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32화 (232/458)

< 제 232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보위성 보위부 부장 현해철.

그를 부르는 직함은 참 길고도 길었다. 보통은 보위부장으로 통용되지만 정석대로 부르려면 저토록 긴 문장이 나와야 했다.

어쨌든.

현재 보위부장 현해철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안회선 전화기를 끊었다.

"후우... 끝났구만 기래."

굳이 공화국 전사들의 보고를 받지 않았어도 충분히 임무에 실패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안 되지만, 보위부장이기에 대놓고 할 수 있었던 행동이 바로 한국의 채널을 보는 것이었다. 세상이,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서울에서, 경기도 북부에서 쏘아내는 전파는 이곳 평양에도 다다랗다. 그렇기에 채널만 잘 돌리면 한국의 방송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소리를 잔뜩 줄여 놓은 커다란 브라운관 TV에서는 천혁수의 인터뷰를 볼 수 있었다. 옛날 그러니까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지기 이전, 같은 문화권 같은 나라에 속해 있었던 사이 답게 사용하는 언어가 같았다.

소리를 듣지 않아도 자막만으로 충분히 천혁수의 인터뷰를 이해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현해철이 문득, 오른쪽 책상 서랍에 손을 뻗었다.

드르륵.

열린 서랍 안에는 북한에서 직접 생산하는 담배와 지포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10년만이구만 기래."

담배를 끄집어낸 현해철이 케케묵은 오래된 담배갑을 열어 담배 한 개비를 끄집어냈다.

코로 가저간 담배를 '흐읍'하고 냄새를 맡아보는 현해철.

"동무도 나처럼 낡았구만 기래..."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가져가는 현해철.

칙, 칙, 칙, 칙.

오래되어서 기름이 날아갔을까? 부던히 노력해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는 현해철.

"쿠움, 쿨럭, 쿨럭."

오랜만에 태우는 담배는 기침을 동반했다.

"맛있구나 야."

슬쩍 고개를 돌리니 예정되었던 공격시간이 차츰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인터폰을 바라보며 한참 고민을 하는 현해철.

어느새 담배는 다 타버렸고,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문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때마침 울리는 인터폰.

올 것이 왔음을 짐작한 현해철은 길게 연기를 뿜어내고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전화받았소."

-보위부장 동무, 최고 사령관 동무의 호출입네다.

"어디라니?"

-대회의실입네다.

"알았다."

전화를 끊은 보위부장은 당당히 담배를 물고는 걷기 시작했다.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대회의실은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는 짧은 시간동안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비벼끄고는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한참을 바라보는 현해철.

"애미나이... 보고 싶구만 기래."

오랜만에 자신의 아내가 보고 싶은 현해철이었다. 그동안 공화국에 충성을 다한다는 명분 아래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천혁수의 '암살'이라는 것 때문에, 연평해전이라는 놈 때문에 벌써 집에 들어가지 않은지도 4일이 훌쩍 지나가는 시점이었다.

4일 동안 잠은 제대로 잤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결국 그는 김일정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현해철.

퍽.

무엇인가가 날아와 현해철의 얼굴에 맞고 바닥을 구른다. 그것은 담뱃갑이었다.

"남조선 뉴스 봤네?"

"봤습네다."

"공화국 전사들은 뭐 했네?"

"임무에 실패 했습네다."

김일정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동무래 모가디 준비 되었네?"

현해철이 가슴팍에서 계급장을 뜯어내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부탁드렸던 마지막 소원은 들어 주시갔디요?"

김일정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이틀, 이틀이면 되갔네?"

"충분합네다."

"다녀오라. 대신, 집 밖에 전사들이 상주하고 있을테니 알아두라."

"알갔습네다."

현해철은 마지막으로 각잡힌 경례를 올리고는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주석궁 복도를 거닐며 담배를 입에 문 현해철.

그의 곁으로 그를 보좌하던 보좌관이 다가와 말했다.

"보위부장 동무, 이대로 포기 하시는 겁네까?"

현해철이 '쯧' 하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동무는 최고사령관 동무의 뜻을 모르갔네?"

"보위부장 동무처럼 공화국에 충성을 다 하는 사람이 저 안에 몇이나 있갔습네까? 저는 도무지 최고사령관 동무를 이해할 수 없시야요."

"그래서야."

"예?"

"최고사령관 동무가 내 모가디를 원하는 이유, 내 머리통이 너무 커버려서디."

"......"

침묵속에 주석궁을 거닐다 드디어 바깥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 현해철은 자신의 보좌관을 보며 말했다.

"동무."

"예, 보위부장 동무."

"편히 부르라, 이제 보위부장 아이니."

"말씀하시라요, 동무."

"오래 살고 싶네?"

세상을 해탈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현해철.

보좌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래 살고 싶으먼은, 약이 될 말은 입에 담디 말라, 독이 될 말만 입에 담아. 단물처럼 달디 단 말만 담으라 이 말이디."

"그, 그게 무슨... 지금 같은 시국에 충언을 아끼라는 말씀이십네까?"

현해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래, 기래야 나보다 오래 살 수 있디. 명심하라."

보좌관은 문득 최근들어 현해철과 김일정의 마찰에 대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확실히 현해철은 김일정 측근들의 감언이설과는 달리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으로 공화국의 안녕을 바라는 일이라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쓰면 삼키고, 달면 내뱉으라. 그거이 이 공화국에서 영원한 안녕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디."

마지막 말을 끝으로 현해철은 쓸쓸히 사라졌다.

보좌관은 그가 사라지는 뒷 모습이 앞으로 사라질 공화국의 안녕을 바라보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남조선이 공격하겠다는 선전포고에도 군사기지에서 군인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공화국.

그런 와중에도 최고사령관이라는 김일정은 이 일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한다는게 무척이나 서글프게 느껴졌다.

마음의 발로였을까, 보좌관은 그 어느때보다 진심을 담아 현해철의 뒤통수에 각잡힌 경례를 올렸다.

***

대한민국 시간으로 오후 2시 30분.

포격이 시작되고, 종료된지 정확히 25분이 지난 시점.

천혁수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TV를 통해 포사격 장면을 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뜻대로 되었구나, 망할놈들."

아직도 증손주를 직접 보지 못하게 만든 북한놈들이 미운 천혁수였다. 막 오른팔을 내밀어 찻잔을 들어올리려다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와락 인상을 구기는 천혁수.

"쯧."

그러나 TV에서 다시금 방송되는 자신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한 번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어서 앵커가 천혁수를 칭찬하는 한 마디에 그의 입꼬리는 더욱 올라갔다.

고개를 돌린 천혁수가 뒤쪽에 서 있던 호석에게 말했다.

"이제 전용기 부르거라, 우진이 녀석이 별다른 이동이 없으니 놀고 있겠구나."

"벌써 움직이시려 하십니까, 잠시 요양을 하시지요."

"요양을 핑계로 지금 움직여야지, 다 낫거든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부를테니, TV토론들도 예정되어 있지 않으냐."

"으음,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얘기 전달하고 전용기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북한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우리 군의 포격에 의한 반격이나, 입장표명은 따로 없는 상황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북한은 별다른 얘기가 없는 상황이며 북한의 수령 김일정 또한 이렇다할 입장 표명이 없는 상황입니다.

-전문가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있습니까?

-북한의 입장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언을 하면서, 그렇다고 그들이 사과를 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으음, 역시 북한은 옛날 도끼만행 사건 때에도 미국의 항공모함을 보고 나서야 '유감'이라며 얘기했었죠?

-그렇습니다. 현재까지 북한은 국제적인 공식 사과는 표현한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전문가들 역시 '유감 표명을 해도 다행이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앵커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데스크에 나와 있는 전문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혁수 후보자에대한 테러사건, 그 배후에 북한이 있을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상황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사님?

-우선 천혁수 후보자의 말에 따르면, 경찰에 인계 했으니 공식적인 조사결과가 나와야 겠습니다만... 이런 상태에서 그런식으로 일을 벌이는 행동을 과연 북한에서 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천혁수가 스륵 고개를 돌려 호석에게 물었다.

"저놈은 누구더냐?"

"친 여당 지지자로 제법 유명한 교수입니다."

"쯧쯧, 그러니 저런 헛소리를 늘어 놓는군."

"앞으로 이 채널은 틀지 마."

"예, 백부님."

다시 TV로 고개를 돌린 천혁수.

-만약 천혁수 후보자의 테러에 북한이 연관되어 있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국제적으로 문제이고, 당장 우리나라와의 외교관계 역시 악화일로를 택한 것일텐데요.

-테러 사건의 배후가 정말 북한이라면, 앵커님의 말씀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재차 공격을 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대통령께서는 앞으로 무력도발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겠다. 몇 시간전에 말씀하셨으니 말이죠.

천혁수가 고개를 돌려 다시 호석에게 물었다.

"청와대 상황은 어떻더냐?"

"백부님의 상태를 묻고는 별다른 연락은 없습니다. 몇 분전 청와대로 대통령이 복귀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흠, 지금쯤 골머리를 싸매고 있겠군."

"예, 이미 백부님에 대한 테러가 간첩에 의한 소행이라는 것을 국정원을 통해 보고 받았을 겁니다."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김가 놈은 억울하겠구나, 간첩이 아닌 아산댁이 내 몸에 구멍을 낸 것을 모르니."

어째서인지 주방 쪽에서 화들짝 놀라는 인기척이 들린것만 같은 천혁수.

"하하하, 아산댁 농담이니 음식에 독을 넣지 마시게."

-그럼요, 어르신!

***

세상이 대한민국이 북한을 공격했다는 얘기로 떠들썩한 때. 나는 단잠에 빠져들어 세상 모르고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테이블위에 올려 두었던 SKY 터치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지 않았더라면, 아마 내가 눈을 떴을 땐 동이 터오를 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잔뜩 짜증이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잠결이기에 영어가 아닌 한국말이 튀어 나왔다.

-천 회장, 나 대통령입니다.

"지금 여기는 새벽입니다만."

-이런... 급한 마음에 천 회장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군요, 양해를 바랍니다.

"쯧."

대통령이 정중하게 사과를하니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행여나 단잠에 빠진 루시가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침대를 벗어나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

호석은 보이지 않고 익숙한 얼굴의 PMC대원 둘이 살짝 목례를 올린다.

"정대표님은 퇴근?"

"예, 회장님. 회장님께 받은 임무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늦둥이를 갖는게 임무씩이나 되는지는 몰랐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다시 전화기를 귓가로 가져갔다.

"말씀하시죠, 대통령님."

-지금 상황은 알고 있으시겠지요?

"세상이 떠들썩한데 나라고 모르겠습니까? 게다가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기도 한데요."

-그럼 긴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가급적이면 짧고 직관적으로 부탁드립니다.

-...

잠시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길어진다.

그만큼 대통령은 자신이 할 말을 고르고 있으리라.

-도와주시오.

그러고는 아주 짧게 다섯 글자로 용건을 표현했다.

아주 직관적이고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이었다.

< 제 232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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