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8화. >
정확하지 않은 예측은 언제나 리스크가 되어 돌아온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예측을 했는지에 따라 그 리스크는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가 되어버린다.
“회장님.”
지금 호석의 부름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적어도 이곳 식사 자리에서는 별 일이 없을거라 예측했었다. 놈들이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빠르게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내 경호원들의 수준도 그렇고, 정부의 눈치 역시 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
호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나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호석.
늙은 토끼의 병정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
오후 일찍부터 루시와 우희, 대비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 이번의 예측이 가져온 리스크는 작았다. 만약이라는 변수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난 나는 리스크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비지니, 파벌. 순서대로 시칠리아의 보스, 카모라의 보스가 부하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마음이 급한 모양이네요.”
소피아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길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지만, 분명 시칠리아라는 단어나 카모라라는 단어에서 잠깐, 잠깐 안색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순 잇었다. 그녀가 불안해 할 수 있으니 이 자리에 더 머물긴 어려울 것 같았다.
“여기 음식은 나와 연이 없나 봅니다.”
나는 포크를 내려 놓고 입가를 훔치며 소피아에게 말했다.
“아쉽게도, 일이 생겼네요.”
“아···”
“이곳 레스토랑은 설렘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낭만적이네요.”
이태리에 며칠 머물렀다고 이태리 놈들의 말 버릇이 입에 밴 모양이다. 내 입에서 이런말이 불쑥 튀어나오다니. 낭만적이라며 허연 이빨을 드러내는 소피아를 바라보는데 어쩐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글쎄요, 낭만적일지.”
“예?”
고개를 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석이 챙겨주는 겉옷을 입으며 말했다.
“그럼 금화는 빠른 시일내로 보내겠습니다.”
“예! 반드시 만족할 만한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예.”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변수, 혹은 예측이 틀리는 것은 제법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요즘 부쩍 원하는 것을 쉽게 얻는 것 같았는데 이런 재미요소라도, 이런 변수라도 있어야 삶의 활력이 돋지 않겠는가.
“걱정되지 않으시나 봅니다.”
피식 웃음이 세어 나왔다.
“걱정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데. 루시도, 우희도, 대비 할아버지도 없는데 말이죠.”
“회장님의 안위 말입니다.”
“옆에 정대표님이 떡 하니 버티고 있을텐데 설마요, 아마 놈들이 내게 닿을려면 최소한 대표님은 넘어서고 와야하지 않겠습니까?”
제법 입 바른 소리를 했더니 호석이 길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하하, 예.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 말고 저기, 우리 엘리트 대원들도 넘어야 할테니까요.”
“그러니까요.”
마피아 놈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지만, 정확히는 나를 노리고 있지만 호석과 나는 아주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대원들 역시 크게 긴장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저들은 자신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넘어온 험난한 훈련은, 마피아라는 애송이들을 손 쉽게 찜쪄 먹을 만큼, 난이도가 높았으니까.
문득.
어차피 쉬운 일이라면, 이걸 이용할 길은 없을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단순히 마피아 놈들을 찢는 것이 전부가아닌, 내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생각이.
그리고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내 얼굴에 표현되었을까? 호석이 뭔가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으음, 회장님 위험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지금 회장님의 표정··· 자주는 아니지만 그 표정이 나타날때면 뭔가, 급진적으로 일이 진행되곤 했습니다.”
“어우야, 우리 할아버지랑 같이 일한 시간이 오래되서 그런가, 정 대표님도 돗자리 깔아도 되겠어요? 어떻게 이태리 점집 1호점 차려보실래요?”
“거절하겠습니다.”
점점 대원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어린다. 호석 역시 마찬가지, 내가 내릴 명령이 궁금한 모양.
***
천우진이 머물고 있다는 특급 호텔의 작은 객실, 파벌과 비지니는 한참동안이나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테러를 해야 할지, 납치 작전을 펼쳐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호텔 내부에서는 무리겠지?”
비지니의 물음에 파벌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히려 호텔 내부가 좋을것 같은데?”
“어째서?”
“바깥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경찰 인력을 집중시킨 뒤, 조용한 호텔을 치는 거지.”
“흐음···”
“예를 들자면 이렇게 하는거야.”
“말해 봐, 듣고 있으니.”
비지니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위스키를 들이켜고는 파벌의 입술에 집중했다.
“먼저, 놈이 외출하고 돌아오거나, 혹은 외출하는 순간을 노려야 하겠지.”
“그럼 폭탄이 필요하겠군, 스위치로 작동하는.”
“그렇지, 그래야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날테고, 우리가 그 소란이 일어나는 시간을 불규칙적으로 만들 수 있겠지.”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외출하거나, 복귀하던 놈의 경호원들은 움직일 수 밖에 없을거야.”
비지니가 스륵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확실히.”
“인원이 줄어든 상태에서 객실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우리 동지들이 나서준다면, 바깥의 소란을 틈타 순식간에.”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목 언저리를 손으로 긋는 파벌.
“문제는 놈의 방이 최상층이라는 것이군.”
파벌도 비지니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최상층에는 오로지 현재 천우진이 머물고 있는 방만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방은 없고, 엘리베이터로 최상층에 가기 위해서는 ‘키’가 필요했다. 키를 꽂고 돌려야만 최상층 버튼을 누를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음, 마스터키라도 훔쳐야 하나?”
비지니의 방법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는 파벌.
“훔치거나, 호텔 직원을 사칭하거나, 우리쪽으로 만들어야 해.”
“그래?”
“그다음에 비상구를 오픈 해 놓는 거지.”
“아아, 비상구.”
“원래 최상층의 비상구는 당연히 보안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마스터키나 직원들을 이용해서는 잠시 해제하거나 열어 둘 순 있을테니까.”
비지니가 비어있는 파벌의 온더락 잔에 위스키를 채워주며 말했다.
“자네는 천재가 분명해.”
“동지의 카리스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능력이지, 미국에서도 우리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으니 부러울 따름이네.”
“하하, 이 친구. 내가 이래서 자네를 믿어, 뒤가 안심 되거든.”
피식 웃은 파벌이 말했다.
“너무 안심 하지는 말게, 언제든 자네가 카리스마를 잃는다면, 그 자리 역시 내 자리가 될 테니.”
비지니가 입꼬리를 스륵 들어올리며 말했다.
“걱정까지, 역시 카모라야.”
대충 3시간이나 이어진 작전회의가 끝이나는 것 같자 파벌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무기는 동지에게 맡겨도 되겠지?”
“그 정도는 해줘야지, 자네가 머리를 썼는데.”
비지니가 막 뒤쪽으로 손짓을 하려는 때,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천우진의 곁에 미행하고 있는 조직원들의 중간보스급 인사였다.
놈이 내미는 사진과 서류를 받아든 비지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사진을 파벌에게 내밀었다.
“파벌, 내가 보는게 맞나?”
“흐음, 이상한 놈이군.”
“굳이 호텔을 버리고 별장?”
파벌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3시간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하, 미친 동양인 새끼···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군.”
“쯧, 이러면 별장 인근의 지형부터 다시 조사해야겠는 걸?”
짤그락.
얼음과 유리잔이 부짖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릴 정도로 단숨에 위스키를 비워버린 비지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굳이 특급 호텔 최상층을 버리고 외곽의 별장? 하, 미친새끼··· 하여간 돈 많은 새끼들은 생각을 종 잡을 수가 없어, 난교 파티라도 벌일 셈인가?”
파벌이 샤락샤락 천우진과 관련된 서류를 넘기다 말했다.
“놈의 부인이 임신을 했군, 충분히 가능성 있겠어.”
“쯧. 하여간 사내새끼들은 아랫도리를 조심해야 된다고.”
파벌이 픽 웃으며 말했다.
“우리에겐 좋은 일 아니겠나? 놈이 알아서 외진 곳으로 움직여준다니.”
“다시 작전을 짜야 된다는게 심히 짜증나는 군, 그냥 깔끔하게 죽여버리면 편할 걸, 윌리엄 그 영감탱이가 귀찮은 의뢰를 했어.”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파벌이 이번 만큼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겠나? 그 늙은 여우가 우리 숨통을 쥐고 있는 것을.”
비지니가 다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한숨을 내뱉는다.
“애초에 엮여서는 안 됐어. 뭣 같이 엮였군.”
“놈들과 우리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니까··· 뗄래야 뗄 수가 있나.”
“언젠가 그 늙은 여우의 재수없는 얼굴에 침을 뱉어 주자고.”
“흐음, 그런 날이 오긴 올까 모르겠군.”
다시 한잔의 술을 비운 비지니가 말을 잇는다.
“조사부터 진행하고, 잠깐 마사지라도 좀 받자고.”
“그러지, 나도 몸이 조금 뻐근하군.”
***
차량에 오르자마자 내 의미심장한 표정에 긴장하고 있는 호석에게 물었다.
“놈들은 지금 호텔인근에서 치겠죠?”
“예, 회장님.”
“판때기 한 번 깔아봅시다.”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심 외곽에 별장같은 거 렌트하세요, 오늘은 그곳으로 가죠.”
“회장님, 그건 너무 위험한 결정입니다.”
“아프간 전에 SKY PMC의 위용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미군 놈들이 쉽게 대할 수 없게.”
“으음.”
내가 거기까지 생각할줄은 몰랐는지 호석이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고민이 아니라면 언론에 위상을 떨칠 혹은 범죄집단에게 위상을 떨칠 우리 SKY PMC가 가질 수 있는 이득이 0.0001퍼센트의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를 저울질 하는 모습.
“자신없습니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호석.
“그럴리가요.”
“무장은 준비 됐습니까?”
“예, 정부의 허가를 받은 무장을 꾸렸습니다.”
“그럼 됐네요.”
나, SKY그룹의 오너 천우진은 제법 주요인사고 그런 인사의 경호가 허술할리 없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마피아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경호원들의 무장같은 것은 의외로 쉽게 허가가 나오는 나라였다.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세요.”
“후우··· 놈들이 정말 마음먹고 쳐들어 올 겁니다.”
나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혹시나, 만약에, 1퍼센트 0.001퍼센트라는 일말의 가능성도 배제하고 싶어하는 모습.
“리스크 없는 리턴은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번일이 리스크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어째서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호석.
“대원들이 훈련하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들의 식단, 그들이 마시는 음료, 그들의 배변활동까지 일일이 보고 받고 들으면서 직접 전문가들과 함께 관리했습니다. 그러니 난 내 대원을 믿습니다.”
“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내 사람, 내가 믿어줘야죠, 그래야 내 대원들도 빅보스를 믿어주지.”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의외로 효과는 좋아 보였다.
호석이 약간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운전을 담당하던 대원과 뒷자석에 탑승한 대원들의 후끈한 열기가 내게 느껴졌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이네 굳은 다짐과 함께 대답하는 호석, 대원들은 대답은 없지만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 제 18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