양구는 맞지 않으냐며 전경련의 회장들을 쭉 돌아본다. 그들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양구의 의견에 동조를 표했다.

"우리는 동지입니다. 동지! 저 노괴가 대통령이 되지 않게 어떻게든 막아야 할."

최태수가 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그런 분들이 요즘 통, 지갑 사정이 나빠지셨나 회비 납부가 원할치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회장들이 최태수의 눈을 피했다.

최근 여야 후보자들의 네거티브 공세에 투자된 금액이 어마어마한 상황. 대부분의 돈이 KS그룹의 비자금이었다. 전경련의 회원들이 차일피일 미루며 돈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현재 천혁수의 지지율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후회할 짓들 하지 마시고, 순순히 토해내셨으면 합니다만? 어차피 우리는 뒤가 없습니다. 현재 천혁수 후보자의 지지율이 36퍼센트대로 떨어졌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겠지요?"

최태수의 말에 조양구가 조심히 나섰다.

"오늘 회견을 통해 조금 회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돈이 더 필요하단 얘기입니다. 천혁수 저 노친네의 파나마에서의 행적과 언론들을 확실하게 매수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크음, 우선 저 멍청한 노괴가 언론을 대놓고 공격했으니 언론에서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 귀신들은 언제든 SKY 곁으로 붙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겁니다. 우리의 자금줄이 마르면, 놈들은 새로운 자금줄을 찾아 움직일거란 얘깁니다. 그러니까 곳간의 열쇠, 썩어버리기 전에 넘기세요."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전경련의 회원들 역시 알고 있었다. 현재 최태수가 하는 말은 '최후통첩'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조양구가 슬그머니 가방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무기명 채권으로 준비 해 왔습니다."

그 역시 이제는 정말 뒤가 없음을 뼈조리게 느끼고 있었다.

***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공교롭게도 SKY그룹에서 관리하는 호텔이었다.

정부 인사들이, 정확히는 대통령이 현재 우리 가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굳이 이런 편의를 기대하진 않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나와 할아버지는 덕분에 호텔의 최상층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수 있었다. 회담 자체에 참석 할 수는 없지만, 회담 후 뒤풀이 장소에는 우리가 참석 할 예정이었다.

"전경련 날파리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겠구나."

가만히 기다리기가 지루하셨는지 먼저 말을 붙이시는 할아버지.

"그렇겠죠? 오늘도 만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할아버지, 이내 날 빤히 바라보신다.

"왜요?"

"왜요는 이 놈아, 일본 노래가 왜요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어허, 이 놈아. 보따리 좀 풀어 보거라, 네 놈이 생각할 때 전경련 놈들이 어찌 나올지."

"에이, 제가 무슨 무당인가요? 미래를 예측하게?"

할아버지가 픽 웃으며 말했다.

"무당보다 더 하지, 가끔 네 놈이 메시아가 아닐까 싶을때도 있다."

"오우, 큰일 날 소리. 벌써 기독교 표 빠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할아버지."

"그럼 부처로 하겠더냐?"

"에헤이, 종교 얘기는 아예 하지 않는 걸 추천드립니다."

"알았으니 흰 소리 그만하고, 이야기 보따리나 풀어보거라."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지금 여론의 행태나 여야 후보자들의 행보를 봤을때, 거의 100퍼센트. 단일화가 진행되겠죠."

"하, 독재니 빨갱이니 하면서 죽일 듯 싸우던 놈들이 살고 싶어서 합친다?"

"어제 기준으로 할아버지가 35퍼센트 정도 지지율이고 현 여당 후보자가 31퍼센트, 야당 후보자가 27퍼센트였거든요?"

"호오, 내 소식이 나라를 뒤집어 놨다더니 그래도 아직 선방하고 있구나."

"어쨌든 그 둘이 합치면 할아버지를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겠죠."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했다.

"확실히 두 놈이 합치면 제법 인기를 끌겠구나, 그래서 어느 놈이 최종 후보자가 되느냐?"

"에헤이, 진짜 무당이신 줄 아시나."

"알 잖으냐?"

"적절한 데이터를 가지고 예측을 하는 거죠, 예측을."

"흐음, 예측이라. 역시나 지지율이 더 높은 여당의 후보자가 나서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헤이, 할아버지도 참. 어디 돈 많은 놈들이 현 여당 좋아하던가요? 제 놈들 살 도려내려고 달려드는 놈들을?"

"허, 야당 후보자를 내세운다? 여당이 가만히 있겠더냐?"

"돈 앞에 여당 야당이 어디있습니까? 그냥 밥 기다리는 개새끼들이지."

< 제 24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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