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92화 (192/458)

< 제 192화. >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할아버지가 몹시 흥미로워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귀찮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 얘기 해 보거라, 무슨 일인지.

‘돈’얘기를 꺼내니 확실히 할아버지의 돈귀신 감각이 꿈틀거리는 모양.

“대한금고, 미국진출?”

-우리 은행이 미국에?

“그것도 점유율 높여서.”

-호오··· 가능하겠더냐?

“부쉬에게 정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래? 흐음··· 외국계 은행이 들어오는 것은 국가로서 경계해야 하는 일인데.

“정치하는 놈들이 그렇죠, 국가보다는 ‘내’가 먼저인 법아니겠습니까?”

-쯧, 이해했다.

TV를 틀어 뉴스 채널을 보면 주요 이슈는 2가지였다. 알 카에다, 탈레반 정부에 대한 미국의 보복, 로스차일드 뱅크의 존망.

“로스차일드 뱅크에서 떨어져 나올 파이를 대한금고가 흡수했으면 싶어서요, 대선 전까지 잠시 금고좀 핸들링 하시죠?”

-후후, 오랜만에 본업이구나.

“그럼 그렇게 처리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을게요?”

-오냐, 너는 언제 미국으로 넘어오느냐?

“PMC대원들 아프간 가는 건 지켜봐야죠, 목숨걸고 가는데.”

-쯧, 그래. 알겠다.

“오늘 바로 한국으로 넘어갈테니까 내일 할아버지 출국전에는 잠시 뵐 수 있겠네요.”

-그래, 이따 보자.

“옙.”

할아버지와 통화까지 끝내고 나자 진짜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이탈리아 현지 시각으로 내일 오전 9시에 출국이 예정이기 때문에 쉴수가 없었다.

솔직히 누군가 내 스케쥴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니 쉬고 싶다면 언제든 쉴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재 내가 느끼는 피로는 육체적 피로가 아닌 정신적 피로이므로 정신적인 만족을 얻게 된다면 깨끗하게 씻은 듯 사라질 피로이기도 했다.

“토끼 새끼 어디있죠?”

내 질문의 의미를 알았는지 호석이 픽 웃으며 말했다.

“지금 구금조치를 당하고 있을겁니다.”

“어제 기자들이 들이닥쳤던?”

“예.”

“그쪽으로 갑시다.”

“음··· 이탈리아 정부에서 보낸 로마시경찰들이 접견을 거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예, 회장님.”

짧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가다 유럽에서 인맥이 두터울 소피아에게 생각이 닿았다.

자연스럽게 손은 전화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소피아, 천우진입니다.”

-아~ 미스터 천! 안 그래도 안부 전화를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무탈하니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녀와 얘기를 길게 나눌 필요는 없으니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 로마시 경찰과 연줄이 좀 있습니까?”

-무슨 일로 그러시죠?

“로스차일드의 늙은이 얼굴을 좀 볼까 하는데, 현재 구금당하고 있을 곳의 감시를 로마 경찰에서 담당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아, 그 부분은 제가 직접 연락하겠습니다.

“오, 그래주시겠습니까?”

-예, 문제 없을겁니다 미스터 천.

“좋네요.”

할 말이 끝났으니 전화를 끊은 나는 호석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바로 차량 준비하겠습니다.”

“예.”

***

멍하니 전화를 바라보는 소피아.

“소피아? 방금 네 남편에게 전화 온 것 아니었어? 분명 미스터 천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소피아가 팍 이맛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부남이라니까?”

“푸핫,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잉글랜드 축구가 아니지.”

“헛 소리 하지 말고, DP를 어떻게 해야 할지나 고민 해.”

“그 남자는 정말 웃긴다? 제 할말만 하고 딱 전화를 끊은 모양이야? 용건만 간단히, 뭐 그런건가? 으으, 우리 할아버지같아 짜증나.”

“닥쳐.”

“하긴, 그 정도는 돼야 이정도 성공을 하고 그런건가? 며칠전에 마피아 놈들한테 시달렸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몸은 멀쩡하데? 기사에서는 멀쩡하다고 나왔지만··· 혹시나 아랫도리라도 상했다면 우리 숫처녀 소피아는 한 순간에 플라토닉한 사랑을 해야 하는걸까?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

참다 못한 소피아는 독일계 고고학 박사이자 친구인 안나의 입을 틀어 막았다.

“닥치고 네 할일이나 해 제발!”

숨 쉬기 어려운지 시뻘게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 안나. 소피아가 이내 손을 풀어주자 숨을 크게 쉬며 말했다.

“후우, 후우··· 죽을뻔 했다고 소피아! 이런게 바로 숫처녀 히스테리인가? 제기랄! 집에가서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하던가!”

버럭 소리를 지른 안나 덕분에 열심히 천우진이 맡겨놓은 금화를 어떻게 전시해야 할지 고민하던 직원들이 곳곳에서 ‘풉’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덕분에 얼굴이 시뻘게진 소피아가 말했다.

“그 망할 혓바닥을 오늘 뽑아버릴테야.”

표독스러운 얼굴이 된 소피아를 보고 기겁한 안나가 다급하게 양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자, 잠깐! 소피아! 네 허즈번드가 부탁한게 있지 않아? 로마 경찰 어쩌구 했던것 같은데?”

덜컥 멈춘 소피아가 화들짝 놀라며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맙소사 안나 너 때문에 잊어버렸었잖아!”

“그, 그래 빨리 그것부터 처리하라고! 네 허즈번드가 우리에게 의뢰한 금화를 다시 회수해가면 우리 회사가 망한다고!”

“닥쳐, 제발 닥치고 일이나 해!”

“응, 응!”

소피아가 바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이.

안나라는 독일계 고고학 박사는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정말 찔러도 피가 안나올 인간일지도 몰라, 저런 소피아의 구애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니, 대단한 걸?”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의 조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듣기로는 록펠러가의 여식과 결혼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에이, 소피아의 얼굴을 보라고 남자라면 침을 질질 흘리게 될걸? 다른것도 질질 흘릴지도 모르고 말이야.”

“마피아와 로스차일드가문과 관련된 일로 밝혀진 ‘천우진’이라는 인물의 재산 상황은 보신 건가요 안나 박사님?”

“음? 재산? 뭐 이런 금화를 아무렇지 않게 던질 정도면 어마어마한 부자겠지?”

“그가 만든 그룹사의 시가총액이 4천조가 넘는다는 것도 알고 계신가요?”

“그, 그렇게나 부자였어?”

“주변에 소피아 보스같은 여자가 흔한 건 아닐까요? 솔직히··· 헐리우드의 탑 배우 만큼은 아니잖아요?”

“크음, 닥쳐! 닥치고 일이나해! 감히 우리 소피아를!”

“예! 안나 박사님!”

안나는 안타까운 눈을 하고는 평소와 같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있는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사랑하니 소피아. 능력이 너무 잘나도 문제구나···”

***

소더비의 젊은 오너 소피아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더니, 확실히 늙은 토끼가 머물고 있는 곳에 다가가니 진을 치고 있던 취재진들을 막아주는 경찰들이 친절하게 내부로 차량을 들여보내준다.

담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입구에서 현관문까지 거리가 그렇게 먼 것도 아닌지라, 충분히 좋은 카메라의 줌을 당기면 내 얼굴을 식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언론에 굳이 모습을 감출 필요가 없으니 나는 대수롭지 않게 차량에서 내렸다.

멀리서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가 은근히 시선을 빼앗지만 굳이 그쪽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요양’을 핑계로 거부하고 있던 찰나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아마 늙은 토끼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는 분명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리라.

그건, 그거고.

당장은 눈 앞에 일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늙은 토끼의 집사 세바스찬이 우리를 마중나왔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정중한 그의 인사에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방에는 추운날도 아니건만 두껍게 옷을 입고 있는 늙은 토끼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기력이 쇄하였음이었다.

“이거 뭐, 다 죽어가고 있군.”

혼잣말처럼 내뱉었지만, 제법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나도, 세바스찬이란 집사놈도 늙은 토끼 윌리엄도 알고 있었다.

윌리엄이 피식 웃으며 묻는다.

“왜 왔지?”

“마음에 드는 선물을 보냈길래, 겸사겸사 감사의 인사도 전할 겸.”

“하! 네 놈의 선물 덕분에, 이꼴이 났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따위의 선문답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이제와 잘잘못을 거론하기에는 늦었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윌리엄 역시 제대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늙은 토끼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오래토록 살아남은 강자가 아니던가.

“그렇군.”

“어때? 모든걸 잃은 기분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거였나? 끝까지 나를 약 올리고 싶었어?”

날카롭게 쏘아보는 윌리엄.

토끼의 눈빛이 날카로와 봤자 얼마나 날카롭고 무서워 봤자 얼마나 무섭겠는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니까··· 애초부터 저 있었던 게임이란 걸 깨달았지.”

이미 포기한듯한 얼굴이었다.

“늦게 깨달았군.”

내 말에 윌리엄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게··· 먼저 고개를 숙였어야 옳았어.”

짙은 회한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과연, 그가 고개를 숙인다고 결과가 달랐을까를 생각한다면 글쎄, 난 뭐라 확답할 수 없었다.

로스차일드 뱅크가 내 손에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미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공존할 수 없는 사이가 되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로이드라는 망나니가 감히 넘봐선 안 될 여자를 넘 봤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순간, 이미 우리 사이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재판이 끝나고, 보르도의 포도밭에서 여생을 지내볼까 싶군.”

항복선언이었다.

“어차피 로스차일드 뱅크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미국의 사업체 마저 정리될 것이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모양.

늙은 토끼도 눈과 귀가 있으니, 당연히 자신과 연관된 정재계 인사들이 빠르게 자신을 손절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을테다. 조금이라도 느리게 움직이는 놈들은 지금 부쉬의 방망이에 이리 맞고 저리 맞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긴 말은 필요 없겠군.”

나는 스윽.

로스차일드에게 내 목적인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한번 내려다 본 윌리엄이 나를 힐끗 바라본다. 나는 말 없이 세바스찬이 테이블 위에 올려주는 시가를 입에 물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내가 내민 서류를 읽기 시작하는 윌리엄.

“하!”

읽으면 읽을수록 인상을 찌푸리던 윌리엄이 말했다.

“설마 내가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할 거라 생각하는가?”

“글쎄 해야하지 않을까?”

당연하지 않냐는 내 표현에 윌리엄이 서류를 테이블위에 내려치듯 내려 놓고는 성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고작 비지니 놈의 녹음파일 하나로 나를 옭아 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이탈리아 정부가 아무리 전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입증할 증거가 없어.”

늙은 토끼가 아직도 뭔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구나 싶었다. 내가 윌리엄을 고작 감방에 처 넣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

“이봐.”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해보라는 듯 날 바라보는 윌리엄.

“착각하지 마 늙은이, 나도 당신이 이탈리아의 교도소에 갇혀서 남은 여생을 보내길 바라지 않는다고.”

“······”

“이 서류에 사인하기 싫은가?”

“흥! 아무리 로스차일드 뱅크가 공중분해 되더라도 내 퇴직금 정도는 충분히 나올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뭐, 대한민국이란 그 작은 나라의 은행에 우리 은행을 통째로 넘기라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절로 혀가 차진다.

“하여간 쯧쯧,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보고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윌리엄.

“말했지? 나도 네놈이 교도소에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꼬라지를 보고 싶지 않다고.”

뭔가를 깨달았을까? 눈을 부릅 뜨는 윌리엄.

“보르도에서 남은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나?”

눈썹을 꿈틀거리며 분노에 찬 윌리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인을 하고 보르도를 가느냐, 사인을 하지 않고 교도소를 가느냐를 선택하라는 뜻이 아니다.”

“······”

“사인을 하고 보르도 그 촌구석에서 포도나 따 먹으며 조용히 살 것이냐, 아니면 사인을 하지 않고 먼저 지옥을 구경하고 있을 아들놈과 재회하느냐를 선택하라는 뜻이야, 이제 이해가 좀 돼?”

나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사인해, 그러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윌리엄을 똑바로 바라보곤 말했다.

“살려는 드릴게.”

< 제 192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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