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97화. >
파주 SKY 인재 양성소.
모든 대원들이 사막에 어울리는 군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 한켠에는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들과 707도 함께 도열해 있었다. 나와 국방부 장관이 단상 위로 올라가니 그들은 하나의 몸짓으로 경례를 올린다.
""단결!""
쩌렁쩌렁하며 묵직한 중저음이 섞이니 심장이 낮게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국방부 장관은 그 모습에 흐뭇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내게 작게 말했다.
"투자한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회장님."
무려 40명의 707과 160명의 특전사를 파견한 대한민국 국방부.
1명당 1억 3천만원이라는 고가의 교육비를 지급했지만 지금 국방부 장관의 얼굴은 만족스러움 그 자체였다. 실제로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몇몇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훈련과정을 보기 위해 방문했다가 기절했다는 것은 안 비밀.
그만큼 위험하고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대한민국 군인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SKY에 감화되어 훗날, SKY PMC혹은 SKY 시큐리티의 대원이 될 테다.
가까이 다가온 호석이 내게 말했다.
"빅보스, 한 말씀 하시죠."
코드명으로 부른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마이크 앞에 섰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가면 스르륵 스르륵 소음을 자아낸다. 나는 마이크에 손을 올려 전원 버튼을 끄고는 가만히 아래에 도열해 있는 대원들을 살폈다.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칠 순 없지만 최대한 많은 대원들의 눈을 보려 노력했고, 이내 입을 열었다.
"잘 들리나!"
아랫배에 힘을 주고 힘껏 외쳤다.
""예!""
큰 소리로 대답이 들려온다.
"적에게 자비는 필요 없다. 책임은 내가 진다. 가라! 아프간에 도착해 그들에게 '공포'가 되어라!"
긴 말도.
걱정의 당부도.
대원들의 가족 안부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짧고 굵게 SKY처럼.
대원들은 분명 내 눈에서 뭔가를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나를 믿는 것 처럼 나도 그들을 믿는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함께 아프간으로 향하고 싶지만 정호석이 허락해 줄리가 없었다. 워싱턴에 있을 루시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아프간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루시의 잔소리에 죽을게 뻔하니 차마 욕심을 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갑시다. 우리도."
"예, 빅보스."
나는 그렇게 내 가족이 기다리는 워싱턴으로 향했다.
***
부드럽게 움직이는 세단이 워싱턴의 록펠러 저택에 도착했다.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다 나와계세요?"
웃으며 농을 건네니 대비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 우희가 피식 웃는다.
유일하게 웃지 않고 도끼눈을 뜨고 있는 마나님 루시를 보니 어쩐지 긴장이 되는 느낌이다.
도대체 날 이렇게 긴장시키는 사람이 얼마만인지.
"루시, 밥 먹었어?"
"기껏 묻는 말이 밥 먹었어야?"
툭 하니 쏘듯 말하는 루시를 피식 웃으며 끌어 안았다. 할아버지들과 장인 장모가 쳐다보고 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당장 루시의 마음을 살피는게 먼저니까.
루시가 퉁명스럽게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지만 그녀도 날 보고 싶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헐리우드 여 배우 뺨치는 외모로 연기를 하고 있지만 눈빛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꿀의 향기는 감추지 못하고 있으니까.
품에 안겨 싫다는 듯 날 밀어내려 하지만 전심전력은 아닌지 귀여운 고양이가 꾹꾹이를 해주는 느낌이었다.
"이따 얘기하자?"
"알았어."
피식 웃고는 대비 할아버지와 장인 장모와 인사를 나누었다.
"들어가자."
대비 할아버지 말에 순순히 안쪽으로 움직였다.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사라지고 어느새 남은 사람은 나와 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대비 할아버지 뿐이었다.
뭔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본격적인 느낌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웃어?"
우리 할아버지의 공격적인 언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약이 오르신 모양.
"혼자 즐거운 모양이구만."
대비 할아버지 역시 공격적이었다.
"할아버지들 적적하실까 봐 일거리 드렸죠, 원래 나이 들수록 움직여야 하는 법입니다."
"썩을 놈."
대비 할아버지는 삐뚜룸 하게 앉아 시가를 입에 물며 말했다.
"수에게만 좋은 것을 주었더구나, 로스차일드를 단숨에 삼킬 수 있는 좋은 무기를 말이야."
그게 불만이셨던 모양.
"어우, 무슨 말씀이세요? 대한민국 작은 시장에만 있으면 답답하실까 시장만 조금 넓혀 드린거지, 대신 대비 할아버지는 유럽진출 하시면 되잖아요?"
"유럽?"
"로스차일드 뱅크가 어디 미국에만 있습니까? 유럽에 있는 것들도 미국이 흔들리면 같이 흔들릴텐데요, 물론 그쪽에 있는 다른 로스차일드들이 득달같이 달려 들겠지만, 그 정도 견제도 없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대비 할아버지는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은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수는 편하게 떠 먹여 주고, 나는 알아서 떠 먹어라? 이건 뭐, 가제도 게 편이라더니 편들어주기더냐?"
"에이, 우리 할아버지는 시간이 없잖아요 시간이, 내일 모레부터 대선에 뛰어들어야 되는데요."
"나는 시간이 남아 돌고?"
"그럼 할아버지도 미국 대선에 출사표 던지시던가요?"
"뭣?"
"할아버지가 미국 대통령 해먹겠다고만 하신다면야 물심양면으로 유럽에 있는 로스차일드 뱅크 가져다 드리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
두분이 피식 웃어버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보게 수, 자네 손자가 하는 말이 그렇게 쉬운 일이었나?"
"나도 오늘 알았네,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요즘것들, 요즘것들 하더니... 정말 요즘 것들은 생각이 다르구만, 따라 잡을 수가 없어."
"그러게나 말일세."
대비 할아버지가 다시 내게 시선을 옮긴다.
"수와 정당하게 싸워서 로스차일드 뱅크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러니 우진이 너는 끼어들지 말거라."
나는 무슨 얘기냐는 듯 우리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 ALL OR NOT. 네놈이 좋아하던 얘기 아니더냐?"
"아니 왜 가족끼리 싸우고 그래요? 돈 때문에? 썩어지게 돈도 많으신 양반들이?"
"이놈아, 사나이 자존심이라는게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의 말에 대비 할아버지가 '암, 암'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린다.
"체이스와 삭스는요? 두분이 싸우면 둘만 좋은 꼴 날 수도 있을텐데요?"
할아버지와 대비 할아버지가 눈을 희번득하게 번들거리며 말했다.
"어딜 감히."
"제깟 놈들이? 흥!"
두분의 안중에 JB모간과 골드만글러브는 애초에 없는 존재들인 모양이다.
"그 둘도 적잖이 서운해 할 텐데요?"
내 말에 피식 웃는 할아버지와 대비 할아버지.
"여차하면 그 놈들도 먹어버리면 될 일이지."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다 가랑이가 찢어진다지? 그게 아마 한국 속담이었던 것 같은데?"
여차하면 JB모간과 골드만글러브를 삼키겠다는 말씀이었다. 솔직히 대한금고의 자금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란 걸 아는 나로서는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물론 수단과 방법은 할아버지가 강구할 문제이지만 이곳이 미국땅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로스차일드 뱅크 문제는 부쉬와 단판을 지었습니다만, 그 이후는 저도 장담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 둘은 욕심내지 마세요, 아직 부쉬의 철퇴를 맞으면 손해보는 쪽은 우리니까."
깔끔한 경고.
"체이스와 삭스는 제가 따로 만나보겠습니다. 로스차일드 뱅크를 양분 하던, 삼분을 하던 그건 두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제가 할아버지들 일이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니까."
할아버지와 대비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네 놈이 허락했으니 우리가 알아서 하마."
"바라는 바 대로 되었구나, 혹여 우진이 네가 서운해 할까 싶었지."
두분의 자존심 싸움.
정확히는 자존심 싸움이라기 보다는 순수한 '재미'를 위한 싸움으로 보였다. 권래롭고 무료한 삶에 한줄기 빛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미국의 돈 귀신과 한국의 돈 귀신이니까 두분의 욕심도 한 몫을 거들고 있을 터.
내 입장에서야 누가 로스차일드 뱅크를 가져가든 상관 없었다. 종래엔 모두가 내 것일테니까.
"순수한 비지니스적 경쟁이지 감정 경쟁은 오바입니다 할아버지들."
"흥, 걱정 할 것을 걱정하거라."
"나와 수가 그럴리 없다."
두분이 호언장담하시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나타난 루시가 우리가 앉아있던 테이블 근처로 다가와 말했다.
"대충 얘기 끝나셨으면 우진은 제가 데려갈게요?"
서둘러 시가를 꺼트린 대비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우리 할아버지도 슬쩍 고개를 돌리며 끄덕인다.
뭔가 서열관계가 애매해진 기분이었다.
"아, 루시 아직 할 얘기가 있어서 미안, 먼저 가 있을래?"
루시가 눈썹을 꿈틀 거리며 할아버지들을 째려본다.
"나는 할 말이 없군, 오늘은 쉬고 싶어."
대비 할아버지가 발을 빼고.
"아, 아침이 잘못 됐나?"
할아버지는 서둘러 화장실로 이동하신다.
잔뜩 배신감이 들었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지만 어느새 호석과 철웅도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스륵.
내 어깨위에 루시의 보드라운 손이 올라와 있었다.
"일어나, 허니."
"어, 그럴까?"
"호호."
"하하."
팔짱을 껴오는 루시를 거절하지 못하고 연행되듯 방으로 향해야만 했다.
철컥.
방문이 닫히는 소리에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우진이 그럴 수 있어?"
"그, 나도 로스차일드 놈이 그럴줄은 몰랐지."
"마피아라고 마피아!"
"그, 그렇지?"
"총도 쏘고! 폭탄도 터트리고! 마약도 하고!"
"워워, 루시 컴 다운, 컴 다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런 위험한 일을 하고 돌아다니라고 내가 일 하라고 허락한 줄 알아?"
"아니지..."
"그걸 아는 사람이!"
도무지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
"아는 무슨 아!"
"루시 체이스와 삭스에게 연락을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루시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내가 이미 연락해 뒀어, 내일 우리 저택으로 방문하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와우."
루시가 이렇게 철저한 여자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게다가 아프간에 가고 싶다고? 그게 말이야 방구야?"
"아니 그런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아가쉬가 알려줬어! 이렇게 말 하라고."
너였냐? 우희야?
배신감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어쭈! 지금 다른 생각하고 있지!"
"아냐아냐, 어떻게 하면 루시에게 진정성있게 사과 하고 내가 항상 사랑하는 루시의 얼굴이 나타날까 고민하고 있었어."
"그럼 지금은 사랑스럽지 않다는 말이야?"
"아니 나는 그 뜻이 아니라."
"그럼 뭔데? 무슨 뜻인데?"
"루시는 항상 사랑스럽지, 그런데 밝게 웃는 모습이 더 사랑스럽다는 그런 얘기?"
얼굴 가득 서운하다는 표정이 된 루시.
"그럼 지금은 덜 사랑스럽다는 말이네?"
"아니 그러니까 그. 잘못했어 내가 말 실수를 했다. 응?"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랬어?"
"저기 루시, 나 오늘 워싱턴 도착했거든?"
"그러니까! 왜 오늘왔어! 그게 문제라고 문제! 더 일찍 왔어야지, 내가 얼마나 걱정했겠어? 기사에는 다치지 않았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도 그런지 어떤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누가 루시좀 말려주세요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일이 나겠지 싶었다.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여자란 존재는 내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 삶에 결혼을 한 번 해볼걸 그랬나 하는 헛생각이 떠오른다. 그만큼 이미 내 영혼은 루시의 매혹적인 혓바닥에 이지를 상실한 상황.
에라 모르겠다. 이런 의기소침한 모습은 나 답지 않았다. 나는 나답게 천우진 답게, 거침없이 직진해야겠다.
"아 몰랑 육탄 돌격."
"뭐? 꺄악, 하지마! 태양이 별이 놀래!"
"아 몰랑!"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수 없게, 루시의 입을 입으로 막아 버렸다.
< 제 19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