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98화. >
짹짹.
참새가 우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루시의 팔이 어느새 내 가슴팍에 올려져 있기에 조심히 떼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저택 사용인들이 날 발견하고는 눈짓으로 아침인사를 건네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며 복도 중앙의 발코니로 나갔다.
청아한 하늘 내리쬐는 햇빛.
내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뒤쪽에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예, 대표님도 잘 주무셨죠?"
"그럼요, 내집처럼 편안하게 보냈습니다."
절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인사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기지개를 켰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호석이 어쩐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는 묻는다.
"밤이 제법 길었나 봅니다."
그가 왜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후우,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원래 와이프 잔소리를 이길 수 있는 건 세상에 없는 법이죠.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그가 건네는 시가를 받아 들며 말했다.
"뭐 있겠습니까? 남자는 육탄돌격이죠."
"오우, 무리수 중에 하나를 두셨군요."
"그게 무리수입니까?"
"아직 신혼이고, 이제 그런일이 처음이니 루시 아가씨가 받아들여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요?"
"그럼요, 화가 났을 때 시도하는 스킨쉽은 때에 따라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죠."
"으음, 조심해야겠네요."
"다 경험이 해결해주지 않겠습니까?"
시가연기를 길게 뱉어내고는 흘깃 호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즐거운 얼굴이시죠?"
약간의 비꼼과 언짢음이 들어간 음성에도 호석이 '하하'하고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힘들어 하는 일이 있다는게 재미있어서 그렇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너무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시니 가끔은 '기계'인가 싶었거든요."
"이건 뭐,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이 안 되네요."
"인간적인 모습이다 뭐, 그런 생각입니다. 신선하기도 하고요 대 SKY그룹의 오너가 알고보니 '애처가'다 하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호석이 매우 그렇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루시 아가씨가 기상하려면 멀었나요? 록산나 사모님이 아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 금방 깨우고 갈게요."
"예, 회장님."
식탁에 둘러 앉자마자, 장모님 록산나 여사가 루시의 옆구리를 푹 찌르고는 말했다.
"너는 도대체가."
"왜엥?"
"우진의 얼굴이 저게 뭐니? 어제 십수시간을 비행해서 온 사람한테."
장인어른 데이비드 4세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다. 그의 눈빛을 보건데.
'고생 많았네. 결혼 생활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하고 위로 하는 것 같았다.
록산나 여사와 루시간의 정겨운 대화에 배시시 웃으며 식탁 위를 관찰하던 우희와 눈을 마주쳤다.
'너였냐?'
'뭐가?'
'루시한테 이상한거 가르치지 마라.'
'그런 적 없는데?'
눈빛으로 공방을 주고 받다 우리 할아버지와 대비 할아버지가 도착하고 나서 식탁은 조용하게 변했다.
"음? 노인네들 따돌리는게냐? 어째서 우리가 오니까 식탁이 조용해져?"
대비 할아버지의 말에 우리 할아버지는 피식 웃지만 내심 서운함을 숨기지 않는다.
"할아버지들이 워낙 남자남자 하니까 다들 그 기세에 눌린 것 아닙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대비 할아버지도 '사내다움'이라는 상남자적 마인드에 환장하시는 분들이니 일종의 아부라면 아부였다.
피식 웃으며 표정이 풀린 두 할아버지가 식탁에 앉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편안함이 올라왔다.
와이프보다, 여동생보다, 장인장모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할아버지들이 가장 편하게 느껴진다니... 나도 영, 신세대는 아닌 모양이다.
식사가 이어지는데 내가 입을 열었다.
"루시와 뉴욕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루시.
"루시는 몰랐던 모양인데?"
"집에만 있어서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뉴욕에 있는 친구들도 좀 만나고 오랜만에 내 마누라랑 좋은 시간 보내고 올 생각입니다."
입꼬리가 들려지는 것을 참고 있지만 루시의 눈치를 보자니 적잖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이 그러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더냐? 안 그런가 수?"
"성인들 아니던가? 알아서 결정들 하겠지."
고개를 돌려 록산나 여사를 바라보았다.
사실 허락은 필요 없지만, 지금은 임산부인 루시를 걱정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옳은 처사였다.
"난 찬성, 집에서 게으름이나 피우느니 나가서 돌아다녀, 루시도 운동을 좀 해야 해."
"무슨! 하루에 2시간씩 요가 하고 있다고!"
장모님은 허락을 해 줬고 나는 자연스럽게 장인어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생각 했을 때 루시는 아직 안정......"
록산나 여사가 불쑥 내게 질문을 던졌다. 말을 끝내지 못한 장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희는? 우희도 함께가는 건가요, 우진?"
"음, 그 부분은 우희가 결정할 사안이겠죠?"
짧게 대답하고 다시 장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 루시는 아직 임신 초기단계이기도 하고 하니, 주치의가 있는 이곳 워싱턴에......"
"여보, 재단일 바쁜거 아니면 우희도 다녀오라고 하는게 옳겠죠?"
"음? 뭐,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 나는 아직 루시가 뉴욕에 가는 것에 동의......"
"지금 뉴욕 날씨는 어떠려나, 오늘은 루시와 우희와 쇼핑을 할까봐요 여보."
"아 그건 조금 성급한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루시가......"
"쇼핑 찬성! 오랜만에 다 같이 외출 어때요?"
몇번이고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싶어 했던 장인은 쇼핑 삼매경에 빠진 여자들의 대화에 입을 꾿 닫고 식탁을 가만히 바라보다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포크를 들어 올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음식을 조금 가까이 장인어른 쪽으로 슥 밀어주었다.
"자네밖에 없구만."
"후우... 존경합니다 장인어른."
"그래, 유부남의 삶이란 이런 것일세."
"그렇군요..."
나와 장인어른의 눈은 자연스럽게 대비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에게 향했다. 이제는 사별하고 솔로가 되신 두분을 향해 뜨겁게.
두분은 한껏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있을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다시 눈을 마주친 장인과 나는 같은 감정이었다.
'개부러워.'
'개부럽군.'
***
JB모간의 체이스와 골드만글러브의 삭스가 록펠러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으나 나와 루시가 뉴욕으로 향하기로 했으니 전화를 돌려야 했다.
"체이스, 잘 지내죠?"
-음? 우진, 내일이면 볼 텐데 전화를 다 주고.
"하하, 내일 굳이 워싱턴으로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어째서요? 미스터 록펠러가 할 말이 있다던데?
"내일 내가 뉴욕으로 갈 생각입니다."
-아아~ 그렇다면야.
누가 오냐, 가냐는 중요한 일이 아닐수도 있었다. 그러나 록펠러, 그러니까 대비 할아버지도 그렇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을 발 아래 두기를 좋아하시는 양반들이라 조금은 강압적인 것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들이 살아오고 이겨왔던 비지니스적 성공의 결과로 증명하고 있으니 틀렸다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굳이 록펠러와 천가가 싸우는 와중에 JB모간과 골드만글러브까지 끼어들어 싸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부쉬가 내게 양보해준 정계의 간섭은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비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는 체이스와 삭스에게 반 명령같은 언사를 했을테다. 물론 그것은 나 역시 비슷하겠지만, 적어도 불러 놓고 아랫사람에게 하는 명령과 직접 찾아가 부탁을 빙자한 명령은 그 태도가 너무나 다르고 받아들이기에도 달랐다.
내가 하는 처사는 적어도 체이스와 삭스의 자존심, 프라이드를 지켜주는 행동이었다.
"내일 혹은 모레쯤에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우진이 온다면야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요, 삭스 역시 즐거워 할 겁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몸은 괜찮은가요? 쯧쯧, 마피아놈들이 주제를 모르고.
"다행이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주변에 워낙 인재가 넘쳐서."
-기사로 확인했고, 정보로도 확인했지만 신경이 쓰이긴 하더군요. 그나저나 시칠리아와 카모라라는 거대 범죄집단을 쓸어버리다니, SKY 시큐리티가 정말 대단하군, 경호를 맡기고 싶을 정도에요.
"돈 많은 갑부의 의뢰라면 환영이죠."
-푸핫, 이렇게 직설적인 단어는 오랜만이군요, 갑부라니 크큭. 이래서 우진과의 만남은 항상 설레나봅니다. 그럼 이 늙은이는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소.
"좋은 방문이 되기를 희망하겠습니다."
-삭스에게도 직접 전하겠죠?
"그럼요, 그게 예의죠."
-알겠습니다. 곧 뵙죠.
"예."
전화를 끊고 다시 삭스에게 연락을 돌려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는 흐뭇하게 웃던 찰나 뒤통수가 뜨끈뜨근한게 이상한 감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아, 루시."
"아, 루시?"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꽃혔다.
그녀의 두 눈은 어느새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크게 잘못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어느 부분에서 또 화가 났을까? 여자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동물이다.
"뉴욕에 가려는게 나 때문이 아니고 결국은 일 때문이었어?"
저거였군 싶었다.
***
체이스, 삭스와의 만남은 제법 어렵게 이뤄졌다.
우리가 시간이 안 맞아서라기 보다는... 누워서 침뱉기이니 이하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은 반갑기 그지 없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두분?"
삭스가 화통하게 웃으며 날 맞이했다.
"점점 더 멋있어지는군 동양의 천재!"
"언제까지 동양의 천재에요?"
"크하하 영원히?"
삭스와는 상반되게 부드럽게 웃으며 신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체이스.
"역시 얼굴을 마주보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안부를 짧게 묻다가 성격이 급한 삭스가 물어왔다.
"자, 그래서 우리 공사다망한 대 SKY의 오너 우진이 하릴 없이 친분이나 다지자고 보자고 하지는 않았을 테고, 우리 편하게 비즈니스부터 처리하고 놀자고 어때?"
체이스가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살짝 들고는 말했다.
"찬성."
나도 거절 할 필요가 없으니 어깨를 으쓱이며 본론을 꺼냈다.
"로스차일드 뱅크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두분 역시 알고 계시겠죠?"
"물론이지, 놈들은 지금도 짐을 싸느라 바쁘니까 말이야."
"하하, 이제 정말 최고의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5년은 젊어진 기분입니다."
마냥 좋아만 하는 그들에게 얘기를 꺼내자니 참, 곤란했다.
"로스차일드 뱅크의 빈자리에 '내가'들어갈 생각입니다."
이어진 말에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진이?"
"지금, 미국 금융업계에 투신하겠다는 말 입니까?"
제대로 이해했는지 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파이를 나눠 먹기로 했고, 이미 두분도 적당한 파이를 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을 붉힌 삭스가 말했다.
"그것과 로스차일드를 삼키는 문제는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먹은 것 보다 훨씬 덩치가 큰데?"
체이스 역시 삭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럴때 쓰려고 남겨둔건 아닌데 참."
내 말에 둘이 눈을 크게 뜬다.
"맙소사."
"아아... 이렇게 비싸게 써먹는다고?"
나는 찡긋, 윙크를 날리며 나름 귀엽게 말했다.
"대신 이번 한번으로 모든 소원권을 퉁치죠, 두장인가 세장이 남아있었죠?"
삭스가 완전히 졌다는 듯 테이블을 탕! 내려치고는 말했다.
"제기랄, 빠져나갈 구멍이 없군."
"하아... 다시는 홀덤따위 치지 말아야지, 마인드 스포츠는 지랄."
여간해선 욕을 하지 않는 체이스까지 욕을 입에 담았다.
"그럼, 로스차일드 잘 먹겠습니다."
< 제 19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