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2화. >
천혁수의 말을 들으며 속옷을 쥐고 있던 록펠러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설마 이게?"
떨리는 동공으로 천혁수를 바라보는 록펠러.
고개를 저으며 답하는 천혁수.
"아니야, 사이즈가 아니잖은가."
록펠러가 양손으로 속옷의 사이즈를 한 번 확인한다.
"충분히 작아보이기는 하는데?"
"어허, 10살 여아가 무슨 란제리인가."
"그건 또 그렇군."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얘기에나 집중하시게."
"크음, 그러지. 계속 해보시게 지금 한창 흥미진진하니."
천혁수가 빙그레 웃으며 글랜피딕 위스키를 들이켜고는 말했다.
"자네부터 만년필 얘기를 해보지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이미 만년필은 테이블 위에 보이지도 않았다.
"됐네, 자네 선물이 누가 봐도 더 진심이잖은가."
"그럼 내기는 내가 이긴 것으로?"
"그래그래, 무조건 자네가 이겼어! 그러니까 말 돌리지 말고 이야기나 마저 하세."
얼른 듣고 싶다는 듯 눈을 빛내는 록펠러.
"우리 내기의 보상을 얘기하지 않은 듯 하군."
천혁수의 말에 팍 인상을 찌푸리는 록펠러.
"이 친구, 이 늙은이에게 얻어갈게 뭐 있다고?"
묘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이는 천혁수를 바라보던 록펠러가 그의 표정을 캐치하고는 묻는다.
"바라는게 있는 모양이군."
"하나 있지."
"흐음... 어쩐지 매우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인데?"
"우진이 녀석은 자주, '소원 들어주기'내기를 하더군."
"자네도 소원을 빌겠다?"
"그래."
"크음... 좋아 내기는 내기니까, 소원 들어주겠네."
천혁수가 만족스럽게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그럼 나도 자네 소원대로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이 사람, 아직도 시작하지 않았나?"
록펠러의 다그침에 천혁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로레나라는 어여쁜 여아와 함께, 주변에서 장미꽃을 팔던 아이들이 과연 다 탈수있나 싶은 작은 봉고차에 몸을 싣는다.
천혁수는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눈에 담으며 쪽지를 철웅에게 건넸다.
"무장이 필요하겠지?"
"으음... 구출 하실 생각이십니까?"
천혁수가 높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꼭 별이가 생각나지 않느냐."
"아무리 소란스럽기를 바랐다지만... 너무 큰 소란은 아닐까 우려됩니다."
"쯧,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로레나의 웃음을 보지 않았더냐? 여인의 웃음엔 보답을 해 줘야지."
철웅은 못내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바로 조사하고 준비하겠습니다."
"오냐, 몸 좀 풀어보자."
백철웅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이, 천혁수는 자리에 앉아 남은 모히또를 비웠다. 그 짧은 시간에 철웅은 일을 끝냈는지 다시 천혁수의 곁에 선다.
"날파리가 붙은 것 같구나."
철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전화를 하면서도 '감시의 눈'이 자신과 천혁수에게 닿아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아마도 제법 규모있는 놈들인 것 같았습니다."
"고위 인사들이나 부자들에게 뭔가 줄을 대고 있는 놈들인 것 같구나. 제법 조직적이야."
"예, 백부님."
천혁수가 플라스틱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판때기가 깔렸으니, 어디 한 번 놀아보자."
다시 해변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천혁수.
아름다운 해변에 흐뭇한 미소를 걸게 만드는 미녀들을 구경하던 천혁수가, 검은색 비키니가 몹시 잘 어울리는 육감적인 몸매의 백인에게 다가갔다.
"하이."
슬쩍 천혁수를 바라보는 여인. 단추를 채우지 않은 하와이언 셔츠 안으로 도저히 천혁수의 나잇대로는 보이지 않을 육감적인 근육들이 꿈틀거린다.
"하이."
천혁수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여인은 이내 인사를 받아준다. 눈치껏 뒤에서 아이스박스를 들고 따라온 철웅은 그의 손짓에 아이스 박스를 열어 시원해 보이는 모히또를 꺼낸다.
"한 잔 할래?"
천혁수의 물음에 여인은 베시시 웃으며 술잔을 받아든다.
이내 따사롭다 못해 뜨거운 해변 아래 육감적인 여인과 천혁수의 데이트는 시작되었고, 그 장면을 몰래 촬영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천혁수는 의도했는지 개의치 않는다.
***
[ 천혁수 후보자! 파나마에서 범죄조직과의 거래! ]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함께 공개된 사진 속에는 확실히 질 나빠 보이는 놈들에게 돈을 건네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기자 놈들이 겨우 이틀새에 제법 노력을 했구나 싶었다.
[ 천혁수 후보자! 파나마운하의 한 해변에서 매춘부를 만나다? ]
역시나 자극적인 헤드라인이고 아름다운 해변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회장님, 회의 준비 됐습니다."
"그래요?"
"예."
호석의 말에 보고 있던 신문들을 내려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조선일보는 물론 동북아일보에서 쏟아내는 자극적인 기사들은 곧, 다른 언론사와 뉴스를 통해 도배 될 것이 분명했다.
"내일은 집에서 쉴까봐요."
내 말에 호석이 피식 웃는다.
"다행히 이번에는 부채질은 하지 않으실 모양입니다."
"할아버지가 워낙 자극적으로 잘해주고 계셔서 말이죠."
"이 여론을 한방에 잠재울 그 무기라는 거, 몹시 궁금합니다 회장님."
"글쎄요? 모레 정상회담 전에는 알게 되실걸요?"
"크음."
내가 얘기해 줄 마음이 없다는 걸 아는지 호석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회의실로 날 안내 할 뿐이었다.
세간이 시끄럽거나 말거나, 할아버지가 욕을 먹거나 말거나, 또 내가 욕을 먹거나 말거나.
회의실 내부에 SKY그룹의 중역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눈으로 내게 인사한다.
"자, 회의 시작하죠."
내 선언과 함께, 회의가 시작되었다.
***
"아, 이 사람! 왜 거기에서 쓰잘데없이 벨라루스 미녀 얘기가 튀어나오는가? 그 미녀가 검은색 비키니를 입었든, 란제리를 입었든 관심 없으니, 그 로레나 이야기나 계속 하시게, 이 속옷에 묻은 피가 그 벨라루스 미녀의 피는 아니잖은가!"
천혁수는 재미있다는듯 '큭큭'하고 한참을 웃다 계속 다그치는 록펠러를 다독였다.
"어허, 이 사람 진득하게 듣지 않고 자꾸 말 끊을겐가?"
"아니, 이야기가 산으로가니 하는 말 아닌가."
"다, 필요한 과정이란 얘기야. 그 더러운 갱단놈들이 내게 감시자를 붙인 줄 알고 한량처럼 움직였을 뿐이네."
"이 사람, 벨라루스 미녀가 마음에 든 것은 아니고?"
"이왕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는가?"
"됐고, 그 부분은 짜르고 본론으로 들어가세."
"쯧, 자네가 그녀를 봤어야 해."
"거참, 알았대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천혁수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
파나마의 망망대해 위, 고급 요트의 침실.
전라에 천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지쳐 잠이든 벨라루스 미녀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더니 갑판으로 나갔다.
철웅은 편안하게 누워 선셋을 감상하다 천혁수가 올라온 것을 느끼고는 준비된 서류를 건넸다.
"이게 그 놈들이야?"
"예, 백부님. 파나마 정부 고위 인사들에게도 비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류를 넘기던 천혁수는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더러워도 정도가 있지... 하여간 조세피난처 놈들은 하나 같이 쯧."
"해외 여러 국가의 부호들 역시, 변태적인 성욕을 위해서 자주 방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갱단 놈들은 그걸 또 약점으로 돈을 뜯어내는 모양이군."
"예."
"쯧쯧 그것도 모자라 장미꽃으로 구걸까지 시킨다?"
백철웅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일부러 부호들에게 쉽게 접근시키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하, 일부러 노출 시키고 걸려드는 피쉬들을 낚시했다?"
"예."
"오늘 그 낚싯바늘로 날 잡은거고?"
"정확히는 잡혀주셨다고 보여집니다."
피식 웃은 천혁수가, 붉게 물든 망망대해 위 선셋을 보며 말했다.
"준비 되었겠지?"
"예, 바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잠 많은 미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움직이지."
"예, 백부님."
정부고위 인사들의 변태적인 성욕은 물론, 부호들의 변태적인 성욕까지 돈 벌이로 노리고 있는 갱단 답게, 파나마 운하라는 파나마의 최대 관광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의 아지트가 있었다.
커다란 리무진이 대저택으로 꾸며져 있는 아지트에 들어서자, 무장을 한 갱단의 경비들이 서둘러 달려와 문을 열어준다.
흰색에 갈색 줄무니가 있는 얇은 더블버튼 수트를 입은 천혁수가 차에서 내려 시가를 입에 문다.
"오늘 여기서 파티가 있어서 말이야."
능숙한 스페인어로 얘기하는 천혁수.
갱단의 경비들은 피식 웃으면서 안쪽으로 안내한다.
천혁수는 품에서 백달러짜리 지폐 두장을 꺼내 놈들에게 한장씩 주고는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들어간다.
놈들은 자신감이 넘치는지 천혁수의 몸을 수색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히끗한 노인인지라 겁나지 않는 모양.
천혁수와 낮에 마주쳤던 그 양아치가 그럴듯한 턱시도를 입고는 나타나 마치 여느 저택의 집사처럼 예의바른 태도로 천혁수를 내부 홀로 안내한다.
-딴~ 따라란~ 따라디리라라라~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는 내부 홀에는 천혁수와 비슷한 나잇대의 인사들도 있었고 더 젊은 인사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오늘 날을 잘 잡으셨습니다?"
"내가?"
"원래 이곳은 자격이 되는 VVIP들에게만 열리는 경매장인데, 마침 동양의 지도자께서 자격이 되어서 말입니다."
"날 아는가?"
양아치 놈은 사전에 제법 조사를 한 모양.
"고객의 취향을 알아야 최고의 대접을 하지 않겠습니까?"
천혁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서 드레스 코드가 있었군, 그런데 어쩌지? 난 경매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양아치 놈이 그럴리 없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한다.
"오늘 고객님께서 만족스럽지 않은 경매라고 하신다면, 제 목을 내 놓겠습니다."
"자신만만 하군."
천혁수의 귓가로 더러운 입을 가까이 가져간 양아치 놈이 말했다.
"노예 경매, 언제나 매력적이죠."
천혁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그리고는 양아치놈은 알아 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읊조렸다.
"지랄이 살어리낫구나."
"예?"
"아니야, 어디 구경이나 하지. 그나저나 저치들은 누구인가?"
다른 '고객'들을 턱짓하며 물은 천혁수.
"이곳에 오는 모든 고객들의 신상은 비밀이라, 궁금하시면 직접 대화를 나눠보시죠."
"됐네, 딱히 자랑 할 일도 아니고."
양아치놈과 대화가 끝날 즈음. 클래식이 연주되던 무대 위로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올라오더니 웃기지도 않은 유머를 던지다 어느새 연주자들이 사라지자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첫번째 순서! 후우, 정말 순결을 지키게 하며 키우느라 애 먹었습니다! 백옥처럼 순결한 피부, 에메랄드 빛 아름다운 동공! 경험이 없어 가르치는 맛이 있을 겁니다."
사회자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이내 속이 훤히 비치는 란제리 원피스를 입은 딱 봐도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여인이 무대 위에 오른다.
"호가는 3천달러부터! 다들 아시겠지만 완전구매는 최종낙찰가격의 30배! 그럼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천혁수가 양아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완전구매?"
"하루 대여 말고, 완전한 사육이 가능하다는 얘기죠."
"정말 노예군."
"주인님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어여쁜 노예들이지요."
"이거, 일이 점점 커지는 군."
"아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여도 얼마든지, 고객들의 자유를 보장하니까요."
피식 웃은 천혁수가 말했다.
"전화를 써도 되겠는가? 총알이 부족해서 말이야."
"얼마든지요."
품에서 전화를 꺼낸 천혁수.
-예, 백부님.
"그래, 역겨워서 참을수가 없구나. 바로 시작해야겠어."
-예. 바로 돌입하겠습니다.
"먼저 시작할테니, 철웅이 너는 천천히 오거라."
-백부님!
"이 놈아, 귀 안 먹었다. 아직 멀쩡해."
-위험합니다!
천혁수는 스테이크를 썰라고 준비해 둔 나이프를 들어올려 양껏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양아치를 바라보았다.
"빨리 오거라."
-제기랄, 바로 돌입ㅎ......
전화를 품에 넣은 천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아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 총알이 곧 도착한다는데, 너는 좀 아프게 갔으면 좋겠구나."
이내 손에 들린 나이프가 양아치 놈의 왼쪽 귀를 사정없이 베어버린다.
"끄아악! 이, 이게 무슨!"
쨍그랑, 쨍그랑.
곳곳의 유리들이 깨지며 내부로 들어온 연막탄들.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당.
바깥에서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지고 천혁수는 재빨리 움직여 양아치놈의 양쪽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린다.
"이따 다시 보자구나."
이어서 놈의 양쪽 손목의 근맥까지 끊어버린 천혁수. 혼비백산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간 자칭, 타칭 '고객'놈들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 제 24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