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3화. >
천혁수가 천천히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 나이프를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보던 노인은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스탑! 스탑 플리즈!"
능숙한 영어.
영국식 발음.
제법 성공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하는 놈이더냐?"
천혁수의 영어로 된 질문에 화색이 되는 놈.
뭔가 동질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살 수 있을거란 착각을 하는 듯 보였다.
"이, 이보시게 나는 미시간주 주지사 윌리엄 톰 앵그스네."
"주지사?"
천혁수가 놀란 모습을 보이니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 그렇네"
"이곳에 온 목적은?"
"자, 자네와 같지 않겠나?"
피식 웃음을 흘리는 천혁수.
고개를 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전혀 다를 것 같은데?"
살벌하게 번들거리는 천혁수의 눈을 본 주지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돈을 원했나? 아니면 이 조직과 반대편에 선 조직인가? 무엇이든 내가 도움을 주겠네!"
다급하게 외치는 그.
"도움이라... 거기엔 보상이 필요하겠지?"
천혁수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자 들어올렸던 두 팔을 스륵 내리고는 말했다.
"분기별로 일주일씩, 아이들만 공급해주면 돼. 절대 비밀을 보장해주고, 난 그거면 충분하네."
"역시 그런거군."
천혁수가 반쯤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던 주지사의 가슴팍을 밀어 찼다.
뒤로 벌러덩 넘어져 다시 양팔을 앞으로 뻗는 주지사.
"아, 안돼! 자, 잠깐! 잠깐! 아이들을 공급하면 나도 그에 따른 보상을 넉넉하게 지급하겠네! 그러니까 잠깐! 잠까아아아안!"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보지만, 50년을 넘게 단련에 단련을 거듭했던 천혁수의 완력을 이기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철컥.
두두두두.
때마침 연회장이라 부르기 어색한 공간의 커다란 나무문이 열리며 검은색 정장을 빼 입은 경호원들이 진입했다.
"여기야! 여기!"
주지사는 살았다는 듯 다급하게 외치고, 그 목소리를 들은 경호원들은 시야가 가려지기 시작하는 연막 속에서 정확하게 천혁수와 주지사의 실루엣을 확인한다.
천혁수는 피식 웃으며 주지사 놈의 허벅지 대동맥을 향해 강하게 스테이크 나이프를 찔러 넣는다.
푸욱.
"끄아아아악!"
주지사의 별명에 막 움직이려는 경호원들.
그들의 무장은 고작 삼단봉이 전부였다. 이 저택의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무장을 해제했기 때문이었다.
"멈춰."
경호원들의 뒤통수에 들려온 낮은 음성.
그곳엔 어느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군용대검 하나를 들고 있는 철웅이 서 있었다.
천혁수는 신음을 흘리는 주지사를 뒤로 하고 느긋하게 피로 물든 하의를 툭툭 털어내고는 포크 하나는 더 집어든다.
"오랜만에 놀아보자구나."
금방 한 곡조라도 뽑아낼 것 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웃음을 흘리는 천혁수.
철웅은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가장 앞에 선 이름 모를 경호원의 목을 사정없이 찔러 버렸다.
***
록펠러가 침을 꿀꺽 삼키고 타는듯한 갈증을 참기 어려웠는지 습관적으로 술잔으로 손을 뻗어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천혁수가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 보고는 말한다.
"보시다 시피, 워낙 관절이 낡아서 예전같지 않더군."
"멀쩡해 보이네만, 여기저기 긁히긴 했지만."
"파핫, 예전이었다면 긁히지도 않았을 걸?"
"주지사란 놈은?"
"요단강을 건넜겠지."
"쯧쯧, 더러운놈들 그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뭘 하겠다고."
"별이가 생각나서 참을수가 없더군."
"잘했네, 죽어도 싼 놈들이야."
둘은 이상한 부분에서 의기투합하며 건배를 나눈다.
"자 이어서 해보게, 아직 이 속옷의 주인은 등장하지 않았거든."
록펠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천혁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거짓말을 조금 보태 연막탄의 연기가 핑크빛으로 뿌얘질 만큼, 연회장 내부는 피바다가 되었다.
분명 천혁수가 입고 있던 정장은 흰색에 가까웠으나, 어느새 그의 정장 역시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숫제 와인에 담궜다 뺀 것 처럼.
"되구나."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는 천혁수에게 다가온 철웅, 군용대검을 품에 갈무리 하고는 천혁수의 상처들을 먼저 살폈다.
삼단봉을 주 무기로 쓰던 경호원들이지만, 스테이크 나이프와 포크를 주워들어 휘둘렀기에 여기저기 찔리고 베인 상처 역시 존재하고 있었다.
"심각한 상처는 없습니다 백부님."
"끌끌, 그래야지 저런 놈들에게 당해서야, 어디 천혁수라 할 수 있나."
그래도 가쁜 숨은 숨길 수 없었다.
철웅은 피식 웃으며 어느새 바깥에서 들리는 총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걸 천혁수에게 상기 시킨다.
"바깥도 대충 정리가 된 듯 합니다."
"그래? 그럼 가 보자, 위치는 파악 했겠지?"
"예, 백부님."
자리에서 일어서던 천혁수가 잠시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살피다 말했다.
"이 모습으로 가면 귀여운 로제나가 두려워할지도 모르겠구나."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어느새 천혁수는 아침에 로제나를 만났을 때와 같은 복장을 하고는 저택 내부를 천천히 걸었다. 그의 주변에는 PMC 대원들이 완벽한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저택 내부 지하에 꼬불꼬불 미로와 같은 곳이 등장하고, 그 미로의 중간중간 작은 방에는 수많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갖혀 있었다.
"대부분 납치를 당했거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부 아이들의 경우, 빚을 갚지 못한 부모들이... 판매한것으로 보입니다."
"쯧쯧, 조세피난처가 더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또 새롭구나. 모두 풀어주거라, 자유롭게 살도록."
"예, 백부님."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무장한 PMC대원들을 보고는 겁을 먹지만, 상냥한 말투로 설명하는 대원들의 진심에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원한다면, 천가인재양성소로 보내준다고 해. 지부를 차려서 지원자를 받아."
"예, 백부님."
"로제나는 어디있지?"
철웅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을 잇는다.
"특상품의 경우, 내부 보안시설에서..."
'상품'이라는 단어에 천혁수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지독한 놈들이구나."
철웅은 별다른 대답없이 빠르게 천혁수를 안내했다. 내부 깊숙한 곳, 총성도 닿지 않았는지 그 앞에는 당황한 얼굴의 경비들이 PMC대원들과 천혁수를 맞이 했다.
"저곳이더냐?"
"예, 백부님."
철웅의 확답을 듣자 마자, 총으로 무장한 경비들에게 빠르게 쇄도하는 천혁수.
철웅이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현재 천혁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경비들의 총구가 천혁수에게 향하고, PMC대원들의 총구 역시 놈들에게 향했다.
막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경비의 목에 이미 천혁수가 던진 군용대검이 꽂혔다. 이어서 다른 경비놈의 총구를 붙잡아 위로 들어올린 천혁수가 그대로 경비의 턱주가리를 사정없이 갈겨버린다.
총을 포기한 경비가 품에서 쿠크리를 빼 들고는 마구 휘두르지만 천혁수에게 닿지는 못했다.
훌쩍 뒤로 물러난 천혁수가 아직도 간헐적으로 피를 내뿜고 있는 다른 경비놈의 목에 박힌 대검을 꺼내 들어 휘둘러 오는 쿠크리를 막은 뒤 그대로 어깨로 들이 받아 경비를 쓰러뜨린다.
푹, 푹.
명치에 한방, 그리고 목에 한방.
대검을 비틀어 뽑은 천혁수가 칼을 버리며 말했다.
"이건 버리거라, 더러운 피가 묻었어."
"예, 백부님."
두꺼운 철문 안으로 작은 철창이 보였고, 그 안을 쳐다보는 천혁수.
갱단이 '특상품'이라는 표현을 하는 곳 답게 안쪽에 있는 여인들과 아이들은 사람의 시선을 뺏는데 재능이 넘치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속, 로제나를 찾은 천혁수.
"로제나."
천혁수의 부름에 흠칫 놀라는 여인들과 아이들.
로제나는 고개를 들어 천혁수와 눈을 마주친다.
그러고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로제나의 눈은 반가운 얼굴을 만난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공포를 담은 눈이었다. 결국 소녀의 눈에는 천혁수 역시 다른 변태놈들과 같아 보이는 모양.
그것이 오히려 천혁수를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철문이 열리고, 그나마 나이가 있는 여인들은 아이들을 빠르게 등뒤로 숨긴다.
"오지마 이 악마 같은 새끼들아!"
여인 하나가 가장 앞에 서서는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플라스틱 조각.
아마도 칫솔을 부러뜨려 만들어낸 것 같았다.
"구해주러 왔다."
"지랄하지마, 남자 새끼들은 다 똑같아."
쓰러져 있는 경비들, 그리고 흐르는 피가 어느새 방 안에까지 번져오고, 여인들과 아이들의 공포심은 극에 달아 있었다.
"무장해제 해."
PMC대원들은 물론 철웅까지 모든 무장을 품에 갈무리 했지만 그래도 불안은 끝나지 않은 모양, 천혁수는 양팔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칫솔 조각을 가지고 있는 여인에게 접근했다.
"로제나를 구해주러 왔을 뿐이다."
로제나는 그 여인의 등 뒤에서 란제리 원피스를 꽉 쥐고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 오지마! 머, 멈춰!"
천혁수는 계속 앞으로 걸었고 여인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날카롭게 변한 칫솔 조각을 천혁수를 향해 내질렀다.
푸욱.
살갖을 파고드는 이상한 감각에 화들짝 놀라 칫솔 조각에서 손을 뗀 여인. 그녀가 눈을 뜨자 천혁수는 고통에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구해주러 왔을 뿐이다."
어깨춤을 파고든 칫솔 조각은 건드리지도 않은 천혁수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여인의 뒤에 숨어있는 로제나를 불렀다.
"로제나, 장미 향이 좋더구나."
어쩐지 마음에 안정을 주는 것 같은 다정한 말투에 로제나가 고개를 기울여 천혁수를 바라본다.
"이 곳에서 같이 나갈까?"
아직도 두려운 눈을 지우지 못한 로제나.
"다들 나가 있어."
천혁수의 명령에 철웅과 PMC대원들은 경비들의 시체를 치우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시야에 사라지자 여인들과 아이들의 눈에는 피를 흘리고 있는 노인, 천혁수만이 보일 뿐이었다.
"동생들은 배불리 먹었니?"
천혁수의 말에 로제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동생들 없어요, 여기서 그렇게 해야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돈을 받지 않으면 때려요, 그래서... 그래서, 거짓말 했어요."
"그렇구나, 이제는 로제나를 때릴 사람도, 로제나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 나쁜 놈들도 없어졌단다."
"정말이요?"
"그럼, 정말이지. 앞으로는 이 할아버지가 로제나한테 못된 짓 하는 녀석들은 모조리 혼쭐 내주마."
천천히 두려움이 사라지는 로제나의 동공.
아침에 당돌하게 꽃을 사달라는 그 귀여운 눈빛이 되어 천혁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천혁수를 칫솔 조각으로 찌른 여인이 로제나의 머리와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로제나, 언니들이랑 친구들이랑, 잠깐 나가 있을래? 언니는 여기 할아버지랑 잠깐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이들 그룹의 리더격이었는지 로제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방을 벗어나는 여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리더로 보이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여인들이 두꺼운 철문을 그대로 닫는다.
철컥.
문이 닫히고 천혁수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인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천혁수를 두려움에 찬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고는 말했다.
"사내 새끼들은 다 똑같지... 네 놈들은 다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야."
"음... 그 부분은 내가 해줄 말이 없군."
뭔가를 결심한 듯, 여인은 원피스 안으로 양 손을 넣는다. 그리고는 이내 속옷을 벗어 오른손에 꽉 쥐고는 말했다.
"어린아이들 말고, 나로 만족해... 아이들은 건드리지 마."
그러고는 천천히 작은 침대위에 앉는 여인.
천혁수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두눈을 질끈 감는 여인.
천혁수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오른손을 잡자 부르르 몸을 떤다.
"이건 날 찌른 사과의 의미라 생각하지."
오른손에 꽉 쥐고 있던 여인의 속옷은 어느새 천혁수의 손에 들려있었다.
다시 눈을 뜬 여인의 얼굴에는 의문이 피어 오르고, 천혁수는 속옷으로 어깨에 박혀있는 칫솔 조각을 잡아 그대로 뽑았다.
칫솔을 대충 바닥에 버리고는 속옷으로 나오는 피를 막은 천혁수. 이내 뒤 돌아서더니 반대손을 뻗어 내밀며 말했다.
"가자, 자유를 주마."
여인의 두 눈에 파르르 파문이 일더니 이내 손을 뻗어 천혁수의 손을 잡는다.
철문이 열리고, 천혁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구나."
어느새 여인의 손에는 로제나의 손이 잡혀 있었다.
< 제 24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