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03화 (203/458)

< 제 203화. >

비행기가 창공을 가르는 사이, 단 잠에 빠져있던 나를 깨우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떴다.

"회장님, 말씀하신 시각입니다."

슬쩍 팔을 들어올리니 중국 북경시간에 맞춰져 있던 파텍필립 시계의 시침이 오전 10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센스있는 호석은 미리 승무원에게 얘기해 준비했는지 시원한 물 한잔과 따뜻한 차를 준비해놓았다.

물 컵을 들어 비우니, 이어서 전화기와 찻잔이 놓여진 쟁반을 앞에 놓고는 사라진다.

"읏차~"

기지개를 켜고는 위성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시계를 중국의 시간에 맞춰 놓았던 이유. 장저민에과 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호석이 언질을 해 두었으니 내 전화를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없었다.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소.

익숙한 음성, 위에서 아래를 오시하는 그런 음성이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는 그런 태도.

"할 얘기가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나 역시,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 루시가 있었군, 어쨌든 루시를 제외하면 세상에 두려울게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를 시전했다.

-푸핫, 보통 안부를 먼저 묻는데 바로 용건이 튀어나오는 군, 이래서 내가 천가를 좋아합니다.

"피차 바쁘지 않습니까?"

-그렇죠, 말씀하세요.

"타클라마칸에 적당한 지반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직원들이 일을 열심히 한 모양이에요."

-오, 목표하던 지형지반이 있던 모양이군, 다행이오.

"해서, 물자 이동과 더불어 조금 더 심층 조사를 취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베이스 캠프도 건설할 생각이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지 장저민이 '하오'하더니 말했다.

-통행에 문제가 없게 만들어달라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더불어서 베이스 캠프를 짓는 물자를 좀 지원해주면 더 좋겠고요."

-하하, 베이스 캠프를 짓는데 필요한 물자가 얼마나되겠소? 대국의 아량으로 얼마든지.

"허면, 오늘중으로 직원들을 보내겠습니다."

-음, 그대가 직접 오기는 힘든 모양이오?

"위성전화잖습니까? 지금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

"조만간, 그러니까 며칠내로 중국을 한번 방문할까 하니 그때 뵙기로 하죠?"

-그렇다면야, 알겠소 그때 보도록 하지.

"그러시죠."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장저민이 말을 붙였다.

-시안과 우한쪽에 공장설립은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소? 상하이 쪽에는 이미 SKY그룹의 직원들이 들락거린다는 소리는 들었소만.

"이번에 중국을 방문하며 그 쪽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아아, 그렇군. 약속대로 그 지역의 인민들 중 일부를 고용하겠지요?

"물론이죠, 직원의 70퍼센트 이상을 중국 국적의 인재들로 채운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알겠소, 내가 미리 해당 지역의 인텔리한 친구들을 알아보리다.

대놓고 인사 간섭을 하겠노라 선언하는 장저민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70퍼센트라 말했지만 중요 요직에 중국인이 앉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중국인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아니던가, 중화사상이라는 것으로 똘똘뭉친 그들은 쉽게 컨트롤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언제든 공안과 당을 위해 충성을 다할 사람들이니까.

"그러면 더 일이 편하겠습니다. 미리 인재들을 선별해준다 하니."

-하하, 천가는 나만 믿으시오, 약속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니.

피식 웃으며 말을 뱉었다.

"그럼 타클라마칸으로 향하는 우리 직원들도 프리패스겠군요."

-그럼, 감히 나 장가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보고 간섭을 할 공안은 없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직원들에게 맘 편히 다녀오라고 얘기해줘야겠군요."

-일정만 얘기해준다면, 숙소까지 알아 봐 주리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받기만 해서야 면이 살지 않죠, 마음만 받겠습니다."

-크핫, 나 장가의 마음을 거절하다니... 천가가 방문하는 날 밤새 술판으로 복수를 해 주겠소.

"기대하죠."

혀가 길어 짜증나던 통화를 끝내고 적당한 온도가 된 찻잔을 들어올렸다.

"한국까지 얼마나 걸리죠?"

아무도 없어 보였으나 내 질문에 어디선가 나타난 호석이 답했다.

"세 시간 남았습니다 회장님."

"아프간까지 허가는 받았죠?"

"예, 이미 통보를 하고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할아버지 일어나셨나요?"

"예, 아침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아, 금방 나가겠습니다."

"예, 아침 준비하겠습니다."

대충 물로만 샤워를 하고는 가운을 입고 그대로 식당칸으로 자리를 옮기니 할아버지가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잘 주무셨어요?"

"집만 하겠더냐."

"바로 기자회견 있다죠?"

"오냐, 어쨌든 출마선언은 해야하지 않겠더냐?"

"잘 생각하셨네요."

"지금도 늦은 편이지, 보통 12월에 모두들 선언을 했으니."

"당내 경선을 치룰 사람들도 있는데요 뭘."

훨씬 일찍 일어나셨는지 어느새 식사를 끝낸 할아버지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아예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지 않을 생각이겠지?"

"그럼요, 카메라가 쫙 깔려있을텐데, 굳이 정치한다는 분이 기업인이랑 붙어 있어서 좋을게 있나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할아버지.

"무소속 출마라서 아마 주목 좀 받으실 거에요."

"왜?"

"현 대통령도 반쯤은 무소속이었으니까요? 결국은 당이 있었지만. 좀 겹치는 부분이 있잖아요?"

"흠, 무소속으로 출마 선언한 놈이 더 있는 것으로 안다만?"

"되겠어요? 정보국 소속인 사람이."

"그것도 그렇지."

할아버지가 보고 계시던 예상 후보 서류 중, 몇개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 그리고 이 사람까지 아마 할아버지랑 삼파전 되겠네요."

"그래?"

"이 사람은 인권변호사 오래 하면서, 또 청문회에서 이름을 날렸고, 이 사람은 보수정당의 몰표를 받는 사람이니까요."

"우진이 너는 이 할애비가 되리라 확신하더냐?"

"작년 연말 여론조사에서도 무려 73퍼센트, 할아버지가 신뢰 받고 계셨습니다만?"

"정치적 활동을 쉰지 제법 되지 않았더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키부리 전 총리가 한국에 와서 할아버지한테 고개 숙이면서 인사만 해도 여론은 다시 끌어오를걸요?"

"하긴, 한국인이라면 일본인에게 이를 갈지. 아프간을 걸쳐 중국에 간다고?"

"예, 저번 정상회담 이후로, 장저민이 중국에 SKY공장을 차려달라고 하네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묻는다.

"북벌인가 하는 것의 일환이더냐?"

"예, 어느정도는."

"어느정도?"

"무력적인 정벌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니까요, 그럴 무력도 없고, 경제적 지배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죠."

"한 나라의 정상이 그리 만만한 인물이더냐, 그 놈도 필시 너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중국에 공장을 차리라 했겠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장저민은 점점 실권을 잃고 있거든요, 아직 군부쪽에서는 힘을 꽤 잘 쓰고 있지만, 역대 주석들이 조금씩 조금씩 군부를 견제하면서 약하게 만들어 온게 지금 장저민에게 손해를 주고 있죠."

"그 후진다오라는 놈에게 밀리고 있다?"

"명목상 후계같은 느낌인데, 실제로도 그렇겠습니까? 핏줄이 섞인 것도 아니고."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정치 한다는 놈들, 권력에 취한 놈들은 제 자식에게도 칼을 들이미는 법이지."

"그러니까요, 아직까지 꽉 정권을 틀어쥐고 놓고 싶지 않아 하니까요, 아무래도 중국의 경제 성장을 시킬 방법을 마련하고 싶겠죠."

"그게 SKY고?"

"예. 글로벌 15대 기업이라는데 군침이 뚝뚝 흐르겠죠, 놈들 눈깔에는 대한민국의 기업이라 쉽게 삼킬수 있을 것 처럼 보일테고."

"제법 객관적으로 보고 있구나."

"그래야죠? 비즈니스니까?"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지만, 특히나 '때놈'들은 더 믿어서는 안 된다."

"하하, 때놈이라,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네요."

내가 가볍게 여긴다 생각했을까?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쉬이 여기지 말거라, 때놈들은 이상한 사상에 찌들어 있으니까, 반드시 뒤통수를 치는 종자들이라는 얘기다. 장저민이라는 놈이 SKY를 중국땅에 들여 놓으려는 술수가 있을게야."

"예, 기술이나 훔치려고 기웃거리겠죠."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다 마시셨는지 커피잔을 내려 놓고는 자리에 일어나며 말씀하셨다.

"자신있는 모양이니 먼저 일어나마, 마저 들거라."

"예, 예쁘게 하고 나가세요 카메라 앞인데."

"어련히 알아서 할까."

***

입국장의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촤라락'거리는 셔터소리가 요란하게 공항 내부에 울려퍼진다. 웅성이던 소리도 적어지고 모두가 게이트 바깥으로 나오는 노신사에게 집중한다.

딱 떨어지는 갈색 헤링본 스타일 더블버튼 수트를 입고, 짧은 백발을 포마드 기름을 발라 넘긴 멋들어진 노신사는 천혁수였다.

짙은 눈썹과 산군의 카리스마를 담은 두 눈에 기자들은 절로 침을 꼴깍 삼키며 작은 단상위에 오르는 그를 주목했다.

"국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야인이 되었던 천혁수 인사드립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에게는 묘하게 사람들의 이몫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공항을 방문한 일반인들도 바쁜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집중할 만큼 말이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는 다름아닌, 제 1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평소 천혁수를 알았거나, 아니면 당찬 그의 포부에 호응하기 위해서인지 이곳 저곳에서 박수세례가 쏟아졌다.

"지치고 힘든 국민들, IMF의 여파를 채 이겨내지 못하신 국민여러분! 이 천혁수가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키고, 나아가 세계 열강들에게도 무시 받지 않는 대한민국을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욱 확실한 신뢰를 얻을 수 있는바, 출마 선언은 짧게 줄이기로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천혁수가 가는 길을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시기를 간청하며 인사드리겠습니다."

웅성웅성.

기자들은 정말 짧은 출마선언에 어리둥절했다.

"저게 끝이야?"

"이렇게 짧다고?"

"보통 이러쿵저러쿵 30분은 내리 떠들지 않나?"

"심지어 질의응답도 없네?"

"여론조사 1위는 달라도 다르구만."

"그 천혁수 잖은가? 일본 총리도 고개 숙인다는."

"에이, 그건 그 총리가 이제 전 총리가 되서 그렇지."

"하여간 복지부장관 할때도 대단하더니, 앞으로 재미있겠어, 지켜볼만 하겠는데?"

"이건 뭐, 거의 삼파전 확정인가?"

"그렇다고 봐야지?"

시끄럽게 떠드는 취재진을 가르고, 천혁수는 당당히 보폭을 옮겨 자신의 차량에 올랐다.

***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지만 아프간의 태양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뿜어내며 등줄기에 땀이 흐르게 만들었다.

건조한 모래 바람에 절로 입과 코를 가릴 수 밖에 없었다.

미군의 아프간 주둔지에서 주둔지 사령관이라는 존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지 뜨거운 눈빛을 보냈지만 굳이 그와 어울려주지 않았다.

사령관정도 되는 위치와 겸상을 할 만큼 미국에게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부쉬와 연결이 되는데 그 아래와 새로운 줄을 대는 것도 멍청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짚차가 요란한 엔진음을 멈추고, 곧이어 차량의 문이 열렸다.

"도착했습니다 빅 보스."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느라 저릿한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며 주변을 훑었다.

보이는 것은 황량한 사막이요, 약간은 붉은 빛이 도는 모래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카불에서 최북단 작은 마을입니다."

"쿤다즈인가 뭔가 거기인가요?"

"예 거기서도 좀 더 북쪽입니다."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대원들의 안내를 따라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열악하기 그지 없는 집안 구조에 절레절레 고개가 저어지지만 참았다. 현재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을 대원들을 생각해서였다.

문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방 안에 들어가니 작은 간이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사진과 뉴스에서만 보던 '벌레'가 앉아서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영어는 할 줄 알겠지? 빈 라덴."

< 제 20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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