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4화. >
몇달동안 일이 쌓여 있다 보니, 보고를 받을 것도, 새롭게 처리해야 할 것도 많았다. 중요보고와 우선순위 상위에 있는 일들은 사전에 전화로도 처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역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내게 '내가 더 잘했소!'를 외치며 서로의 성과를 보고하느라 신이 난 듯 했다.
"아오, 몇 시죠?"
마치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하다는 질문에 호석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16시 32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디테일한 시간을 듣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를 좋아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는 호석이기에 가능한 일.
"다음 일정은 없죠?"
"예, 회장님."
"조기 퇴근으로 하죠."
"차량 준비시키겠습니다."
차량에 올라 자연스럽게 품 안의 전화기를 꺼냈다.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든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기 위함이었다.
-오냐.
"뭐 하고 계세요?"
-대비와 수다를 떨며 한 잔 하고 있지.
"세상을 뒤집어 놓으신 분 치고는 여유가 넘치시네요?"
-이 놈이 비꼬는 게냐.
"CNN에서도 할아버지에 대한 테러가 '자작극'일지도 모르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면서 짤막한 뉴스를 내보냈다는데 설마 비꼬는 거겠습니까?"
-맞구나.
정답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팔자좋게 놀고 계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소란스럽게 노시라고 했더니, 제대로 소란스럽게 노셨네요. 역시 놀 줄 아는 분이십니다."
-녀석, 곧 터질 뉴스에 깜짝 놀라겠구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보다 더한 뉴스거리가 있다는 듯한 할아버지의 말 때문.
"뭐가 더 있어요?"
-파나마의 범죄조직 하나를 소탕했다.
룸미러로 날 살피고 있는 호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철웅 선에서 움직인 모양.
"PMC대원들 제 새끼들인데 너무 마음대로 쓰신 것 아니에요?"
-이 놈아 네 새끼들이면 내 증손주들 아니냐.
"아니 얘기가 또 그렇게 됩니까?"
-하여튼, 사고를 몇개 쳤는데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해결 하마.
나는 자연스럽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피래미 몇마리에게 고래가 상하더냐.
"고래에, 상어에, 호랑이에 다음엔 무슨 비교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제 놈은 용이라고 떠벌이더니 겨우 고래에 뭐라고 하느냐.
목소리만 들어도 정정한 듯 하시니 안심은 되었다.
-오랜만에 몸을 풀었더니 개운하구나, 뜻 깊은 일도 했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야.
"뜻 깊은 일이요? 봉사활동이라도 하셨나요?"
-세상의 미래를 구했지.
"예?"
-별이와 태양이처럼 세상을 짊어질 어린 생명 말이다. SKY 인재양성소도 글로벌 시장에 맞춰 다인종, 다국가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게 좋지 않겠더냐?
"파나마에서 사람들이라도 보내시나 봐요?"
-척하면 척이니, 이래서 네 놈과 대화 할 때가 재미있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일을 하신 건데요?"
-이미 대비한테 하나하나 보고하느라 입 아프니, 자세한 것은 보고를 듣거나 뉴스로 보거라.
"수습은 가능 한 일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자신만만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습뿐이겠더냐, 네 놈 계획에 더 도움이 될 만한 뉴스가 될 게다.
"호오."
눈치가 빠르신 할아버지답게 소란스럽게 놀라는 내 말을 잘 이해하셨던 분이다. 그런 할아버지가 호언장담을 하니 과연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여태껏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했던 행보와는 전혀 다른 선거유세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할아버지의 민심공략은 상당히 특이한 형태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모레 낮에나 도착하겠구나, 그때 보자.
"옙."
전화를 끊고 호석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파나마에서 제법 시끄럽게 노신 모양인데, 뭐 보고 받은것 없습니까?"
"백대표에게 어떤 얘기도 들은 게 없습니다."
"상세 보고서 올리라고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PMC대원들의 무기사용은 모든 것을 보고하라고 하시고."
"예, 회장님."
철웅에게 아직은 나보다 할아버지가 더 윗사람인 것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나와 호석 역시도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윗 사람으로 생각하기에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PMC대원들의 생명은 소중한 내 자산이고 내 자산이 움직이는 것에 대한 보고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철저한 보고체계를 강요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서운해 하시려나."
내 혼잣말에 호석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백부님께서는 오히려 칭찬하실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자기 사람 챙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백부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얘기기도 하고요."
"그렇다면야."
***
전화를 끊은 천혁수에게 록펠러가 목이 타는지 칵테이를 물처럼 마시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통해서 미국놈들과 딜을 하겠다는 얘기인가?"
"맞아."
"이 친구, 재미는 혼자 다 보고 나보고 뒤나 닦으라니."
"어허, 대비 이 사람, 나 억울하게 할 샘인가?"
"크흠, 그렇잖은가? 혼자만 아주 화끈하게 놀고 와서는 사고 친 것들이 있으니 수습해달라니."
피식 웃는 천혁수.
"무엇이 그리 서운한겐가."
"그래놓고 내기에 이겼다고 소원까지 들어줘라?"
천혁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가 자네가 그럴 줄 알고, 낮에 만났던 벨라루스의 미녀에게 '미팅'이란 것을 제안했지."
"미팅? 업무를 볼게 있는가?"
"하하하, 그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중에 있는 건데, 뭐 대충 더블데이트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되네."
"벨라루스의 미녀들과 자네와 내가 쌍쌍으로?"
"그거지."
록펠러가 싫지는 않은지 '험험'거리며 천혁수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받는다.
"겨우 그 정도로 넘어갈 생각 하지 마시게."
"하하, 알았네. 주기적으로 보답하겠네."
위스키를 홀짝인 록펠러가 물었다.
"그나저나, 예쁜가?"
"쿨럭."
한국도, 미국도.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면 남자는 같은 대답을 뱉을까? 10대도 20대도 30대도 40대도, 록펠러와 천혁수와 같은 나잇대에도 터져나오는 공통질문.
록펠러의 질문에 천혁수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내고는 말했다.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재혼을 생각했을 만큼."
"커험..."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혜도 있는 여인들이더군, 마음도 예뻐. 의료 봉사단의 일원들이라고 하더군."
"의사들이라는 말인가?"
"그래, 마음도 머리도 몸매와 외모까지 완벽한 여인들이지."
"커험."
헛기침을 크게 뱉은 록펠러가 만족했는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묻는다.
"그래, 어떻게 도와줄까?"
"주지사를 비롯한 미국에 영향력 있는 몇몇이 죽은 일이네."
"그렇지."
"놈들이 죽은 이유가 그런 더러운 이유라면, 미국 입장에서도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닐 것 같군."
"아무래도 이미지에 타격이 있겠지."
"그러니 조용히 묻어버리는 쪽으로 합의를 보는 게 어떻겠나? 파나마 정부에도 압박을 좀 하고, 경찰들이 조사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말이네."
록펠러가 전화기를 꺼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대충, 자네가 영웅이 되면 된다는 얘기군."
"그렇다면야 더 좋고."
"알겠네,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군."
천혁수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록펠러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록펠러, 늦은 시간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프레지던트, 오랜만입니다?"
-하하 늦은 시각의 록펠러씨의 전화라니 떨리는 군요, 무서운 용건은 아니기를 빕니다.
"곧 회담때문에 한국으로 출국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 전에 꼭 처리해주셔야 할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음, 우선 들어보겠습니다.
록펠러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파나마에서 미국의 정계 인사 몇이 죽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록펠러의 말을 들은 부쉬가 메모지를 끄적이는 소리일 터.
"조사를 해 보면 알겠지만 놈들은 더러운 짓거리를 하다가 범죄조직 소탕에 관련되서 죽은 겁니다."
-더러운 짓이요?
"입에 담기도 뭣한 짓거리니 그 부분은 직접 알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으음, 예 알겠습니다.
"범죄조직을 소탕한 인물은 대통령께서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설마, 천 회장의 그랜파?
"맞습니다. 현재 나와 파나마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지요."
-으음... 그가 범죄조직과 뭔가 모종의 거래가 있는 듯 하다는 뉴스는 봤습니다만.
"SKY PMC에서 상세한 상황을 팩스로 넣어줄겁니다."
다시 한 번 수화기 너머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철웅이 보낸 팩스를 받은 모양.
-지금 막 팩스를 받았습니다.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시지요."
록펠러는 천혁수와 건배를 하며 다시 고급 위스키의 향과 목넘김을 즐기고 있었다.
간간히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대통령의 입에서 욕설 비슷한 것이 터져나왔다.
-후우... 이게 사실입니까?
"CIA가 조사하면 금방 사실관계를 확인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까드득... 국제적인 개망신을 공화당 의원이 하고 있었군요.
"주지사도 있습니다만."
-크흠... 이건 우리 미국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쪽에서도 싫어 할 만한 뉴스군요.
"그 부분은 대통령께서 알아서 사용하시지요."
록펠러의 말은 외교적 무기로 사용해도 좋다는 얘기였다. 일종의 서비스 같은 느낌.
그 말을 듣고 있던 천혁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역시 자네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오, 과연... 알겠습니다. 그럼 미스터 록펠러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파나마 정부에게 여기 앉아있는 나의 사돈이자 친우인 천혁수를 영웅으로 만들라는 압박 정도가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사실관계가 보도된다면 파나마 정부 역시 좋을 것 없을테니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대충 인신매매 및 마약류 범죄를 일삼던 조직을 일망타진한 한국의 정치인 정도로 포장을 하면 되겠군요.
"예, 맞습니다."
부쉬 역시 정치인이기 때문인지 천혁수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었다. 록펠러에게 천혁수가 손가락 3개를 펼쳐서 보여준다.
"3일 뒤 쯤에 뉴스가 보도되면 완벽하겠군요."
-알아 들었습니다. 주신 무기는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편하신대로."
-그럼 조만간 뵙지요?
"영광일 뿐입니다."
***
한국과 북한, 미국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는 날, 볼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할 일이 벌어지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들은 회담장이 아닌 공항으로 몰려 들었다.
아직 회담개최 시간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현재 공항의 언론인들의 수는 거짓말을 조금 하자면 개미떼 같았다.
"자자, 정숙해주세요, 정숙. 기자회견 진행에 방해가 됩니다!"
사회자가 작은 단상위로 올라 따로 정리를 해야 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린 공항 앞 기자회견 장.
나는 결국 인파때문에 입국 게이트 내부까지 들어가서야 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난리구나."
"그러니까요, 누구 때문에 말이죠."
"난 준비 되었으니 가자."
"오, 어떻게 팔굽혀펴기라도 몇개 하고 갈까요?"
내 농담에 할아버지는 피식 웃는다.
"이 놈아 그거 안 해도 충분하다."
"오오~ 자신감!"
게이트의 문이 열리고 어마어마한 인파를 막아서는 경찰병력들과 PMC의 대원들.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기자회견이 열릴 단상위에 올라갔다.
기자들이 악다구니를 쏟아내며 질문을 던지지만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할아버지는 쾅! 하고 단상을 내려치고는 입을 열었다.
"일부 언론들이! 또 이 천혁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자들이 저를 음해하고, 매도하기 위한 허위 기사들을 마구마구 유포하고, 재생산 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에 대하여 비통함을 먼저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는 단상 앞으로 걸음을 옮겨 마이크도 없는 생목으로 말했다.
"총을 맞았냐 안 맞았냐! 테러를 당했느냐 안 당했는냐! 지금부터 그 증거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정장 상의를 벗어 던지고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와이셔츠를 찢어버렸다.
쫘아아악.
단추가 이리저리 비산하고 기자들의 짧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어서 플래시 세례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팔을 들어 어깨춤에 있는 흉터를 가리키며 말을 잇는 할아버지.
"구멍이 두 개지요?"
< 제 24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