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1화. >
피가 묻은 팬티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헛웃음을 흘리는 록펠러.
"처녀를 만나고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슨일인가 수."
천혁수는 록펠러가 마시던 모히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자놈이 말하기를 최대한 소란스럽게 놀아보라고 하더군."
"우진이?"
"그래."
"허."
록펠러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소란'이라는 귀여운 단어와 현재 천혁수의 상태는 매치가 되지 않았다.
소란이란 단어보다는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에서 탈출한 것만 같은 모습.
"갱단이랑 몸싸움이라도 한 상태로 보이네만."
어깨를 으쓱이는 천혁수.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록펠러가 '쯧'하고는 자신이 받아온 만년필을 내려다보다 대충 던져버리고는 피가 흥건한 팬티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디, 사연이나 들어보지."
천혁수는 천연덕스럽게 모히또를 모조리 비우고는 말했다.
"밤이 길겠구만, 좋은 술이 필요 하겠어."
피식 웃음을 흘린 록펠러가 인터폰을 누르며 말했다.
"여기 글랜피딕 온더락으로 올려, 시원하게."
"시원한 모히또 대량으로 올리라고도 해주시게."
"들었지?"
-예.
"올려."
천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록펠러가 어딜가냐는 듯 그를 바라본다.
"이 사람 참, 이 꼴로 얘기하긴 그렇잖은가."
천혁수의 핀잔에 록펠러가 별 수 없다는 듯 시가를 입에 문다.
"얘기, 기대하고 있겠네."
"씻고 오지."
***
아침 출근길부터 인상을 찌푸릴수밖에 없을 상황이 펼쳐졌다.
차고의 문이 열리는 순간, 벌떼와 같은 취재진들이 차량 앞을 가로 막는 상황.
물론 우리 PMC의 대원들이 사전에 이 상황을 몰랐다면 거짓말.
"아주 피라냐 새끼들처럼 뭐 처먹을 거 없나 하고 기웃거리네요."
내 핀잔에 피식 웃는 호석.
"바라시던 일 아니었습니까?"
"아침부터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다기에 그런거죠?"
호석이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부님께서 파나마에서 훌륭하게 놀고 계신 모양입니다."
내 말투를 흉내내는 호석. 나는 피식 웃다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며 차량에서 내려 취재진들 사이로 몸을 옮겼다.
"천우진 회장님! 지금 천혁수 후보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치료 후에 요양 중이라는 말씀은 거짓이었습니까?"
"파나마라는 휴양지에서 천혁수 후보자에대한 목격담이 계속해서 제보되고 있습니다. 해당 사실 인정하십니까?"
나는 할아버지가 요양중이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안전상의 이유로 거취를 밝힐 수 없다 얘기했을 뿐.
"현재 할아버지께서 파나마에 계신게 맞습니다. 아마 오늘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시지 않을까 싶군요."
제대로 물었다는 듯, 피맛을 본 피라냐 떼들은 더욱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현재 천혁수 후보자가 파나마의 갱단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사실입니까?"
"천혁수 후보자의 성매매 의혹이 사실입니까?"
"천혁수 후보자의 마약투약 혐의가 의심된다는 의혹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전혀 모르는 소식이었다.
소란스럽게 놀아달라는 요청을 너무나도 충실히 이행하셨구나 싶었다.
"이야, 제대로 노셨네."
"예?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기자들의 질문이 서로 맞물리며 내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모양.
나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파나마에서 할아버지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취재진들은 아직도 피냄새가 나는지 눈을 번들거리며 계속 질문을 쏟아낸다.
"파나마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는데 천혁수 후보자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혹자는 파나마 범죄조직과 사채업자 출신의 천혁수 후보자가 불법자금 관련된 전쟁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SKY그룹도 연루된 것은 아닙니까? 그룹의 시작 자금부터 논란이 많았는데요? 투명한 경영을 말씀하시지만 몇몇 계열사의 자금상황은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지 않은데요,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불똥이 이제는 저기까지 튀는구나 싶었다.
어차피 요 며칠 여론은 SKY그룹과 나의 할아버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별로인 여론 상황, 아마도 이 인터뷰역시 오늘 밤 작위적인 내용으로 방송을 타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한 번 막말 논란이 붉어졌던 나다.
"자, 소설들은 알아서 잘 쓰시고, 길 좀 틉시다. 공사가 다망해서."
일부러 기자들을 더욱 자극하며 돌아섰다.
"천우진 회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
"천혁수 후보자의 현재..."
질문은 싸그리 무시하고, 그들이 원하는 떡밥은 던졌으니 충분하다 싶었다.
탁.
다시 차량에 오르는 사이, 어느새 나타난 대원들이 취재진을 깔끔하게 뒤로 물려놓은 상태.
차량은 부드럽게 움직여 SKY그룹 본사로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어우야, 갱단? 마약? 도대체 할아버지 뭐 하고 계신데요?"
호석 역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철웅이 놈도 아무런 얘기가 없었습니다."
"아주 손자 놈 말을 철썩같이 이행하고 계시네요."
"오전 회의 끝나기 전에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이지 할아버지가 뭘 하고 계셨던 것인지 나 역시 궁금했다. 아무리 소설 쓰기를 즐기는 기레기들이라고 해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질문들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라가 들썩여도 이상하지 않을 아주 자극적인 단어들이 가득했다.
가령, '성매매', '마약', '갱단', '범죄조직'과 같은 얘기들이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천혁수라는 내 할아버지가 사채업자 출신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지가 제법 깨끗하게 세탁되어 어엿한 '금융업종사자'처럼 포장되어있지만, '사채업자'라는 직업의 이미지가 좋을리 만무, 그것과 '범죄조직', '갱단'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만나니,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종일 전화기도 시끄럽겠구나 싶었다.
우우우웅, 우우웅.
벌써부터 품 속 전화기가 요란했다.
"여보세요."
-오빠!
우희였다.
그 수많은 취재진들 사이에서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던 내 구렛나루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 우희야."
-할아버지 어디가셨나 했더니, 마약? 범죄조직? 갱단? 총격전? 성매매?
단어의 나열만 들었음에도 벌써부터 앞이 캄캄했다.
"그, 나도 모르거든? 할아버지한테 전화해 볼래?"
-전화를 안 받아!
주륵.
뭔가가 흘러내리는 느낌에 설마 귀에서 피가 흐르나 싶어 손을 뻗어 닦았다.
다행히 땀이었다.
"내가 바빠서 말이야 우희야, 이따가 통화하자."
나는 다급히 휴대폰의 배터리를 뽑았다.
룸미러로 날 힐끗 훔쳐보고 있던 호석과 눈을 마주쳤다.
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호석.
"왜요."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는 호석.
"아닙니다."
"어후, 이런게 엄마 잔소린가요?"
"하하하, 마누라 잔소리 아닌게 다행 아닙니까?"
"아, 맞다 루시..."
속도 없이 날씨는 화창했다.
***
높다란 파도위에서 서핑보드에 의지해 중심을 잡는 일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파도가 속도도, 높이도 어마어마 한 놈이라면 더욱 그랬다.
어지간한 프로 서퍼가 아니라면 넘보기도 어려울 것 같은 파도 위에, 천혁수는 능숙하게 파도를 타며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바다를 즐긴다.
그것도 잠시, 나름 방수가 된다는 붕대와 패드등을 붙이고 있지만 소금물이 조금씩 흡수되며 살갖이 따가운 느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바다 밖으로 나왔다.
경호원들과 함께 동행하는 SKY PMC의 전문 의료진에게 새로 상처를 드레싱하고는 붕대를 감은 천혁수.
PMC대원들과 의료진은 천혁수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마치 그림자처럼 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지고, 천혁수는 하와이언 셔츠로도 우락부락한 근육을 감추지 못하는 철웅과 함께 해변을 거닐어 적당한 노점상 앞에 도착했다.
"여기 뭐가 유명해?"
천혁수의 질문에 철웅은 가이드처럼 말했다.
"이쪽은 역시 시원한 칵테일 아니겠습니까?"
"좋지, 독한 놈으로."
"예."
철웅이 칵테일을 주문하러 간 사이, 간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천혁수에게 작고 깜찍한 소녀가 리본이 달린 커다란 비치모자를 덜렁거리며 다가와 장미꽃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에서 꽃을 하나 꺼내 천혁수에게 건넨다.
"음?"
천혁수가 물끄러미 소녀를 내려다보니, 소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1, 1달러... 기브미 1 달러."
어눌한 발음의 영어.
그녀가 현지인임을 알 수 있었던 천혁수.
천혁수가 어색함 없이 입 밖으로 에스파냐어가 튀어나온다.
"꽃을 사달라고?"
동양인이 자신들의 말을 하니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특유의 똘망똘망한 눈으로 천혁수를 올려다본다.
"싫다면?"
"아, 안돼요! 동생들이 밥을 굶어요."
"내가 꽃을 사지 않으면 동생들이 밥을 굶어?"
"네."
슬쩍 고개를 들어올린 천혁수가 멀리서 껄렁한 자세로 선그라스를 쓰고는 담배같은 것을 물고 있는 사내들을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소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돈을 주면 저기 저 놈들에게 돈이 갈 것 같은데?"
소녀는 당황한 듯 동공을 떨었다.
그의 말이 정답이기 때문.
"거, 거짓말 아니에요! 로레나는 거짓말 하지 않아요!"
천혁수의 눈에는 팔을 크게 들어올린 소녀의 상박 안쪽에 커다란 흉을 놓치지 않았다. 흉터는 아마도 등까지 길게 이어져 있으리라.
"흐음."
천혁수가 손가락을 두들기며 주변을 훑는데, 여기저기 어린아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장미꽃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다가온 철웅은 시원한 칵테일과 핫도그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음, 이곳에서는 흔한일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장미를 파는게?"
"한국에서 구걸을 하는 아이들이나 장애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죠."
"뒤쪽에는 거머리 같은 놈들이 있고?"
"예."
천혁수가 다시 소녀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품에서 달러를 꺼냈다.
"몇 송이냐."
"네?"
"그 바구니 속 장미가 전부 몇 송이냐고."
"어어, 어어."
소녀는 까치발을 들어 간이 테이블 위에 꽃 바구니를 올려 놓고는 한 송이 한 송이 어렵게 테이블 위에 늘어놓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천혁수는 픽 웃어버렸고 철웅 역시 평소의 무표정과 다르게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키가 작아 꽃이 잘 보이지 않는지 까치발을 들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를 안아 든 천혁수.
"자, 이제 잘 보이지?"
꽃을 세느라 바쁜 소녀는 천혁수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연신 손가락을 움직이고 그걸로도 모자라 발가락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스물 네 송이요!"
웃으며 한 손으로는 소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현금뭉치에서 백달러짜리 지폐를 꺼낸 천혁수.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백달러짜리 지폐와 천혁술을 번갈아 바라본다.
"거, 거스름돈은 없는데!"
"괜찮아, 오늘은 동생들과 맛있는 것을 사 먹거라. 로레나?"
"고마워요!"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는 로레나.
"꼭 우리 별이가 이렇게 컸으면 좋겠구나 철웅아."
"하하, 별이는 더 예쁜 아이가 될 겁니다."
"그럴까?"
흐뭇하게 웃는 천혁수에게 다가오는 파나마 양아치들.
"어이, 노인네 그쪽 취향인 모양이지?"
로레나라는 소녀와 천혁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음흉한 표정을 짓는 놈들.
놈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을떠는 로레나를 그대로 느낀 천혁수는 불쾌함을 느꼈으나 소녀를 위해 표정을 관리했다.
"천 달러를 준다면 로레나를 노인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지, 어때? 생각있나?"
"......"
철웅의 표정은 어느새 싸늘하게 굳었다.
드르륵, 플라스틱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철웅.
천혁수는 가만히 소녀를 내려 놓고는 철웅의 어깨를 두들기고 놈들에게 말했다.
"그거 솔깃한 제안이군."
양아치 놈들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마치 그럴줄 알았다는 얼굴.
천혁수는 현금 뭉치를 손에 들고는 지폐를 세며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좀 볼 수 있나?"
"오호, 노인네 보기보다 정력적인가봐?"
"이왕이면 여럿이면 좋겠지?"
저들끼리 낄낄 거리며 웃던 양아치 놈.
이내 칵테일잔을 바치던 누리끼리한 티슈 위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천혁수에게 건넨다.
"여기로 와, 노인네들이 좋아할 야들야들할 아이들이 많으니까, 인종도 다양하다고?"
티슈 위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천혁수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놈에게 백불 지폐 수십장을 건네며 말했다.
"아이들을 좀 씻기고, 배불리 먹여 놓으라고. 곧 찾아가지. 이건 선불 계약금."
"오, 확실하게 처리하지."
놈들이 싱글벙글 로레나를 끌고 천혁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로레나는 소리없는 절규를 천혁수에게 보내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 제 24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