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6화. >
호석과 내가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아챘을까? 아니면 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살짝 들었던 것일까? 우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병원의 정원에 나타났다.
“오빠.”
“응, 우희야 왜?”
“할아버지한테 무슨일 있는거야?”
호석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
“있을 뻔 했는데, 별일 아니야. 잘 마무리 됐어.”
“그래?”
묘하게 떨리는 우희의 동공.
지난날 로이드 로스차일드라는 그 어린 토끼놈 때문에 제법 사나운 드라이브를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밝게 지내기에 트라우마가 없나 싶었지만 확실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모양.
“지난번 일 때문에 그래?”
“아니 그냥··· 오빠가 좀 이상해서.”
“내가?”
“응, 평소랑 다르게 걱정이 많아 보였어.”
“하하, 평소에는 걱정이 없어 보였어?”
“뭐든 다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처럼 보였지?”
“그래? 할아버지 일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날카로웠나보다. 너무 신경쓰지마 별일 아니니까.”
“나도 한국으로 들어갈까?”
호석과 내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음, 우희는 미국에 잠시 있는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네?”
“그래? 할아버지 적적해하시지 않을까?”
우희의 마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우희를 한국으로 보낼 순 없었다. 경호 인력이 분산되면 그 만큼 위험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결국 난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우희도 우리 천가의 핏줄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놈들이 있어서, 할아버지가 혼자인게 운신에 여유가 있을 것 같거든?”
“역시··· 지난번처럼 그런 일이구나?”
씁쓸해 보이는 우희.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번에도 봤잖아? 총을 쏴도 우리는 끄떡 없는 거.”
“그냥··· 내가 도움을 줄 수 없다는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오빠랑 할아버지한테 짐짝같이 느껴져서···”
나는 곁에 앉은 우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말했다.
“아니야 우희야, 네 존재만으로 나랑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 네가 나와 할아버지를 소중하게 여기고 힘이 된다 느끼는 것 처럼, 나랑 할아버지도 그래.”
“그냥···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래.”
“지금은 루시 곁에서 많이 도와줘 우희야.”
“··· 알겠어 오빠.”
“응, 우리 태양이 별이한테 좋은 고모 노릇도 좀 해주고.”
“풋, 알겠어.”
우희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니 우희는 애써 빙그레 웃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우희가 완전히 사라지고, 호석이 말했다.
“아가씨가 못내 불편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게요··· 짜식이, 찡하게.”
“흐음, 그러고보니 우희 아가씨 역시, 호신술을 위해 훈련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호석의 의견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도 적이 많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 제 몸을 지킬 필요성은 있어보였다.
“한국에 돌아가서 아산댁 아주머니에게 부탁해보죠?”
“오, 그녀라면 확실히 잘 해줄 것 같습니다.”
***
창문이 깨지고, 여기저기 집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던 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해진 천혁수의 집.
피비린내 하나 나지 않는 것이 마치 간첩따위와 집 안 사용인들과의 혈투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후르릅.”
천혁수가 여유로운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사내의 표정은 잔뜩 긴장을 품고 있었다.
“가, 간첩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백 대표를 따라 가 봐.”
국정원에서 나온 인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묵묵히 백철웅을 따라 천혁수의 저택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천혁수의 찻잔의 찻물이 바닥을 보일 때 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올라온 국정원 인사.
“죄송합니다. 후보자님···”
“놈들의 말로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더군, 제 놈들은 이등전사라던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내.
국정원 내부 대북방호1처장을 맞고 있는 그는 이등전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등전사, 일등전사, 특등전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앞으로 내 동선이 바깥으로 세어나가지 않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안에 각별히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놈들이 오늘도 내 동선을 미리 알고 움직였어, 내가 없는 사이 이 집에 침입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겠지··· 우리 직원들이 유능하지 않았다면 나는 필시.”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국정원 인사.
백철웅이 스윽 다가와 천혁수에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 경호팀 역시, 총기 사용을 허가 받고 싶습니다. 처장님.”
“으음··· 그 부분은 상부의 허락이 필요한 일입니다.”
천혁수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끼어들었다.
“국정원장의 허락이면 되겠는가?”
당장이라도 전화를 할 것 같은 얼굴.
철웅이 난처해하는 처장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 일로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처장님, 그냥 총기 사용만 허가 해주시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허가는 나게 돼 있잖습니까? 우리는 훈련받은 경호원들이고, 총기 사용 역시 허가 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SKY 그룹 직원들입니다. 어차피 허가가 나올거 그냥 약간의 편의를 부탁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확실히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처장의 눈빛을 보고 대번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철웅.
“언론에 언질은 없을겁니다.”
“감사합니다.”
대충 철웅과 그의 대화가 끝난 것 같기에 끼어드는 천혁수.
“대북관련 부서에서, 간첩 의심자들 따로 조사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그 정보좀 받고 싶구만.”
다시 한 번 난처한 표정을 짓는 그.
“대외비는 물론, 일급 비밀까지 연관되어 있기에 그것 역시 상부의 허락을 요합니다.”
“그 부분은 대통령님과 국정원장과 따로 얘기를 나누겠네.”
“예, 상부에서 요청이 온다면 바로 보내드릴 수 있게 준비 해 놓겠습니다.”
“그거면 됐어, 놈들은 언제 데려가겠는가?”
“바로 직원들을 불러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조용히 더럽지 않게 부탁하네.”
“예, 후보자님.”
말이 후보자지 대북방호1처장은 거의 대통령을 대하듯 천혁수를 대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지하실로 향하고, 천혁수가 철웅을 불렀다.
“백 대표.”
“예, 백부님.”
“정보 들어오는데로 솎아내.”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우진이 녀석에게 얘기해서, PMC아이들을 좀 쓰지.”
“이미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
“예, 총기 사용 역시 굳이 허가가 나오지 않더라도 사용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천혁수가 ‘하!’하고는 쓰게 웃고는 말했다.
“이 놈이 벌써 머리 꼭대기에 서 있구나.”
괜한 투정이라는 것을 아는 철웅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지하실로 내려갔다.
***
쨍그랑.
후진다오가 잘 마시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의 보좌관 사마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민하데 입을 열었다.
“고정하시지요.”
“고정? 지금 내가 고정하게 생겼나? 사면초가야 사면초가!”
다시 군부가 힘을 얻기 시작하고, 경제부분에서 장저민보다 우위에 있던 후진다오는 이제 그마저 밀리기 시작했다. 고작 하나의 기업 SKY라는 공룡이 중국에 발을 들이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실제로 통계로도 퍼센티지로 보일 만큼, SKY의 공장들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과 후가 확실하게 달랐다.
“우리가 밀던 명분은 인민들이 굶어 죽는 다는 것이었어! 그런데 이제 그 인민들에게 만두라도 하나 돌아갈 것 처럼 장저민 그 치가 떠들고 있잖은가! 이 상황에 무슨 반전을 꿰할 수 있다고!”
“우리쪽 사람들이 조금씩 장저민쪽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주군께서 더욱더 힘을 내시어···”
“그러니까 도대체 뭘 어떻게 말인가!”
잠시 말을 고르던 사마군이 운을 뗐다.
“장저민 주석 측과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이제와서 붙어 먹자? 가능하리라 보는가!”
잔뜩 성을 내는 후진다오의 외침에 사마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려 버렸다.
그가 생각해도 그가 말한 방법은 말이 되질 않았다. 속이 좁은 장저민이 이제와 후진다오가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어서 오시게’하고 받아줄리 없으니까.
“하, 빌이먹을 알 카에다 놈들.”
사마군이 저도 모르게 뱉어낸 혼잣말에 후진다오가 막 들이키려던 술잔을 탁! 하고 내려 놓았다.
화들짝 놀란 사마군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아니!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예?”
“뭐라고 했느냐고!”
“비, 빌어먹을 알 카에다 놈들이라 했습니다.”
“그래! 그거야! 그거!”
“예?”
후진다오가 화끈하게 술잔을 비우고는 화통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그래그래··· SKY란 공룡이 장저민과 붙어 먹는다면, 우리는 SKY보다 더 큰 공룡을 데려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겸사겸사 장저민의 군부 역시 세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 우매한 사모에게 주군의 혜안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이는 사마군.
후진다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 카에다 놈들이 우리 중화의 땅에 넘어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미국이 두려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거야! 미제 승냥이 같은 놈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그 놈들이 우리 땅에 온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 부분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외 인지도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면 어떨까 싶군. 아니면, 미군이 직접 들어와서 알 카에다 놈들을 처리하게 만들거나.”
사마군이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인다.
“그 어느나라도 타국의 군사를 자신들의 땅에 들어오게 하지는 않습니다.”
“일시적인 것 아닌가 일시적인 것.”
“인민들의 반발 역시 염두하심이 옳습니다.”
후진다오가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마군, 자네가 나와 몇년이 됐지?"
"주군을 뵌지도 올해 12년째가 되었습니다."
"오래했구만."
"......"
"자네와 오래 함께 하고 싶군."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말란 얘기와 같았다.
"주군, 우리가 공화국을 위해 개혁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제 안위만 살피던 당내 지도부때문 아니었습니까?"
"쯧, 낭만이고 이상이지."
"......"
"듣고싶지 않군, 미군이 신장위구르를 제외한 다른 땅을 밟는 일은 없을것이야, 내가 그리 약속하지."
잠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사마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 놈에 전화를 부수던가 해야지 한시라도 쉴새없이 울리는 전화에 문득 짜증이 올라왔다.
심지어 걸려오는 전화의 대부분은 SKY그룹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아닌 외부인들이 대다수였다.
"여보세요."
-천, 잘 지내고 있습니까?
부시와 같은 외부인들 말이다.
업무보고는 내게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완벽하게 지시를 내려 놓고 있으니까, 게다가 과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미래의 '시스템'을 도입해 놨기 때문에 신입 사원을 뽑아도 하루마다 그가 해야 할 1인분의 일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경영자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특별한 일이 있다면 대표나 사장 선에서 해결하고, 그게 안될때만 나에게 보고가 되게 만들어 놨기에 한가할 줄만 알았다.
중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대한민국도 그렇고, 이제는 북한까지 날 못살게 구느라 혈안이 됐구나 싶었다.
"예, 오랜만에 전화를 다 하셨습니다."
내 목소리가 좋지 않음을 느꼈을까?
-흐음,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봅니다.
"아, 요즘 아이들을 돌 보느라 잠을 설쳐서."
-하하, 보고는 받았습니다. 록펠러양을 똑 닮은 사랑스러운 딸내미와 우진을 똑 닮은 사랑스러운 아들이라지요?
"아직 신생아라 똑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쌍둥이는 맞습니다."
-이런, 확실히 좋지 못한 타이밍에 전화를 했나봅니다.
나는 픽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럼 끊을까요?"
-푸핫, 그건 안 될 것 같군요 미스터 천.
"알겠습니다. 그럼 용건을 들어 볼까요?"
-요즘 부쩍 중국이 시끄럽습니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이 그쪽에서 설칠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아, 그렇죠."
-SKY는 별 피해가 없습니까? 듣기로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 쪽에서 뭔가를 진행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우리 로고가 무서운가 놈들은 보이지가 않네요."
-크큭, 확실히 아프간에서 SKY의 로고는 대단했지요, 검은 머리 학살자라던가? 하여간 SKY PMC는 자비가 없기로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
"예, 덕분에 놈들이 건들질 않네요."
-그건 다행입니다. 어쨌든, 후진다오라는 중국의 2인자에게 미팅 요청이 왔습니다.
"호오."
후진다오 놈이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공산국가의 최대 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미국에게 손을 뻗다니, 전 삶의 중국의 미래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이제는 국제정세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요약하자면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잔존세력에 대한 소탕을 요구했고, 그 피해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도둑놈들이 따로 없네요."
-차이니즈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게 전화를 주신 이유는요?"
-미군이 중국땅을 밟으면야 좋겠지만, 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거절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쨌든 후진다오는 중국의 국가정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장저민 주석과 대화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조용하게.
내가 중매쟁이도 아니고, 나보고 중매를 놔 달라 말하고 있는 부시.
-미스터 천은 장저민과도 꽤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착각입니까?
"뭐, 사업상 술자리를 몇 번 가진 적 있지요."
-어떻습니까? 지금 내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힘든 상황이라 공개적으로 중국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잠시 미루는 것이 적절할 것 같은데.
확실히 부시는 지금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말이 전쟁 준비지 '명분 만들기'를 하느라 바쁘다고 보는게 옳다.
"우리나라의 옛 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가는게 있어야, 오는게 있다."
-하하하, 좋은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죠. 미스터 천이 바라는 것을 말해 보세요.
나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북한 도발에 따른 완벽한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흐음...
< 제 22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