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1화. >
치이이이익.
재계서열을 위에서 아래로 줄세우고 그 선두에 서 있는 대현 그룹의 정상영과 GL그룹의 구운혁 회장의 술자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초라한 고깃집.
그래도 회장들이 왔다고 통째로 빌렸기에 그들의 수행원을 제외한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
적당히 익은 고기를 파절이에 올려 놓고 숟가락 머리 부분으로 소주병을 따고는 정상영의 술잔에 한 잔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 따라서 잔을 들어올리는 구운혁 회장.
"자, 한잔 합시다."
"이집이 단골이시라더니, 확실히 냄새가 좋습니다?"
"우리 때는 이런 고기도 귀하지 않았소? 나는 이때가 참 좋았습니다."
짤그락.
"크으."
"캬, 얼마만인지."
정상영이 자신에 손에 들린 작은 소주잔을 바라본다. 이내 구 회장이 소주병으로 손을 옮기자 얼른 먼저 소주병을 잡아 구 회장의 잔에 술을 따라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요?"
"천혁수... 그가 대통령이 될거라 확신하시냐 그 말입니다."
정상영의 질문에 구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전경련이 모였으니 상대편도 힘은 제법 쓰겠지만 글쎄요... 솔직히 우리가 같이 모였다 해도 SKY만큼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상영.
"그리고 전경련 노괴들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만 두려운게 아닙니다. 천혁수... 그 분 역시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잖소?"
"파하, 세대가 바뀌면서 천혁수 그 노괴의 두려움을 몰라서이지 않겠소?"
"그것도 그렇구려... 이제 우리도 뒷방 늙은이가 될 때가 되었나봅니다."
정상영가 구운혁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이놈들아, 귀때기가 간지러워 잘 수가 없구나."
그들의 귓가를 때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입구를 마주보고 있던 정상영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구운혁 역시 놀란 눈을 떴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정상영과 구운혁에게 다가온 인물은 털썩 구운혁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됐어, 뭐 대단한 놈 왔다고 엉덩이를 떼?"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둘에게 인사를 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천혁수였다.
"전경련의 애송이들은 다 어쩌고 네 놈들 둘이 나와 있는게냐?"
친한 동생들이라도 만난 것 처럼 편안하게 얘기하는 천혁수. 그의 앞에 있는 둘이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대현그룹과 GL그룹 수장이라는 걸 사람들이 안다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지도 몰랐다.
구운혁은 언제 놀랐냐는 듯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송이 놈들이 우리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더이다."
"네 놈이 벌써 뒷방 늙은이가 된 게야?"
"아이고, 어르신 어르신이랑 겨우 9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이제 형, 아우라도 하자고?"
"푸핫, 됐습니다. 그럼 더 늙어보이지 않습니까?"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정상영가 구운혁이 공손하게 두 손으로 천혁수의 술을 받는다.
둘의 잔에 술을 따른 천혁수가 자연스럽게 정상영에게 소주병을 건네고는 빈잔 하나를 들어 올렸다. 정상영은 눈치껏 그의 잔에 술을 따른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들 셋이 모종의 관계가 있어 보일 정도였다.
"잘 했다. 그래도 대현과 GL은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 일이 편해지겠어."
천혁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마치, 너희 둘이 없으니 나머지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듯한 느낌.
"대현과 GL이 합세했어도 대세는 달라지지 않았겠죠."
정상영의 자조적인 말에 구운혁 회장은 씁쓸하게 웃고, 천혁수는 파안대소를 한 뒤 말했다.
"대한민국에 다시 경제위기가 올 뻔 한게지."
너무나도 쉽게, 아주 어려운 것을 말하는 천혁수.
"기업들이 망하면 도처에 실업자들이 깔릴게 아니더냐?"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혁수는 전경련의 노괴들, 정확히 천혁수를 견제하려는 기업들을 도산시키겠다 공공연히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상영과 구운혁은 뚫어져라 천혁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셔."
명령조로 얘기하고는 저 혼자 술잔을 비운 천혁수, 이내 둘도 그를따라 술을 비운다.
"유보금이나 많이 확보 해 둬, 떨어지는 콩고물 정도는 양보를 해 줄테니."
정상영과 구운혁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 역시 기업가이고 대한민국의 재벌가였다.
천혁수가 얘기하는 진의를 모르지 않았다.
"SKY가 다 품지 않으시고요?"
구운혁의 말에 피식 웃은 천혁수가 말했다.
"내수시장 그거 조금 먹어서 뭐가 달라진다고? 손주놈은 내가 알아서 막아 줄테니, 이 참에 네 놈들도 덩치좀 키워, 기업 하나가 나라를 먹여 살리는게 좋은 일이 아니지."
정상영이 눈을 굴려 구운혁과 천혁수를 번갈아 살핀다.
천혁수가 술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눈깔 굴러다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이놈아. 진심이니까 의심하지 마. 내가 네 놈한테 허튼소리 할 정도로 노망들진 않았으니."
"아, 예."
"정 회장님도, 구 회장님도. 좋은 시절 못 겪고 가셨으니, 네 놈들이라도 좋은 시절 구경하다 가거라."
"예, 어르신."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상영이 조심스럽게 술을 한잔 따르며 묻는다.
"나머지 그룹들은..."
천혁수가 피식 웃는다.
"우리 손주놈 손 속이 영... 대충 알지 않나?"
구운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한다.
"하하, 손자분께서 저보고 담배 불을 붙이라고 하더군요."
"음? 네 놈한테?"
"예."
"이 놈이 버르장머리가 쯧."
"하하,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술 한잔 하면서 풀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GL화학의 영업이익이 3배 늘었고요."
"그럼 다행이고, 너무 불쾌해하지 마시게, 손자놈이 워낙 서럽게 살아서 그러니."
"약육강식, 적자생존 세상 아니겠습니까? 자본주의에 살고 있으니 손자분께서 윗 사람이지요."
천혁수가 뚫어지게 구운혁을 바라본다. 과연 그가 한 말이 진실에서 비롯된 말인지 파악하고 싶은 모양.
"거짓은 없습니다 어르신, 저 구운혁입니다."
"오냐, 믿어야지."
"자, 마셔, 오늘은 마시고 죽자!"
***
장저민이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 앉은 눈으로 발가 벗은 여인들을 쫓아냈다.
여인들은 별 다른 반항 없이 침실을 벗어났고, 여인들이 나가자 보좌관 왕지언이 빠르게 침대 맡으로 걸어와 쟁반위에 놓인 컵을 건낸다.
"천마를 갈아, 꿀과 버무렸습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지언이 내어 준 음료를 비워낸 장저민.
"천가는 무엇을 하고 있지?"
"어제 호텔에 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전용기가 오후 2시에 활주로를 예약한 상황입니다."
"눈뜨자 마자 한국으로 간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찌뿌둥한지 온 몸을 비트는 장저민에게 왕지언이 말했다.
"지압사를 부르겠습니다."
"좋지, 타클라마칸 사막 쪽에 자네 육촌 아우가 있다고 그랬었나?"
"예, 각하."
"내몽고 지역은 누가 담당하지?"
"황충광이 담당하는 지역입니다."
"아아, 황가의 장손?"
"그렇습니다."
"놈을 한 번 불러."
왕지언이 눈을 크게 뜬다.
"중앙으로 말입니까?"
장저민이 팍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경고 차, 격려 차."
"아아, 예."
"위구르 쪽은 네 육촌이라니 믿는 것이고, 황가 놈들은 아직 믿을 수 없으니까. 여차하면 육촌놈을 한 단계 위로 올리던가 해야겠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내린 왕지언이 '예!'하고는 크게 대답했다.
"감시는 느슨하게 해주 되, 지반을 확실하게 다지면 보고 해."
왕지언은 과연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천가 놈이 제 놈의 땅에서는 대한민국 법을 우선하겠다 해도, 이 땅은 우리 중화의 땅이야."
"아아..."
왕지언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장저민을 우러러보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럼... 여차 하면?"
장저민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SKY전자의 기술을 빼 온다면, 그들의 시스템을 확실하게 가져온다면, 그때 사냥이 끝났으니... 개는 삶아야겠지."
"뜻한 바, 전달하겠습니다."
"후진다오 놈의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예!"
***
오전 11시.
누군가 날 깨울리가 없으니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 내가 일어나지 않고 잠을 잔다면 예정된 스케쥴을 뒤로 미룰 뿐, 정호석이 날 깨울리가 없었다.
"아오."
밤 새 머릿속이 복잡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사막에서의 여독이 차마 풀리지 않은 상황이라 근육통이 겹쳤다. 장저민이 주던 독주의 영향도 없지는 않으리라.
"일어나셨습니까?"
호텔 거실로 나오니 정호석과 그의 곁에 미녀 하나가 서 있었다.
"피로하실 것 같아, 마사지사를 준비했습니다."
멀리 욕실을 가리키는 정호석,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어느새 마사지 베드가 셋팅되어 있었다.
"좋네요."
슬쩍 시계를 보니 출국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여차하면 전용기가 기다릴테니, 이래서 돈이 편했다.
오일을 발라 마사지를 하던 마사지사가 조용히 호석에게 말했다.
"근육이 많이 뭉치셨습니다. 많이 피로하셨던 모양이에요."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물었다.
"밤 사이 잠자리가 불편하셨습니까?"
"아, 머리가 복잡해서."
"어제의 연장선입니까?"
"예, 그렇죠."
나는 슬쩍 눈만 돌려 마사지사 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믿을 수 있습니까?"
호석이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천가 키즈입니다."
마사지사가 천가 키즈라니 몹시 놀랐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어떤 것도, 아무것도 듣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철저한 교육이 느껴지는 대사였다.
호석이 부연설명을 이었다.
"이번에 교육했고, 앞으로 회장님의 의료진과 함께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의료진이요?"
"아프간에서 넘어오는 길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VIP경호 임무에서 의료진과 마사지 사 등, VIP를 위해 최선의 팀을 꾸리는 게 괜찮겠다는 그런 사업 아이디어였습니다."
확실히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언제 어디서든 응급처치와 피로를 풀기 위한 마사지사까지.
"정 대표님 아이디어에요?"
내 질문에 호석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철웅이 아이디어입니다. 요즘 백부님께서 피곤하시다고..."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네요, 오랜만에 마음에드는 사업보고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니 나는 편하게 말을 이었다.
"밤새 고민해봤습니다."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장저민이 과연, 고비 사막을 주려는 이유."
"답은 찾으셨습니까?"
마사지사에게 완전하게 몸을 맡기며 말했다.
"대충 몇가지 지레짐작 할 수 있습니다만."
"무엇입니까?"
"내 환심을 사려는 것이 하나겠죠? 놈의 사람으로 완전히 만드는 과정이랄까?"
"또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사막을 발전시키면 꿀꺽 하려는 셈이겠죠."
"아아."
"그러니까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골치거리 땅 덩이를 우리가 발전시키고, 놈의 아가리에 고스란히 집어넣게 되는 경우의 수가 발생하더군요."
호석은 과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는다는 말이 있죠."
"토사구팽 말씀이십니까?"
"아마 장저민은 중국에 공장을 세운 우리 기업의 기술을 훔치고, 완벽하다 생각했을 때, SKY의 모든것을 가져가려 할 겁니다."
"그렇군요. 보안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피식 웃었다.
장저민의 간악한 간계 따위는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대충 뭉뚱그려서는 알 수 있었다.
"놈이 간과 한게 두가지 있습니다."
호석은 몹시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첫째는 변수죠."
"변수라..."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부터 고비 사막을 종횡무진할 알 카에다 놈들이란 변수."
"아아. 그럼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내 표정이 변했을까? 마사지사가 흠칫 손을 떠는게 느껴졌다.
"내가 개새끼가 아니라는 것."
"으음..."
"사냥꾼 주제에 용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마사지사의 손이 멈추고.
호석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반대로 사냥꾼을 잡아 먹어야죠."
나 역시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제 21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