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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재벌-217화 (217/458)

< 제 217화. >

잠에 빠진 루시를 피해 조용히 깨끔발로 병실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문 앞을 지키던 호석과 마주쳤다.

"에이, 들어가서 쉬시라니까요."

호석은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교대근무 중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 내가 신경쓸까봐 거짓을 말하는 호석.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스처 지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할아버지랑 전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예, 회장님."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조용한 병원의 VVIP실 바깥 복도에 인기척이 하나 둘 느껴졌다. 모두가 나와 내 가족들의 안전을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잘 꾸며진 병원 내 건물정원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호석이 품에서 시가를 꺼내는데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뇨, 당분간 시가는 자제해야 할 것 같네요."

호석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애들도 루시도 생각해야죠."

"예."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결된 전화.

-왜.

"아이고, 루시랑 통화할 때랑 전혀 딴판이시네요?"

-네 놈이랑 루시랑 같더냐?

할아버지가 퉁명스러운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날아오고 싶을텐데, 괜히 정치라는 놈을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청와대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화가 이제는 내 전화에 미치는 것이고 말이다.

"이거 서운하네요, 무려 증손자, 증손녀를 출산했는데요."

-그것도 루시가 배 아파 낳은 것 아니더냐.

"쩝, 어쨌든간 루시와 제 아이들에 관련된 얘깁니다."

-뭔데.

"루시가 불안해 하네요."

-무엇을?

"한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걸요."

-왜?

"할아버지가 당장 날아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다 보니까요?"

-아아...

대충 알겠다는 듯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하여간 김씨 일가 모가지를 따던가 해야지 쯧.

증손녀, 증손자를 곁에두고 키우고 싶을 할아버지. 그러나 루시가 불안해 하는 이유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이 아니라면, 한국의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아직 휴전중인 상황이니 말이다.

-뭐, 그래서 왜 전화 한게냐? 단순히 루시가 불안해 하기에 한국에서 살지 않겠다 허락이라도 받을 셈이더냐?

가뜩이나 퉁명스럽단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제는 냉정하기까지 하게 들렸다. 말씀에 '허락 하지 않겠다.'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한국에서 살아야지, 물론 미국과 왔다갔다 하겠지만."

-흠흠, 그렇지?

약간이나마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풀어지는게 느껴졌다.

"당연하죠, 우리 뿌리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천가'니까요."

-전화한 용건이나 말해, 회의에 들어가야 하니까, 여기 파란지붕 로비다.

"아 그래요?"

-말 길게 하지 말고 용건만.

완전히 기분이 풀리신듯, 툴툴 거리는 말투는 매 한가지지만 분위기와 뉘앙스는 많이 달라지셨다.

"놈들의 군사 도발에 강력한 대응 및 무력보복을 바랍니다."

-뭣?

"까 놓고 김일정이 그 놈이 전쟁을 일으킬 일이 없다는 건 세상 모두가 아는 일이잖아요?"

-흐음, UN과 미국에게 안 좋게 작용할 수 있다.

"그럼 제 놈들이 김일정이 모가지 따 오던가요."

-크음...

"할아버지 벌써 대통령 다 되셨네요? 국제정세에 대해서 고민도 하시고."

-이놈이 빈정 거리기는.

옆에서 내 통화를 듣던 호석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뱉은 말은 여지껏 대한민국이 북한의 무력도발에 대응하던 방법과는 매우 상이하기 때문일 터.

언제까지 맞고만 있을지 답답하기만 했다. 이제 맞으면 우리도 패준다는 강력한 어필이 필요했다. 진짜 전쟁이 발발할 일도 없겠지만 행여 놈들이 '핵무기'를 가지고 더욱 강하게 우리를 압박해도 상관 없었다.

"까놓고 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핵무기로 난리를 쳐도 우리한테는 이득입니다."

-어째서?

"우리도 핵 무장을 할 명분을 주는거니까요,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으로서 첫 대외적인 자랑거리가 '핵무장'이라면 국민들도 박수를 치며 환영할걸요? 이제 북한놈들 끝났다면서, 삥 안 뜯겨도 된다면서 말이죠."

-또, 또. 말장난이구나.

"명분이란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닙니까. 우리가 UN이나 미국 눈치 볼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미국은 어떻게든 구워삶을 수 있으니까요 아직은."

-대충 알아 들었다. 나도 놈들을 가만 놔둘 생각은 없었어, 감히 내 증손자, 증손녀를 늦게 만든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으니까.

"아, 그러셨어요?"

-오냐, 네 놈이 불난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럼 워싱턴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일 마치시고 얼른 오세요."

-알았다. 곧 보자.

"예."

-루시 잘 챙기거라, 자식놈보다 곁을 항상 지켜줄 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할 게다.

"명심할게요."

-오냐 끊는다.

'예'라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으신 할아버지. 절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 표정과는 상반되게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석.

"왜 그러세요?"

내 질문에 상념에서 깨어난 호석이 답했다.

"흐음, SKY PMC에 인원을 보충해야 하나 싶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때문에요?"

"예, 아무래도..."

힐끗 내 눈을 쳐다보며 말하는 호석.

"회장님이 시작하신 일이니... 그 끝이 진짜 김일정이 모가지라도 따와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에이, 상식적으로 가능합니까 그런 일이."

"흐음, PMC전체를 잃어도 된다면야... 어떻게 가능하지 싶기도 합니다."

"전설의 684부대도 아니고 무슨."

"684부대를 아십니까?"

아차,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684부대에 관하여 잘 모르나보다. 미래에 한 영화로 유명해진 사건이기 때문.

"뭐 대충압니다. 간첩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아아... 그들은 참 안타깝죠, 사연이."

화제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것 같으니 나는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쨌든 PMC 인원 충원은 환영입니다. 북한 놈들이 아니라도 필요할테니까요."

"예, 안 그래도 요즘 의뢰가 물밀듯 들어와서 바쁘던 참입니다. 대원들 얼굴 보기도 어려울 정도죠."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루시가 잠들어 있을 병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프간에 있던 대원들은 어떻게 됐죠?"

"현재 절반의 인원은 다른 의뢰를 나갔으며, 나머지 인원은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귀국은 했군요?"

"예, 더 이상 아프간에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벌레 놈이 교육을 제대로 이수 한 모양이네요."

"지금쯤 타클라마칸 사막을 질주하고 있을겁니다."

"좋네요, 계속 보고하세요 알 카에다와 장저민 쪽 움직임 모두."

"예, 회장님."

***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났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처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다. 전에는 미국에게서 지금은 중국에게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느 정도 경계선을 그은 중국은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기준은 정확히 신장위구르 지역에서도 필요없는 땅의 경계와 맞닿아 있었다.

한 마디로 살 만한 땅에는 이미 중국의 군대가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바깥까지 진출해야 함이 옳습니다."

"이 곳에서도 우리 전사들은 배를 곯아야 하는가!"

크게 외친 빈 라덴의 목소리에 자칭 '신의 전사'라 불리는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아닙니다!'하며 크게 소리친다.

"지하드를 위해! 신의 뜻을 전파 하기 위해 배불리 먹고 악에 맞서 싸워야 할 우리들이 오늘도 식량을 걱정해야 한다!"

모두가 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탁!

나무 지휘봉으로 지도의 한군데를 가리키는 빈 라덴.

"이곳, 바로 이곳의 푸르른 땅을 우리가 점령한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가자! 싸우자! 우리의 동지들을 핍박하고, 지하드를 멸시하는 중국 놈들이 무서운가!"

""아닙니다!""

빈 라덴이 가리키고 있는 지역은 신장위구르 지역의 전체 면적에서 아주 조금밖게 되지 않는 초원지대였다. 물론, 초원이 있다는 것은 물길이 있다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 곳은 문명이 발달 해 있었다.

한마디로, 신장 위구르 지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꼭 사수해야 할 지역이라는 뜻이었다.

"오늘 밤, 이곳을 친다."

빈 라덴의 확정적인 말에, 모두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신께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자."

""예!""

***

철컥.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 10분.

다들 급하게 자리에 모였는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은 천혁수 대선 후보자였다.

"아, 오셨습니까 저쪽으로 앉으시죠."

대통령의 왼편에는 여야당의 대선 후보자들이 앉아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들 옆에 앉게 된 천혁수.

그의 표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무력 도발이라고요? 교전이라는 얘기도 듣긴 했습니다만."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해군 정복을 입은 사내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도 교전이 진행중이라 할 수 있기에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북한 해군의 도발로 인해 우리 고속정 한 대가 완파 당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천혁수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지금, 우리가 얻어 맞고 있다는 뜻입니까?"

"교전수칙대로 우리도 대응 공격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격침당했다는 우리 군의 생존자는?"

"아직은 조사 불가한 상태입니다."

"하, 미친놈들 때문에 소중한 인재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단 얘기군."

천혁수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음... 월드컵도 막바지에 들어선 이때 하필이면... 현재 국민들이 월드컵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이런 상황에 찬물을 끼 얹는 사건을 알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혁수의 고개가 스륵 말을 뱉은 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립니까?"

"말 그대롭니다. 솔직히 북한과의 교전에서 인명피해를 입은게 처음도 아니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 하는 얘기입니다. 대선도 코 앞이고, 나라 분위기도 좋은데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천혁수가 다시 해군 정복을 입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격침 당했다는 고속정에, 징병된 병사들도 있었습니까?"

"... 그렇습니다."

"장교나 부사관이 아니라 일반병사도 있었다는 말씀이죠?"

"예, 그렇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천혁수가 헛소리를 뱉었던 사내를 바라본다.

"병사들의 죽음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희생된 병사들과 군인들이야 절차대로 진행해야지요."

"그 유가족들의 입도 막을 생각입니까?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해할게 아닙니까?"

"군사작전 중 대외비라는 얘기로 둘러대면 될 거 아닙니까? 늘상 있던 일인데 왜 꼬투리를 잡는지... 쯧."

쾅! 테이블을 내려치는 천혁수.

"그게 국방부 장관이라는 자가 할 소리야!"

버럭 소리를 지른 천혁수의 서슬퍼런 기세에 장내에 앉아있는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모멸감으로 국방부 장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대통령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국방부 장관.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놈들이 때렸으면 우리도 직사랄 나게 조져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단 소립니까!"

어느새 장내는 천혁수 후보자와 국방부장관의 싸움터로 변질되고 있었다.

"못할것도 없지."

"하!"

뭐라 말은 못하고 온 몸 가득 어처구니 없다는 표현을 하는 국방부 장관.

"현 대통령님의 눈치를 살피느라 설설 기자 뭐 그런거요?"

정곡을 찔렸는지 국방부 장관이 '크음'하는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말씀 가려서 하세요 천혁수 후보자!"

"네 놈이나 말을 가려서 해! 버러지 같은 놈이 이상한 자리에 앉아서는... 쯧."

호통을 치며 혀를 찬 천혁수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대통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통령님 집권하시는 동안 북한에 돈을 제법 썼다는 것 압니다만 그 대가가 우리 병사들의 피라면, 납득 할 수 있으십니까."

"크음..."

"저기 김씨 일가 놈들을 그런 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하려는 태도가 문제란 얘깁니다! 우리가 북한 놈들보다 약소국도 아니고! 맨날 툭 찌르면 윽, 하고는 곳간을 열어주니 저것들이 기고만장 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전쟁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전쟁하자고 했습니까? 김씨 일가가 절대 전쟁은 막으려고 발악을 할 겁니다. 우리가 하자고 달려들어도 싫다고 할 놈들이란 말입니다."

국방부 장관이 혼잣말을 궁시렁 거렸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걸 아는 새끼가 조용히 넘어가자고 그래!"

다시 한 번 그에게 천혁수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과연, 이 자리에 있는 대선 후보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한 대 맞았으면 죽일 듯 패자, 그게 내 의견이고 내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 이 사실을 함구할 생각이 없으니 그리들 아십시오, 이 회의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언론에 기자회견을 열 테니."

"당신 정말 막 나가자는 거야!"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난 국방부 장관이 천혁수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오냐, 네 놈이 처 맞고도 병신처럼 가만히 있자고 대통령을 살살 꼬셨다고 내가 꼭 떠벌려 주마."

"저, 저, 저런 미친!"

천혁수는 국방부 장관에게서 시선을 돌려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더 할 말씀 없으면, 나가 보겠소."

"후우..."

대통령이 크게 한 숨을 내쉰다.

슬쩍 다른 후보자들을 바라본다.

다른 후보자들 역시 뭐라 할 말이 없는지 대통령의 눈을 피했다.

"이게 눈치를 살필 일입니까 대통령님? 우리 군인들이 흘린 핏값은 받아야 할거 아니오!"

해군 정복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는 대통령.

"작전회의 해봅시다. 북한의 무력도발과 이번 교전에 대한 보복 공격에 대해서."

< 제 217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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