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6화. >
매일같이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태어난다.
일상처럼 일어나는 일에 특이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을 그런 날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달랐다.
“응애, 응애.”
“응애에, 응애에.”
2002년 6월 28일 워싱턴 D.C의 시각으로 오후 7시 12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내 아이, 태양이와 별이가 태어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막 루시의 배속에서 나온 아이라 물리적으로 예뻐 보이기 힘든 몰골일테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존재를 손에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간호사가 내 품에서 태양이와 별이를 빼앗아 어디론가 데려가자 온 몸 가득 아쉬움이 올라온다.
이내 진이 빠진 듯 병원 침대에 누워 가냘픈 숨을 내쉬고 있는 루시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고생했어, 루시. 고마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중 하나라더니, 정말인가봐 우진··· 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녀의 말이 엄살이 아니라는 건 현재 그녀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쌍둥이기에, 또 산모와 태아를 위해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루시.
덕분에 아이들과 산모 둘 모두 건강한 상태였고, 의사의 설명으로는 아주 대단한 ‘순산’이라 얘기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쌍둥이라는 이유로 제왕절개 수술을 추천했던 의사지만, 루시는 자신의 건강과 더불어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이제 정말 아빠가 되었네.”
내 말에 루시가 지친 상태임에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싫어?”
“그럴리가.”
루시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는 이내 들어온 간호사들이 그녀의 침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간호사를 따라 그녀와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고생했다. 루시.”
“우리딸··· 고생했어.”
“장하다 우리딸!”
“고생하셨어요 언니.”
분만실 바깥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루시를 칭찬했다. 주르륵, 루시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장모님 록산나 여사도, 그리고 우희도. 여자끼리는 뭔가 통하는게 있을까? 어느새 기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들.
대비 할아버지와 장인어른 그리고 나는 그저 뿌듯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언니, 우리 오빠 머리채는 잡았어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우희의 농담에 루시가 울다가 풋 하고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니···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럴 새도 없더라.”
“에이, 이때 아니면 언제 남편 머리채를 잡아본다고, 아쉽다.”
“푸훗, 다음에 셋째 낳을 때는 꼭 그렇게 해 볼게.”
제법 농담도 할 만큼 회복되었을까 싶지만, 간호사가 우리를 훑어보다 말했다.
“이제 산모님 이동하겠습니다.”
장모님과 우희가 루시를 따라가고, 어느새 곁에 다가온 장인어른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긴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아니긴, 우리도 잠시 쉬자고.”
“그러세.”
바깥에서 한 참을 서성이고 계셨을테니 두분은 피곤할만도 했다. 나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서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루시에게 가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좋은 소식을 우리 할아버지에게 전하는 건, 루시의 몫인 것 같아서요.”
“음, 그것도 그렇군.”
대비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럼 쑤에게 좋은 소식까지 전하고, 그 다음 쉬지.”
장인어른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서둘러 루시가 향한 곳으로 움직였다.
***
천혁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계와 전화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필이면 오늘, 쯧.”
백철웅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작게 혀를 차며 천혁수의 기분에 동조한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백부님, 별일 없을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후우··· 내가 갔어야 하는데 내가.”
“전화만 받고 바로 출발하시죠? 비행기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그게 맞겠지?”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무려 증손자, 증손녀가 태어나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시간으로 오전 10시에 가까워진 시간.
-따르
벨이 채 한 번을 울리지 못하고 바로 수화기를 들어올린 천혁수.
“오냐!”
-젠틀 천~!
수화기 너머 조금은 지친 것 처럼 느껴지는 루시의 목소리에 천혁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오냐, 우리 손주 며느리, 크게 문제는 없고? 건강한게냐?”
-풋, 내가요 아니면 태양이 별이가요?
“당연히 우리 루시지!”
-정말요?
“그럼!”
-나중에 태양이 별이가 컸을 때, 젠틀 천이 태양이 별이보다 이 엄마 루시를 더 사랑한다고 얘기해도 되는거죠?
“물론이지!”
천혁수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루시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던지는 농담 속에는 무사히 ‘출산 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 계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나도, 나도 아쉽구나··· 안 그래도 이제 막 출발 할 생각이다. 내 증손자 손녀들 얼굴도 보고, 우리 사랑스러운 루시 얼굴도 보고.”
-에이, 며칠 있다 오셔도 되는데. 어차피 저도 잔뜩 부어서 이상한 꼴이라.
“무슨 소리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지.”
-역시 젠틀 천은 항상 날 기분좋게 만들어요. 태양이 별이는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젠틀 천! 얼른 오셔서 한 번 안아주세요.
“그래그래, 자세한 얘기는 가서 하자구나, 지금 바로 출발할테니.”
-네~ 기다릴게요!
“오냐!”
싱글벙글, 헤벌죽.
그런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천혁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백철웅은 저도 모르게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과연 최근에, 아니 그를 모시면서 경험했던 그의 얼굴들 중 저런 표정을 지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천혁수를 위해 바쁘게 이곳 저곳에 전화를 하며 비행스케줄을 최대한 빠르게 잡느라 바쁜 와중에 걸려오는 전화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걸려온 이 전화가 어떤 변수가 될 것이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보좌관님.
“왜.”
-··· 연평도 부근 NLL에서 북한군과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시발.”
어지간해서는 욕을 하지 않던 백철웅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바쁘게 옷을 갈아입고 있을 천혁수에게 뭐라 말 해야 할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측 대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우선 교전수칙에 정해진 메뉴얼로 대응하고 있으나, 이미 청와대에서는 바쁘게 대책회의를 진행중입니다. 해당 사항은 각 대선 후보자들에게 필수 전달사항이라 전달 받았습니다.
“후우··· 우선 알겠다.”
-예.
전화를 끊은 백철웅은 잠시 씁쓸하게 닫혀있는 천혁수의 방문을 바라보다 이내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비행기 취소해.”
-예.
“차 대기 시켜, 청와대.”
-예.
크게 심호흡을 한 백철웅이 천혁수의 방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방 안으로 들어가니 천혁수는 어느새 멀끔하게 정장을 입은 상태였다.
“백부님.”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천혁수가 덜컥 굳었다.
거울로 비춰지는 백철웅의 얼굴은 심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혁수 역시 뭔가를 느낀 모양인지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했다.
“뭐야?”
“북한군이 도발을 한 것 같습니다.”
“늘 있던 일 아닌가?”
“이번엔 사태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무슨 사태?”
“모든 대선 후보자에게 청와대가 전달 할 정도의 상황입니다.”
“하.”
고개를 푹 숙인 백철웅이 말했다.
“현재 청와대 내부에서 회의가 진행중인 모양입니다. 참석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다른 후보자들은?”
“여당후보와 야당후보는 당연히 참석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후우··· 제기랄.”
천혁수가 고개를 돌려 우희와 천혁수, 그리고 루시와 천우진이 함께 찍혀있는 가족사진을 쳐다보았다.
“염병할 놈, 꼭 이렇게 약을 올려.”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천혁수가 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오냐, 나다.”
-예, 할아버지.
“쯧··· 루시에게는 사과를 해야 할 것 같구나.”
-왜 그러세요?
“북한군 미친놈들이 지랄을 했어.”
-아!
팍 인상을 찌푸리는 천혁수.
“우진이 네 놈은 또 뭔가를 알고 있었더냐?”
-아뇨아뇨, 요즘 조용하다 싶어서.
“후우··· 어쨌든 별 거지 같은 회의가 있다하니 참석해야지 싶구나··· 루시 마음 잘 추슬러 주고, 며칠 뒤에 보자.”
-예 할아버지.
전화를 끊은 천혁수가 조금전 싱글벙글 행복 그 자체였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흉신악살의 살인귀 같은 얼굴로 말했다.
“가자, 파란 지붕으로.”
“예! 백부님.”
그 서슬퍼런 기세에 잔뜩 기합이 들어간 백철웅은 크고 절도 있게 대답한 뒤, 서둘러 집 밖으로 천혁수를 안내했다.
***
전화를 끊는 소리에 잠에서 깼을까? 지쳐 잠든 것 같던 루시가 날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 깼어?”
“허니 목소리가 별로여서.”
“아냐, 한국에서 약간 문제가 있었어.”
“문제?”
“응,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며칠 뒤에 오실 것 같네.”
루시가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문제인데?”
“북한은 알지?”
“응, 공산국가.”
“그 놈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거든?”
“아아, 한국은 휴전 국가이니까···”
“응, 우리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아, 그건 놈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지, 김씨 일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루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으, 어려워 복잡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우진.”
“하하, 그렇지? 내가 말이 길었다.”
일반 병실의 침대와는 다르게 굉장히 넓은 침대에 누워있었던 나와 루시. 루시는 내 품을 파고 들며 말했다.
“아냐 그냥 복잡한 이해관계는 됐고, 짧게 핵심만 얘기해줘, 우진 목소리는 듣기 좋으니까. 자장가 삼아서 들을래.”
“하하, 알겠어. 그러니까 짧게 요약하자면, 우리나라는 휴전중이지만 북한의 김씨 일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끔 우리를 도발해.”
“도발?”
“군사도발이라고들 얘기하지.”
“전쟁을 일으킨다는 얘기야?”
“전쟁까지는 아닌데, 아슬아슬하게 말이야.”
“그, 한국 표현으로 깐족거린다?”
어설픈 발음의 ‘깐족’이란 표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응, 맞아 깐족거려. 아쉽게도 피해를 입는 건 항상 우리 군인들이지만.”
“아, 군인들이 다치는구나.”
“응, 가끔은 민간인들도 다치기도 해.”
“와··· 확실히 한국은 위험하구나.”
“국경 근처만 그래, 휴전선 근처나.”
루시가 ‘흐음’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스륵 고개를 들어 올려 내 눈을 바라보고는 말한다.
“태양이 별이도 이제 한국에서 살아야겠지?”
“······”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난 알 수 있었다.
북한의 무력도발에 질릴만큼 질린 나는 아무렇지 않지만, 익숙하지 않은 루시가 느끼기에는 ‘위협’이나 ‘위험’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태양이와 별이가 살아갈 나라에 총탄이 난무하단 생각이 들 법도 싶었다.
“한국이 대응이 너무 물러서 그 놈들이 그러는거야.”
“그러다 진짜 전쟁이라도 나면 어떻게?”
“절대 그럴일 없어, 김씨 일가 놈들은 전쟁이 나는 순간 자신들의 나라가 망할 걸 알고 있거든.”
“정말?”
“정말.”
“근데 왜 깐족거려?”
“뭔가 필요한게 있나보지, 아니면 요즘 월드컵 때문에 우리나라가 유명해지니까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게 유치한 이유로 총을 쏜다고?”
아마도 이번에 쏜 것은 총이 아니라 ‘대포’쯤으로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테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흠, 태양이와 별이가 한국에 가는건 조금 생까해 봐야 할 것 같아 우진.”
감히.
북한 놈들의 허튼짓 때문에 루시가 불안에 떨고, 나의 핏줄이 한국땅을 밟지 못할수도 있단 생각에 속에서 분노가 차 올랐다.
별일 아니다 타이르고, 강하게 주장한다면 루시는 못이기는 척, 한국에 들어올 것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지만, 어쨌든 그녀가 일말의 불안감도 느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그리고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루시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며 확언했다.
“앞으로 북한 놈들이 깐족거리지 못하게 만들테니까 걱정하지마.”
내 말이 허세로 들렸을까? 루시는 피식 웃으며 알겠다는 듯 내 품 안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아 우진은 너무 따뜻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 지금은 따뜻한게 아니고 뜨거운걸 걸?”
“응?”
“아냐, 쉬어.”
어두운 조명 아래 병실의 유리창에 비친 내 두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머릿속엔 김씨 일가의 그 역겨운 얼굴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또, 딱 두 음절의 단어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다.
‘감히.’
< 제 21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