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2화. >
마사지를 받으니 한결 편안한 몸뚱이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북경에서 한국까지 고작 두시간 남짓의 짧은 비행이기에 피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쉽시다."
대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에 호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급하게 처리할 거 없죠?"
"예, 회장님."
"특이사항도 없고요?"
호석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어젯밤 백부님께서 대현의 정상영 회장과 GL그룹의 구운혁 회장과 술자리를 가지셨습니다."
뜻 밖의 소식이기에 '오'하고 놀란 감탄사를 터뜨렸다. 대충 어째서인지 알 것 같았다.
호석의 입에서 거론된 두 명은 제법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아마 전경련의 '단합'에서 제외된 인물들일 터.
"살아날 기업은 정해진 모양이네요."
무미건조하게 뱉어낸 말에 호석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보자고요? 과연 전경련의 입김이 국민들의 민심에 얼마나 작용할지."
"예, 회장님."
"진보와 보수의 단합이라, 이야 진귀한 구경을 하겠네요 독재시절 이후로 오랜만에."
피식 웃는 호석.
"마치 겪어 보신 것 처럼 말씀하십니다."
"아, 그런가요? 뭐 그냥 그때는 그렇지 않았을까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때도 그다지 단합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독재타도를 외치면서도 제 살길을 찾았다는게 맞겠죠."
"어느 집단이던, 어느 사람이던 마찬가지겠죠, 자기 살길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자~ 일 얘기는 됐고, 쉬기로 했으니 쉽시다. 대표님도 좀 쉬세요."
"예, 회장님."
***
모든게 바스락 거릴 것만 같은 사막 한 가운데.
물 한 모금, 아니 한방울이 절실할 것 같은 그 곳에 양팔을 쫙 벌려 묶여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알 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저벅저벅.
그의 앞에 다가온 SKY PMC 대원은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고 수통 내부에 물이 찰랑 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눈이 반쯤 풀려 있거나 감겨있던 오사마 빈 라덴의 두눈이 번쩍 뜨여지며 수통을 따라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총기를 내며 움직인다.
뽕.
대원의 손에 의해 수통의 뚜껑이 열리자 빈 라덴은 코를 벌렁 거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매마른 입술을 가까스로 벌린다.
"너의 주적은?"
대원의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던 빈 라덴.
"주, 중국."
힘겹게 입을 열어 대원이 원하는 답변을 내 놓지만 대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통을 들고 있는 손을 천천히 바닥을 향해 기울였다.
쪼르르륵.
귀하디 귀한 생명수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위에 떨어지며 빠르게 땅 속에 흡수된다.
"늦었다."
그의 말에 빈 라덴이 분노로 가득찬 갈라진 절규를 쏟아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처절하게 생명을 갈구하는 절규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대원은 망설임 없이 뒤 돌아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빈 라덴의 절규는 짧았다. 심신이 더 이상 버틸수 없는 한계치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툭.
모가지는 힘 없이 아래로 쳐지고 그의 몸에 말라 달라 붙어 있는 소금기는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촤아아악.
갑작스러운 물 벼락에 혼절했던 빈 라덴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한데 엉켜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머리카락을 지나 흐르는 물을 마시기 위해 혀를 할짝였다.
척.
고개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턱을 잡아 고정시킨 대원이 물었다.
"너의 주적은?"
"중국, 중국, 중국, 중국... 중국......"
미친듯이 중국을 읊조리며 혓바닥을 날름 거리는 빈 라덴.
그제야 대원은 놈의 묵인 손을 풀어준다.
"물, 물, 물!"
"그렇게 마시면 죽는다."
대원은 결코 빈 라덴에게 수통을 건내지 않았다.
그저 빈 라덴의 온몸을 향해 다시 한번 수통에 들어 있던 물을 뿌릴 뿐이었다.
***
꽃 피는 춘 삼월.
진보당의 후보와 보수당의 후보가 치열한 네거티브 설전을 벌이고 있었고, 나의 할아버지 천혁수는 언제나 지지율 1위를 지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신문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시끄럽길 바라는 것 처럼 들리는구나?"
"전경련이 움직인다길래 과연 뭘까 싶어서요?"
"물 밑에서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겠지."
"그런 것 치고는 보수도, 진보도 서로 깎아먹기에 바빠 보여서요."
피식 웃으며 내가 보고 있던 티비를 힐끗 거린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저 둘 중에, 누가 제 놈들에게 더 이득이 될까를 가늠질 하고 있지 않겠더냐?"
일견 설득력 있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이죠? 한일 정상회담."
"그래."
"참석자 명단이 휘황찬란 하던데요?"
유력 대선 후보자들역시 정상회담 자리에 '초대'받았다.
또 일본에서도 정부 고위 관료들 뿐 아니라, 각 당의 정치인들이 참석하는 특이한 '회담'으로 진행되는 이번 정상회담.
전 삶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원래라면 고키부리 놈과 그를 보좌하는 몇놈들만 왔었던 정상회담이, '나'라는 존재가 일으킨 나비효과로 전래가 없던 특이한 일이 되어버렸다.
유력 대선 후보자인 우리 할아버지도 당연히 해당 회담자리에 참석이 확정되었고 말이다.
원래라면 정계에 발을 디밀지 않는 할아버지가 이미 대통령 후보가 된 순간, 전 삶의 역사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쓸모 없는 지식이 될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높은 지지율,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오르겠네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피식 웃기만 하고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측 회담 참석자 명단에 '고키부리 전 총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각 정당의 인물들 역시 어느정도 할아버지에게 '충성맹세'를 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모든게 로스차일드의 지하 저장고에서 가져왔던 '금' 때문이었다.
"이제와 네 놈의 공로를 인정 해주랴?"
"에헤이, 좋은날 왜 또 삐딱하실까."
"쯧쯧 이 놈이 이제는 할애비랑 아주 맞 먹는구나."
딱히 틀린 말씀은 아니니 피식 웃으며 TV의 채널을 돌렸다.
"이 놈아 보고 있다."
"신문만 보고 계시면서."
"귀로 다 듣고 있다."
"맨날 듣는 뉴스 지겹지도 않으세요?"
"하루 종일 이 천혁수 세글자를 칭송하는데 지겹겠더냐."
"그러니까 지겹죠."
사실이 그랬다.
정치, 사회 분야에 큰 이슈가 별 게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뉴스 내용이 현 대통령, 보수당 후보, 진보당 후보,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천혁수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다른 뉴스와 할아버지 뉴스가 다른 점이 있다면, 할아버지 뉴스는 대부분 미담이고 다른 후보자들의 뉴스와 현 대통령의 뉴스는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네 놈은 오늘도 집에서 빈둥거릴 게냐?"
"누가 들으면 한량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등따숩고 배부르게 집에서 놀고 먹으니, 그게 한량이지 다른게 있더냐?"
"직원들 교육 잘 시킨 덕분에 편한거 아니겠습니까?"
"교육은 얼어죽을, 돈이나 뿌렸겠지."
"그게 그거죠, 돈 보다 확실한 교육법이 있습니까? 자본주의, 아니 쩐본주의 세상에."
"쯧쯧."
굳이 부정은 하지 못하시면서 혀만 차신다.
"그리고 아쉽게도 오늘은 이 불초 손자도 스케줄이 있습니다."
"그래?"
"예."
"무슨 스케줄?"
며칠만에 집 밖으로 나간다 하니 그게 몹시 궁금하신 모양이다.
"이것만 끝나면 미국으로 슝~ 하고 날아갈 스케줄이죠."
신문을 접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할아버지.
"이 놈이 또 의뭉을 떠는구나."
"오늘 밤 뉴스랑 내일 밤 뉴스는 제법 보는 맛이 날 겁니다. 오랜만에 새로운 소식일테니까, 그것도 또 며칠 내내 떠들겠지만."
"흐음..."
과연 무슨 소식인지 몹시 궁금해 하는 할아버지.
"대충 제 뉴스 말고 할아버지 뉴스는 알 것도 같네요, '일본의 전 총리 고키부리! 천혁수 후보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다!' 쯤이겠죠."
"네 놈 스케줄이나 말 해 보거라."
"거참 매번 아시면서 물으세요?"
"뉴스로 확인해라?"
"정답."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한다.
"네 놈의 능력이 일 푼만 모자랐어도 진즉에 다리몽둥이가 부러졌을게다."
"하하하, 미리 알면 재미 없잖아요?"
"과연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확실히 대선 뉴스마저 묻힐 만큼 대단한 스케줄인 모양이지?"
"그럼요, 대 SKY그룹이 움직이는데요."
"신규 사업이라도 할 모양이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뉴스로 확인하시고요, 전경련 단도리 잘 하셔야하지 않을까요? 이게 정치라는게 워낙 변수가 많은 놈이라."
할아버지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는다.
"재벌 놈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돈놀이 하던게 나다. 이제와 놈들이 두려울까."
나는 피식 웃으며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가 저 정도로 자신감을 내비치시니 더 이상 대선에 관련해서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 싶었다.
막 2층으로 오르기 위에 계단에 발을 올려 놓을 때,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제를 모르는 승냥이 떼를 처리하고, 남은 고기들은 좀 양보 하거라."
막 올렸던 오른발을 떼고는 뒤 돌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양보요?"
"그래."
할아버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내 얼굴에서 무엇을 읽으셨을까? 아니면 눈에서 무엇을 읽으셨을까?
"나라가 기업에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위험도 분산시키고 내수 시장 정도는 내 줘도 좋지 않을까 싶구나."
"대현이랑 GL과 뭐 거래가 있던 겁니까?"
"쯧, 할애비까지 잡아 먹을 기세구나."
퉁명스러웠던 내 대답이 불쾌하셨을까? 할아버지의 몸에서 오랜만에 태산을 호령하는 산군의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당연한 제 것을 양보하라니 드리는 말씀이죠."
"과한 것은 부족하니만 못해,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게다."
할아버지의 눈을 보니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실 모양이다.
짧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할아버지 말 처럼 내수 시장에 큰 미련은 없었다. 그저 뿌리가 대한민국이기에 대한민국 시장에서 최고가 되어야 할 뿐이었다.
이미 굳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양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능력 없는 것들이, 자격 없는 것들이 어부지리 하는 꼬라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요?"
내가 양보 할 것이라 생각하셨는지, 차갑던 눈매를 부드럽게 바꾸시고는 말씀하신다.
"2할 이면 충분하지 싶구나."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재주껏 가져가라고 하세요. 그것까지는 양보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오냐, 자격 있는 놈들이라면 재주껏 가져 가겠지."
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말 했다.
"간덩이가 작아서 제 놈들이 가져가지 못하겠다면, 굳이 아가리에 물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할아버지 역시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지, 능력 없는 것들에게는 쥐약일 테니까. 품을 들여서 헛 지랄 할 필요는 없을테지."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오냐, 일 보거라."
"예."
< 제 21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