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00화. >
내가 놀란 이유는 인수제안서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혹시나 우리 할아버지가 대비 할아버지를 이겼다고 해서 대비 할아버지의 록펠러 재단과 록펠러 은행을 모두 삼키려는가 우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대호의 탐욕은 끝이 없다 생각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발코니로 자리를 옮기니 부드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할아버지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비 할아버지가 보였다.
"아, 우진."
대비 할아버지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서류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하고는 얼른 서류를 살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우리를 감시 한게냐?"
우리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도 잊은채 얼른 서류부터 살폈다.
"이 놈이 어른이 얘기 하면 대답을 해야지?"
"아니 할아버지, 이거 뭐에요?"
나는 서류를 펄럭거리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쫙!
할아버지의 두툼한 손바닥이 등짝을 후려치고, 그 모습에 대비 할아버지는 민망한지 고개를 스륵 돌린다.
"제법 건방져 졌구나, 할애비가 얘기하는데 도끼눈을 뜨고."
"아니 서류가 너무 허무맹랑 하잖아요?"
"무엇이?"
"기껏 힘들게 가져와서 홀랑 넘기시겠다고요? 염가에?"
그랬다.
서류에는 대한금고의 미국지부.
즉, 로스차일드 뱅크를 모두 흡수한 대한금고를 록펠러 뱅크로 넘기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네 놈이 시킨일이 있어 사업체를 제대로 운영하기 힘드니,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사업체가 가야지. 당연한 일 아니더냐?"
"아니 전문 경영인같은 제도도 있습니다만?"
"쯧쯧, 세상 낭만에 빠진녀석. 남을 믿느니 차라리 우리 식구를 믿는게 맞지, 대비 라면 누구보다 믿을만 하지 않으냐?"
"아니 그러니까 고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넘기는 형태여서 그렇잖아요?"
"이 놈이 갈수록 욕심이 커져서 어찌할꼬..."
할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이내 대비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려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말했다.
나와의 대화는 한국말이었기에 대비 할아버지가 제대로 알아듣기는 어려웠을 터.
"대비."
"그래, 수."
"자네가 잘 맡아서 키워주시게, 아직은 젊고 욕심이 많은 손자놈이 제자리에 안주할까 염려되 넘기고 싶지 않구만."
"그런 뜻이었나?"
"그래. 어차피 자네나 나나, 죽을때 싸 짊어 지고 갈 것도 아니고, 다 물려주고 갈게 아니던가?"
대비 할아버지가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자격이 있다면야."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이 양반들이, 저는 할아버지들 재산에 눈꼽만큼도 관심 없다니까요?"
"녀석 좋으면서 튕기기는."
"하하하 입꼬리가 벌써 귀에 걸린 것 같은데?"
"진짠데?"
"됐고, 가서 차나 내오거라, 얘기를 하느라 목이 타는군."
"에휴..."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까.
유일하게 내게 명을 할 수 있는 우리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발코니에서 막 발걸음을 떼려는데 뒤통수에 대비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보게 수."
"왜 그러나."
"참, 자네 볼 면목이 없구만."
"무엇이?"
"이리 쉽게 양보해 줄것을... 내가 사심을 담지 않았는가? 정말이지 원..."
"내 손주 잘 봐달라는 뇌물일세."
"우진이야 모자란 구석이 없는데 잘 보지 않고 베기겠는가?"
"딸가진 부모가 언제나 손해인 법이지."
"하하, 그건 맞지."
"그리고, 아직 SKY는 부쉬의 눈을 피하는 것이 나아, 자네나 내 그늘에 숨어있는게 좋다는 얘길세."
"아직 덜 컸다는 것인가?"
"손주놈은 자신만만하여 국가의 힘을 얕잡아 보고 있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정권의 만행을 말일세."
"그렇지."
절로 발걸음을 늦추며 두분의 얘기를 훔쳐 듣는데 할아버지의 호통이 뒤통수를 때렸다.
"이 놈아 훔쳐 듣지 말고 얼른 다녀 와!"
하는 수 없이 두 분의 궁금한 대화는 듣지 못하고 차를 내오라는 명에 따르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천우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천혁수가 말했다.
"욕심도 많고, 자신감도 넘치는 손자놈이 어쩐지 나는 위태롭게 보인다네."
데이비드 록펠러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곧 있으면 우리는 뒷방 늙은이가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매는 손자놈 대신해서 맞아주는 것이 할애비로서의 도리 아니겠는가? 특히, 대비 자네는 알지않는가? 정권의 무서움을."
"그렇지... 뼈저리게 느껴보았지."
"우진이 녀석은 타개할 방법들을 도처에 깔아 놓는 듯 하나,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히고 있네, 이왕이면 조금 덜 묻히면서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가..."
"대비 자네도 많이 도와주시게, 내가 잘못 살아서 세상에 믿을만한 놈이 몇 없구만."
"그중 내가 하나고?"
"크하하, 사돈이자 친우인 자네를 못 믿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록펠러가 피식 웃으며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수, 자네가 바라는 바. 내가 반드시 지켜주겠네."
"그래, 우리가 대신 맞자고 저 어린놈이 맞는 것을 차마 지켜보기 어려울테니 말이야."
"글쎄, 우진이 성격에 맞고 있을 놈이 아니니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야."
"위태위태 해, 저놈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처럼, 올곧게, 대쪽 처럼 한 길만 걸어가고 있지만 도처에 낭떠러지가 즐비하니 조금만 삐긋해도 끝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네."
"그래, 우리가 중심을 잡아주지."
천혁수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나는 이제 한국에 가야겠네, 우진이 놈이 노래를 부르던 자리에 앉아야겠지, SKY그룹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일이라는데, 도움을 줘야지."
"내 친우가 한 국가의 정상이 된다면야 나도 환영일세."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쩐지 부러워 하는 것 같은데 대비?"
"크음, 부정하긴 어렵구만."
"자네도 미국 대통령 해 보는 것은 어떻겠나?"
"됐어, 나는 나이가 많아."
"하하하, 나는?"
"대한민국은 자네 나이에도 대통령을 곧잘 하지 않는가? 우리 미국은 점점 젊어지는 추세라 힘들어."
"자네 아들놈은 어떤가?"
"데이비드? 오우, 벌써 망신살을 뻗칠까 두렵군."
***
며칠전, 아프간의 한 사막.
넓게 포위하듯 둘러싼 북부동맹군과 미군들이 쌍욕을 내뱉었다.
"갑자기 철수라고? 도대체 왜?"
"사실상 우리가 이긴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빈 라덴 그 개새끼를 아직 못 잡았잖아!"
"쯧, 상부의 명령인데 어쩌겠어?"
곳곳에서 미군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으나, 이내 그것은 상부의 명령이라는 명분하에 수면아래로 묻혔다. 아프간의 북부동맹군 역시 철수하는 미군들을 붙잡고자 노력했다.
"아직 탈레반의 수장 오마르와, 알카에다의 빈라덴이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움직일게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소."
"제기랄! 애초에 이럴거면 도움을 주지 말지!"
"이미 전력의 85퍼센트를 잃은 놈들이 제대로 된 반항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멍청한! 그건 당신들이 우리 아프가니스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야! 이 미친 종자들은 조금만 틈이 보여도 무장단체가 되어버린다고!"
"그거야, 내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른 것 아니오? 북무동맹군이 정권을 어떻게 휘두르냐에 따라 얼마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제기랄 그래도 철수라니! 그건 안 됩니다!"
미군의 책임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했다.
"그래도 완전한 철수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일부 병력을 다른 곳으로 옮길 뿐, 주둔지는 그대로이니 놈들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내정에 힘을 쓰세요."
"까드득... 다 잡은 상황에서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첩보가 없으니, 별 수 없지."
"저 안에 있다는게 확실한데! 제기랄!"
강한 화력을 지닌 미군이 철수하는데, 북부동맹군 오합지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도 철수를 감행했다.
모든 군인들이 철수하는 와중에도 한 무리의 무장단체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철수하던 북부동맹군들 중, 그들을 이상하게 본 한 병사가 말했다.
"저 치들은 뭔데 철수를 안 해?"
"이봐, 말 조심하라고."
"왜?"
"저들이 그 유명한 하늘부대야."
"거, 검은머리?"
"그래, 쥐도 새도 모르게 모가지 따이고 싶지 않으면,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는게 좋을걸?"
"그, 그래야겠군."
어마어마한 병력이 떠난 황량한 사막.
하늘부대 혹은, 블랙헤드 용병단으로 불리우는 SKY PMC대원들은 위장복과 위장막을 사용해 사막의 바닥과 하나라도 된 듯 조용히 잠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스륵, 스륵.
가까이에서 보면 모래가 꿈틀거리는 듯 보이나 멀리서는 그 움직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심스럽게 작은 마을을 향해 움직이는 대원들.
-치익, 잠시 휴식.
무전 한 번에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던 모래들이 죽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치익, 모두가 철수 했는데 자리를 지키는게 맞는지?
-치익, 빅보스의 지시다.
-치익, 확인.
-치익, 해가 질때까지 교대로 휴식을 취하라.
-치익, 확인.
***
내가 쟁반에 차를 내왔을 때는 이미 대화는 사라지고 체스판이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달그락 거리며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 놓았다.
"SKY PMC는 왜 아직도 아프간에 남아 있는 것이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 하시던 얘기나 이어서 하시지 왜 갑자기 제 사업에 질문을 하세요?"
"녀석, 입이 대빨이나 튀어나왔구나."
"아니거든요?"
대비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는 SKY의 직원들이 걱정되는 모양인데?"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있으니까요 물자보급도 문제없고, 얼마전에 '승리'선언에 따라 사실상 탈레반은 거의 절멸 상태인것도 맞고요."
"빈 라덴이나 알 카에다, 탈레반까지 완전 소탕은 아니 잖으냐?"
"지금 미국은 바빠요."
"바쁘다?"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비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
"어째서 바쁘지?"
"아프간에서 얻어 먹을게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이라크에도 손을 뻗어볼까 탐욕의 저울을 달고 있거든요."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는 두분.
"미국이 또 전쟁을 낼 거란 얘기냐?"
"예, 이라크에 묻힌 석유가 탐이나는 모양이에요."
"으음..."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다 묻는다.
"너는 미국이 실수를 하고 있다 생각하는 구나."
"예,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이는 헛지랄을 하게 될 겁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대비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우진이 말이 사실이라면 부쉬에게 언질을 주는 것이 옳지 않겠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두세요. 간절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이 더 극적으로 보이니까요."
대비 할아버지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간절할때 도움을 준다?"
"예. 지금이야 지지율도 좋고 평도 좋지만 앞으로 계속 그럴 수 있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면 우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겁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현 시점에 전쟁에서 SKY가 미국에게 도움을 줄 것이 있더냐?"
"있죠."
"무엇을?"
"명분? 명예?"
대비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미군이 놓친 알카에다 놈들이나 빈라덴이라도 잡아 놓은 것 처럼 말하는 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그 모습에 할아버지도, 대비 할아버지도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설마?"
"혹시?"
< 제 20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