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3화. >
대뜸 도와달라니 살짝 어처구니가 없을 뻔 했지만 현재 대통령의 상황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이런식으로 흐른다면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날까 염려스러울 터.
"어떻게 말입니까?"
-천혁수 후보자 테러사건의 배후는...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나 간첩이라는 사실이 유포될 것은 어쩔 수 없는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죠, 사실이니까."
-크음... 그렇죠, 사실이지요... 하여튼 그것이 국민들에게 알려진다면 아마 재공격, 혹은 일부 과격한 인사들은 김일정의 모가지라도 따 오라고 얘기 할 겁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북한' 혹은 '빨갱이'라고 하면 입에 거품을 무는 어르신들이 꽤나 많은 한국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
"그래서요?"
-그러니, 천혁수 후보자에게... 언론에 잘 얘기해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께 직접 말씀하시지요?"
-총상을 입으신 상태 아닙니까... 병상에 누워 있는데 총을 쏜 놈들을 용서하라니... 염치가 있지요.
과연 염치 때문일까 싶지만 어쨌든 표현이 그러니 대충 수긍하기로 했다. 아마 대통령도 할아버지가 엄사을 부리고 있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 눈치가 어디 보통 눈치던가? 그들 역시 속으로는 욕을하면서 할아버지의 정치적 퍼포먼스에 감탄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
"내가 할아버지를 잘 설득해라?"
-그렇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머리가 벗겨지죠."
-...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천 회장.
"글쎄요, 지금 대통령님께 내가 뭘 받을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 침묵이 길어졌다.
그도 내게 줄 수 있는게 별 것 아닌것들 뿐이라는 걸 아는 모양.
할아버지를 설득하는 일, 그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굳이 이 일을 크게 키워봤자 국제정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할아버지가 북한측에 요구하는 것은 사과 정도가 전부일터.
물론 공개적으로는.
한참을 말 없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대통령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정보는 어떻습니까?
"정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통령이 내게 쓸만한 정보를 줄 수 있을까 싶었다. 현재 나는 국정원보다 SKY PMC 정보부의 정보들이 더 유니크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국정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PMC 정보부에 투자하는 비용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또, 천가키즈들 그리고 호석과 철웅, 할아버지의 인맥들까지 적재적소에 퍼져 있으니 국정원보다 더 양질의 정보를 얻기 용이한 상황.
"흐음, 내게 영양가 있는 정보가 확실합니까?"
-정확히는 천 회장 그대가 아닌, 천혁수 후보자에게 더 유용한 정보라고 생각이 되는군요... 크게 본다면 분명 그대에게도 유용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요? 듣고 나서 결정하겠다고 한다면, 수락하시겠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긍정의 답변이 들려온다.
-허, 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내가 고개를 숙일 차례인 것 같으이.
"그렇다면 들어 볼까요?"
-요즘 전경련이 소란스럽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 우리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걸 몹시 막고 싶은가 보던데요?"
-허허, 알고 있었군요. 그럼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천혁수 후보자를 방해할지도 알고 있습니까?
"돈지랄 아니겠습니까?"
-푸핫... 돈 지랄이라... 일견 맞는 말입니다.
마치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대통령의 태도.
슬쩍 궁금증이라는 놈이 고개를 디민다.
"호오, 더 들어볼까요? 지금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그렇습니까? 이건 아마 국정원도 모르는 정보지 싶군요.
자신만만한 대통령의 태도.
"오, 그렇습니까?"
나는 그의 장단을 맞춰주며 매우 궁금하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
북한 김일정에게 평양 26호 저택이 있다면, 장저민에게는 주석궁 인근에 은밀하고 더러운일을 처리하는 저택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 저택을 바로 마주보고 있는 비슷한 규모의 저택은 장저민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후진다오가 주로 기거하는 장소였다.
오늘도 후진다오는 창 밖의 장저민이 여인네들의 분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그 저택을 바라보며 자신의 욕망을 더욱 키워가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답신이 없단 말이냐!"
순식간에 터져나온 호통에 움찔 몸을 떠는 후진다오의 보좌관 사마군.
"미국 쪽에서도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현재 미군 역시, 한국과 북한과의 교전상황으로 골 머리를 썪고 있을 겁니다. 거기에 이라크까지, 부시도 매우 바쁜 상황입니다."
후진다오가 쿵! 하고는 작은 티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그 미친 전쟁광 놈이 아프간에서 저 무뢰배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이 사단이 난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만..."
"허면, 제 놈들이 싼 똥은 제 놈들이 치우는 것이 당연한일 아니겠느냐 이 말이야! 저 망할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동안, 장저민 그 욕심많은 늙은이의 세력은 날개를 편다고!"
사마군도, 후진다오도.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1년, 혹은 2년만 흘렀다면, 자연스럽게 중국의 정권은 후진다오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뒤집은 것이 바로 SKY였다.
장저민의 약점, '경제 발전'을 깨끗하게 사라져버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장저민이 노리는 것이 단순한 '경제효과'가 아닌 것은 불보듯 뻔한 일.
만약 장저민이 계획한 두번째, 혹은 세번째 계획까지 성공한다면 앞으로 장저민이 세운 장벽은 만리장성보다 더욱 두텁고 길게 이어질게 뻔한일이었다.
"주군... 조금 더 침착하게 추이를 지켜보시지요."
"모르는 놈들은 장저민 저 노인네가 우리 공화국 최초로 당, 정, 군을 모두 장악했다고 칭송하지. 흥! 애초부터 당은 내것이었어."
사마군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후진다오가 좋아할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갖잖은 감투를 쓰고 있는게 벌써 10년째야."
정확히는 9년째이지만, 사마군은 크게 딴지를 걸지 않았다.
"더 참아라? 잡힐듯 잡히지 않는 이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마군 그대는 진정 모르는가?"
"쇄약해져 가던 군부가 살아나고 있는 시기입니다. 장저민을 크게 자극한다면, 군사적 개입까지 생길지 모를 일입니다."
"흥! 그거야 말로 바라는 바지, 그렇게 된다면 한 순간에 군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테니."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후진다오의 두 눈을 똑똑히 지켜본 사마군은 이미 후진다오가 욕심에 눈이 멀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안 되겠어... 당내 최고 인사의 권한으로,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지."
"주군!"
"내 고유 권한이야!"
"어떤 발표를 하시려고 하십니까?"
"미국 놈들에게 비공식으로 요청했는데 듣지 않는다면, 공식적으로 얘기해야겠지. 전 세계 전부가 알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 뒤 처리가 어설퍼, 이 사단이 났다는 것을 말야."
"으으음..."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이었기 때문일까? 후진다오가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사마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그게 코 앞이야. 나 다음에는 정상의 자리가 그대의 것일지도 모르지."
충언을 고민하던 사마군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후진다오가 말했다.
"그러니, 처신 잘 하시게."
"예! 주군, 바로 성명문에 적합한 대본,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후진다오가 흡족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별로 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보가, 대통령의 저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에 어쩐지 흥미롭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수화기 너머 대통령의 음성에 집중했다.
-오늘 낮의 일로 인해, 전경련 쪽에서 우리 당에 접촉이 있었습니다.
"아하, 오늘 건네 받은 따끈따끈한 정보다?"
-그렇지요, 아직 뜸도 제대로 들이지 못한 따끈한 정보지요.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우리 여당의 후보자를 밀기로 결정 했다 하더군요.
"당연이 여당 아니면 야당 후보자를 밀겠죠, 그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게다가 현재 대통령님의 국정수행 신뢰도 역시 높고, 지지율 역시 낮지는 않으니 당연히 여당쪽이 우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야당과 상대적으로 말이죠."
나는 뭐 뻔한 소리를 하느냐 하는 그런 말이었다.
대통령 역시 내 말을 이해하고 있는 듯 싶었다.
-맞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우리 당의 후보자를 밀어주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습니까?
확실히.
전경련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공작을 펼치는지 까지는 몰랐다. 사실 알아도 부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게 더 정확하다.
"뭐 몰라도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될 것 같습니다만."
-허허... 지지율 35퍼센트는 그래도 되겠지요.
"아, 현재 우리 할아버지 지지율이 35퍼센트인 모양입니다?"
-물론 어제 기준이니... 오늘 기준으로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군요.
"확실히 오늘 임팩트가 좀 셌죠?"
-어쨌든, 그들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과 바이럴 마케팅을 얘기하더군요.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놀랐다.
벌써부터 한국에는 노이즈, 바이럴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경제인이 있구나 하는 생각.
이 시절 한국은 마케팅의 '마'자도 잘 모른다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던가 보다.
"대충 나라를 시끄럽게 해서 할아버지 뉴스는 날려버리고 자극적인 뉴스들로 국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뒤 반전시키겠다. 뭐 이런 취지인가 봅니다."
-... 정확합니다.
"뭐, 제법 유용한 정보네요."
-......
떫떠름한 반응에 대통령은 다시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게 크게 양질의 정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딱 그 정도.
선문선답 처럼, 대통령이 말해준 몇가지 힌트로 나는 충분히 전경련이 할 짓들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대통령의 언질이 없었어도, 뉴스를 보다보면 혼자 알아챌 정도랄까? 아마 한동안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이 몸살을 앓겠구나 싶었다. 이 시절에는 연예인 섹스 스캔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던 시절이니 더욱 그리 할 터.
일명 비디오 스캔들을 말이다.
그러니 정보의 질에 맞게 나도 성의만 보여주면 될 듯 싶었다. 이미 들었는데 무를수야 없잖은가.
"정보의 질이 그리 좋지 않아, 적극적 설득은 어려울 것 같고, 북한이 사과를 한다면 참아준다는 정도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요?
"욕심은 화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크음... 하, 과연 북한이 사과를 할지가 참.
"욕심많은 김씨 돼지는 사과를 모르는 놈이죠."
-허허, 참으로 오랜만에 김일정이를 원색적으로 욕하는걸 듣는군요.
"사실 아닙니까? 이 시국에 독재라니."
-알겠습니다 천 회장, 부디 천혁수 후보자를 잘 설득해주시길.
"할아버지도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을 겁니다."
-예, 그래야겠지요... 전경련쪽에서도 천혁수 후보자가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을겁니다. 국정원이, 그리고 청와대가 알고 있으니까요.
대놓고 전경련의 빨대가 국가기반 시설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말하는 대통령, 더 이상 내게 숨길것은 없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만 끊죠, 이곳은 아직도 한밤중이라."
-으음, 뭐 요구 하실 것은 없겠지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이 일을 최대한 작게 끝나길 바랍니다.
이렇게 까지 말한다면야 원하는 것이 한 가지 있긴 했다.
"비공식적인 군사작전 용인?"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습니까?
"아마도요?"
-지금 천 회장의 말씀은, 직접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정이를 테러하겠다 뭐 그런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맞습니까?
"메이비?"
-허...
< 제 23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