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40화 (240/458)

< 제 240화. >

전화를 끊고 호석을 찾았는데, 이미 그는 퇴근 한 뒤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7시를 훌쩍 넘긴 시간. 호석이 퇴근한 것도 대충 이해는 갔다. 나이라는 것의 한계에 의해 늦둥이 만들기 프로젝트가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는 모양.

처음에는 마냥 싫은 것 처럼 보이더니, 이제는 제법 호석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나질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가장이란 존재는 가정에 충실했을 때, 만족감과 행복감을 얻는가 싶기도 했다.

미국을 떠나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벌써부터 태양이와 별이가 보고 싶은 걸 보니, 나도 제법 그럴듯한 가장이 되었나 싶었다.

"예, 할아버지."

-바쁘다 이놈아.

"아니 시국이 시국인데, 파나마를 놀러가고 그러셨어요?"

-음? 내 행적까지 보고 받는게냐?

"대통령이 알려주던데요, 할아버지 파나마 입국하셨다고?"

-크흠, 대통령께서?

"예, 지금 국내 언론이 시끄럽거든요? 뭐 몇몇 언론이기는 한데."

-왜? 내가 안 보여서?

"그것도 그렇고, 총상 입었다는 사람이 치료기록이 없다면서요."

짧고 뭉뚱그려서 말한 설명이지만 할아버지는 완전히 알아 들으신 모양.

-하하, 돈귀신들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구나.

"예, 전경련 입김이 닿았겠죠?"

-쯧쯧 하여간 더러운 수법은 지지를 않지. 그래서 네 놈도 내게 주의를 주고자 전화했더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감히 손자가 되어서 할아버지에게 주의를 주다니, 유교사상이 찌든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 감히 그럴수야 있겠는가.

"설마요."

-음? 그럼?

의아한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 할아버지.

"더 크게, 소란스럽게 노세요."

-뭐라?

"이왕이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것도 좋겠네요."

-...

짧은 침묵이 이어지다 이내 피식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이 놈이 또 음흉한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

"시끄러우면 시끄러울수록 반대급부도 올라가는 법이죠."

-한방에 역전 시킬 비장의 무기가 있는 모양이구나.

"있죠."

-그것이 무엇이더냐.

"그건 비밀로 할게요."

-또, 또.

"술 드시는 건 좋은데, 몸 관리는 하면서 드세요?

다시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내려 앉는다.

-내 짐작이 맞느냐?

"아마도요?"

-하, 딴따라도 아니고 쯧.

"정치인이면 딴따라 저리가라죠."

-쯧쯧 말년에 대운이 들어 선다더니, 이건 대운이 아니라 대흉이 들었나보구나.

"말년까지 아직 머셨거든요? 한 20년 뒤에나 말년 얘기 하시는걸로."

-쯧, 무슨 얘기인지 알았다. 전세계 최초로 누드 대통령 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군.

"그건 그거대로 이슈겠네요, 명성좀 날리시겠는데요?"

-운동 강도를 좀 더 올려야겠구나.

"더운 나라에서 덧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오냐, 알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나잇대와는 어울리지 않게 젊음의 열기가 느껴진달까?

"어딘데 이렇게 시끄러워요?"

-이 놈아, 내기 때문에 바쁘니 끊자.

"무슨 내기인데요?"

-누가누가 더 인기있나 내기다.

"어휴, 주책이에요."

-크음, 둘다 싱글 아니더냐.

우리 할아버지가 유명한 난봉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기에서 할아버지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워낙 승부욕이 대단한 양반이니까.

"어쨌든 이기고 오시고, 소란스럽게 노시고."

-오냐, 아주 부채질을 하거라 방탕하게 놀다 오라고.

"그건 그거대로 좋겠네요."

-손주놈이 이렇게 응원 해주는데, 할애비가 따라줘야 함이 인지상정이지.

픽 웃음이 터질뻔했다.

명분 한 번 제대로다.

"언론에 익명으로 제보하겠습니다. 천혁수 후보자 파나마에서 방탕한 생활."

-크하하 자극적이구나, 국민들의 두 눈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그럼 수고하시고, 좀 위험한 것들은 건드리지 마시고요."

-어련히 알아서 할까.

"옙, 그럼 노세요."

-오냐.

***

고비 사막을 넘어 조금 더 내륙으로 진입하면 나오는 란저우 시.

간쑤성의 성도이기도 한 그곳에 평범한 중국인들과는 한 눈에 보아도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가 조심스럽게 거리를 걷는다.

삐이이익, 삐익!

멀리 호각 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을 거닐던 중국인들은 물론 한 눈에 보아도 무슬림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 역시 고개를 돌려 호각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거기! 거기 너! 멈춰!"

공안들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며 무슬림 복장 사내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무슬림 복장의 사내는 이내 뒤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제기랄! 빨리 잡아!"

공안들은 어느새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그 중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내가 허공에 총을 '탕!'하고 쏘며 외쳤다.

"다들 엎드려!"

지나가던 행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엎드리고, 무슬림 사내만 미친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탕!탕!탕!

열심히 권총을 쏴보지만 사격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은 편인지 무슬림 사내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대낮의 추격전이 벌어지기도 10분여, 어느새 무슬림 복장의 사내는 관공서에 다다랐다.

"안 돼!"

타다다당, 타다다당.

미친듯이 총탄을 쏟아붓는 공안, 그러나 무슬림 사내의 손에 굳건하게 쥐어져 있는 스위치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알라후 아크바르! 인시알라!"

무슬림 사내의 손이 끝내 손에 잡힌 스위치를 누르고.

콰아아아아앙!

그의 몸에서부터 시작된 폭발은 지나가던 행인들은 물론, 관공서의 로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던 공안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관공서에서 일을 하는 중국인들이나, 지나가던 행인들의 죽음에 울부짖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경계를 하고 있어야 할 란저우 시의 경계가 뚫렸기 때문이었다.

***

마르지 않는 샘물 처럼.

장저민의 성욕이 그러했다.

하루가 다르게 시시각각 중국의 정세가 일변하고 있었고, 인구가 많은 만큼 알 카에다 세력의 잦은 테러에 안타깝게 생명을 잃는 사람이 많은 와중에도 장저민은 여느때와 같이 자신의 별장에서 문란한 성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덜컹, 덜컹, 덜컹.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문 밖에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장저민의 보좌관은 한숨을 내뱉으며 노크했다.

똑똑똑, 똑똑똑.

덜컹이던 떨림이 잦아들고, 신경질적인 장저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작게 한숨을 내쉰 보좌관이 말했다.

"각하, 왕모입니다."

-들어 와!

커다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리따운 여인 셋이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는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장저민은 알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냉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슨일이지?"

시계를 슬쩍 확인하는 장저민.

"약 5분전, 란저우시 공사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장저민은 찻잔에 차를 따르고 주전자를 그래도 던졌다. 금장 장식이 예사롭지 않은 주전자는 한눈에 보아도 싸구려가 아니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

주전자는 그대로 보좌관의 곁을 스쳐 이제 막 닫히고 있는 문에 부딪혀 산산히 조각난다.

"공안들은 뭐 했지?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내륙의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놈들은 고비사막을 넘어 육로로 진입했다고 보여집니다."

"미친놈들이... 거기를 넘었어?"

장저민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시 침대에 앉는다.

"삼일..."

홀로 읊조린 장저민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보좌관이 물었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를 짓씹은 장저민이 말했다.

"어떻게든 삼일만 더 버티라고 해. 언론 통제 하고, 보도지침 세세하게 짜."

"예, 각하."

"후진다오 그 벌레같은 놈 일거수일투족 놓치지 말고, 해외 이동 막아. 우리 공화국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는 소리야."

"명심하겠습니다."

"삼일 뒤 일정, 세세하게 잡아. 당연히 외부로 세어나가지 않게, 왕가 너만 알고 있는게 좋겠군."

"그 역시, 명심하겠습니다."

"당 지도부에서 군부 축소 얘기를 꺼내거나 힐난하는 놈들 명단 작성 해, 삼일 뒤... 숙청을 시작하지."

"예!"

***

KS그룹 본사 사옥 회장실.

"하, 남자는 수저들 힘만 있어도 그짓거리부터 떠올린다더니 쯧."

최태수의 말에 비서실장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정말 전략실의 생각대로, 유흥이 목적일까?"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파나마에서 천혁수 후보자가 따로 할 행동은 없습니다. 당장 외교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나라도 아니고, 이렇다 할 이벤트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최태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쯧쯧, 아랫도리 간지러워서 갔다는 얘기 아니야?"

"정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사진은?"

"언론사에게 통보할 예정입니다."

"좋아, 바로 진행 해, 의혹이 불거진 시점에서 파나마 휴양이라, 그것도 미모의 서양인과. 그림 좋네."

홀로 만족스럽다는 듯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최태수.

"예, 바로 고조선일보, 동북아일보에 통보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최태수가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묻는다.

"근데, 어디에서 온 정보라고?"

"국정원과 외교부에서 받아온 정보입니다."

"입국기록만?"

"우선 그렇습니다."

"흐음, 간첩에게 노려지고 있는 사람인데, 보안이 영 엉망이군."

비서실장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한다.

"우리 직원들의 인맥이 훌륭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직원들의 배경 역시 훌륭하고요."

최태수가 비서실장의 아부에 피식 웃는다.

"사람 참, 오늘은 비행기 태워주지 않아도 기분이 좋으니까, 적당히 하시게."

"하하, 알겠습니다 회장님."

고개를 숙여 보고 있던 신문을 톡톡 두들기는 최태수. 그의 손가락이 두들겨지는 위치에는 천우진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있었다.

"이거이거, 젊은 회장께서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구만, 기자 놈들이 뿔 좀 낫겠어."

"한창 불 같을 시기 아니겠습니까?"

최태수가 날카롭게 비서실장을 쳐다본다.

"글쎄, 과연 그릇이 이 정도인 인물일까?"

"으음."

"언론의 짜집기야 신물이 날 정도니, 믿지 말자고."

"예, 회장님."

"여론은 어떻지?"

"고조선일보와 동북아일보의 의혹제기에도 아직 저쪽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으며, 청와대 역시 잠잠하기에 급격하게 부정적으로 변하는 중입니다."

신문의 페이지를 넘겨 대통령의 사진을 보며 말하는 최태수.

"도대체 이 양반 속셈을 모르겠구만... 왜 밝히지 않지?"

"당내에 전달 된 오카네가 도움을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쯧, 글쎄... 그 몇푼에 대통령이 함구를 한다라..."

뭔가를 고민하던 최태수.

다시 신문을 덮은 그가 말했다.

"대현그룹 정상영 회장께 점심이나 같이하자 전하지."

"예, 회장님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

록펠러는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바라보며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밤바다가 보이는 소파에 앉아 남미의 꽃이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시원한 모히또를 들이켜며 한참을 천혁수를 기다렸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록펠러가 오른손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고급 만년필을 들어 올린다.

"이제 오시는가 수."

"그게 자네가 오늘 받은 선물인가 보군."

"그렇지."

어느새 록펠러의 곁으로 와 앉는 천혁수, 밤바다의 풍경과 별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 어두운 조명 아래 있던 록펠러는 그제서야 천혁수의 몸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무슨일인가!"

화들짝 놀란 록펠러.

그도 그럴것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도 천혁수의 몸 곳곳에서는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와 붉은색 핏물을 머금은 꽃무늬 하와이언 셔츠가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천혁수는 록펠러가 놀라거나 말거나, 뒷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천쪼가리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툭하니 올려 놓는다.

"이, 이게 뭔가?"

그 천쪼가리를 들어올리는 록펠러.

그것은 여인의 하의 속옷이었다.

다만, 하얀 속옷은 시뻘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진심어린 선물로 받은 것이지."

"허."

록펠러는 도무지 천혁수가 뭘 하고 온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제 240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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