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7화. >
비지니와 파벌 둘 모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처음 의뢰를 거절했던 이유는 미국의 명문가인 록펠러를 암살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로스차일드는 록펠러가 중요인물이 아닌 SKY그룹의 오너라는 동양인에게 집중하고 있기에 둘이 의아함을 보이는 것이었다.
“록펠러가 아니라 이 동양인을 말입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로스차일드.
“이놈은 곱게 죽여서는 안되거든.”
뭔가 원한이 짙게 느껴지는 한 마디에 할 말을 잃은 비지니와 파벌.
“내 앞에 데려오기만 해, 나머지는 알아서 할테니.”
파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우리쪽에서 힘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다행히 지금 록펠러와 천우진 둘 모두 이곳 로마에 있다.”
비지니가 윌리엄 대신 파벌에게 설명했다.
“그들은 지금 중심가의 특급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머물고 있지.”
“아아, 미리 조사가 진행되던 모양이군요. 경호 수준은 어떻습니까?”
“훈련받은 자들이 항상 경계하고 있지, 천우진의 경우 고정 인원 1명을 제외하고는 8명이 3교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더군, 그리고 록펠러는 6명이 3교대를 이루고 있고.”
비지니의 설명이 계속 이어지자 세바스찬이 스륵, 파벌의 앞에 서류를 내려놓는다. 얼마전 비지니의 부하들이 윌리엄에게 보고를 올렸던 천우진과 록펠러의 미행 내용이 담겨 있는 서류였다.
파벌이 잠시 서류를 살피는 사이 자연스럽게 방 내부에는 침묵이 자리 잡았다.
품에서 시가를 꺼낸 비지니가 윌리엄에 눈짓으로 허락을 구하고는 시가를 입에 무는 사이, 철컥 잠겨 있던 방문이 열리며 한명의 사내가 다급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세바스찬이 조용하게 말했다.
“가주께서 업무중에 무슨 실례인가?”
“죄송합니다. 빠르게 보고를 드려야 할 사항이라.”
“뭔데?”
“록펠러의 움직임은 바로 보고사항이라고 들었습니다.”
“록펠러가 움직여?”
“예, 지금 공항으로 이동중입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했기에 자연스럽게 사내의 보고는 윌리엄의 귀에도 들어갔다.
쾅.
탁자를 내려친 윌리엄이 거칠게 물었다.
“지금 록펠러 그 영감탱이가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고?”
“예.”
“제기랄, 세바스찬!”
“예, 가주.”
“출입국사무소에 연락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봐!”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던 서류를 내려놓은 파벌이 말했다.
“으음··· 아무래도 미국에서 우리 카모라가 움직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윌리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쥐새끼 같은 놈들··· 어떻게 눈치를 채고.”
미국.
그것도 워싱턴에서 록펠러를 암살하기란 사실상 요원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또한 비지니 역시 워싱턴이라는 국가의 수도, 대통령이 지근에 있는 곳에서 ‘마피아’짓거리를 하기 꺼려졌다. 당장 목을 내놓고 하는 일인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의 부하들이 워싱턴에 접근하는 순간 FBI와 CIA들이 달려들게 불보듯 뻔했다.
다시 짧은 침묵이 장내에 자리잡았다.
구석에서 작게 통화를 하던 세바스찬이 전화를 끊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윌리엄에게 보고했다.
“출국 신청은 록펠러와 록펠러의 손녀, 그리고 천우진의 여동생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윌리엄이 반색하며 물었다.
“천우진은 아직 로마에 남는다?”
“예, 가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윌리엄이 비지니에게 물었다.
“뉴욕에서는 쉽게 움직일 수 있겠지?”
비지니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곳은 문제 없지요.”
“그럼 목표를 바꾸지.”
“록펠러는 제외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럼 다른 목표는 누굽니까?”
“JB모간의 체이스, 골드만글러브의 삭스.”
휘유~하고 비지니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미국의 금융계를 홀로 쥐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정부에서 가만히 놔 둘까 싶군요.”
“록펠러는 살아있지 않은가? 로스차일드 뱅크 하나가 독점하는 체재는 아니겠지.”
“지금 바로 진행하면 됩니까?”
자신감이 넘쳐 흐르는 비지니.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우선 로마에 남아 있다는 이 옐로우 몽키를 처리하지.”
“아아, 알겠습니다. 파벌 동지와 작전을 짜 보죠.”
윌리엄이 슬쩍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보곤 말했다.
“시간이 없을수도 있어, 록펠러가 로마를 떠났다는 것은 천우진 그 놈도 곧 로마를 떠나겠다는 뜻과 다르지 않으니까.”
“동양인 한 놈쯤이야, 오늘 새벽이면 충분할겁니다.”
“좋아, 믿어보지. 내일 오후 비행기로 나는 로마에서 사라진다. 그 전에 데려와.”
“명심하죠.”
윌리엄에 낮은 중저음으로 말했다.
“미국시장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이탈리아 정부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다면 잘 해야 할거야.”
파벌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
이산가족이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서로 분단된 국가로 떠나야 할 상황이라도 된 듯.
루시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는 내 품에 꼬옥 안겨 있었다.
연신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루시, 이제 10월도 거의 끝났어, 한달이야 한달. 한달만 딱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너무 길어···”
“최대한 빠르게 일 처리 해 볼게.”
“응··· 우진이 하고 싶은 일 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더 조르지 않을게.”
“그래, 먼저 가 있어.”
슬쩍 고개를 돌려 우희를 바라보았다.
요즘 우희는 나와 보낸 시간보다 루시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자연스럽게 루시와 많은 정을 나눈 사이가 되었다.
“언니 잘 부탁한다 우희야.”
“응, 오빠 걱정하지마.”
“록산나 장모님께 잘 배우고.”
“응, 그러고 있어.”
우희는 단순히 록펠러 가에서 루시를 보살피기 위해 있는게 아니었다. 루시의 시중을 들어줄 직원들은 록펠러가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우희가 록펠러 가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록산나 장모님을 따라 ‘재단’이라는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배우기 위함도 있었다.
후에 한국에 와서 SKY자선재단을 운영해야 할 우희니까 충분히 공부도 되겠거니 싶었으며, 역사가 오래된 록펠러의 자선재단 사업에서 명함을 가지고 온다면 그 역시 ‘낙하산’인사가 아닌 인재 등용이라는 겉치례를 겸할 수 있으니 겸사겸사 진행하는 것이었다.
품에 안긴 루시를 살짝 떼어내고 대비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내 어깨를 두어번 툭툭 두들긴 할아버지가 먼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할아버지를 따라서 루시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는 게이트로 들어갔다. 마지막 우희가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밝게 웃고 있던 내 얼굴은 삭막하게 굳었다.
“거슬리는 놈들이 있네요.”
내 말에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회장님. 아무래도 로스차일드 쪽이나 시칠리아 놈들 같습니다.”
놈들은 저들의 미행이 들켰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호석의 눈에는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는 놈들이 보였다.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큰 일이라도 난 것 처럼 말이다.
“예상치 못한 스케쥴에 당황하는 모습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할아버지와 루시, 우희를 보내길 잘 한 것 같군요, 아무래도 더러운 냄새가 진동하는게.”
“예, 회장님.”
“로스차일드에게 찍어 놓은 마킹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숙소 내부에서 카모라의 보스와 시칠리아의 보스, 그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공항 바깥으로 나와 시가를 물었다.
“오늘 밤이 시끄러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요?”
호석이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게.”
“좋습니다.”
“약속장소가 어디죠?”
“저번과 같은 식당입니다.”
“아아, 그집 스테이크가 괜찮다는데 먹어보질 못했네요.”
“이동하겠습니다.”
“예.”
***
소피아가 왼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며 소리쳤다.
“빨리빨리 움직여 이 굼벵이들아! 약속시간이 겨우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고!”
인테리어 전문가들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바쁘게 움직였고, 무대미술을 전공한 사람들도 소피아처럼 목청 높여 소리지르며 다양한 소품들을 이곳 저곳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한화 5조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금화를 얻어내기 위해, 소피아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전 6억달러라는 미친가격에 판매된 목걸이 역시 천우진의 소유라는 것을 알았으니, 소피아의 눈에 천우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상으로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꽉 잡고 싶었다. 그가 원한다면 자신의 몸뚱아리라도 바치고 싶었다. 회사가 등장한 것은 소더비가 먼저였으나, 요즘 크리스티라는 회사가 바짝 추적하고 있었다. 고미술품 전문 경매회사라는 타이틀에 맞게 정말 대단한 작품들을 경매에 올리는 회사가 크리스티였다.
또, 젊은 소피아가 소더비의 최고경영자가 된 이후, 부쩍 크리스티는 소더비의 아성을 넘보고 있는 환경이었다. 얼마전 6억 달러짜리 목걸이로 다시 격차를 벌리고 있지만 그 벌어진 격차를 더 멀리, 최대한 멀리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피아에게 천우진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역대급 금화 경매.
미술품, 예술품 전문 경매사라는 소더비의 타이틀에도 제대로 부합하는 상품이 아니던가.
“소피아! 끝났어, 어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본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식당의 인테리어.
“셰프들은 준비 됐데?”
“응, 재료 준비 끝났데, 주문만 들어오면 바로야.”
“좋아! 완벽해!”
소피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장내의 인테리어를 쓱 훑었다. 마지 중세시대의 해적의 아지트와 같은 느낌, 당장 유령선장, 후크선장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할것 같지 않은 분위기의 식당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작은 무대위에 반짝이는 조명을 받는 보물 상자.
그 상자의 가장 위에는 천우진이 선물했던 금화가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착하셨답니다!”
때마침 등장하는 오늘의 주인공.
평소 투피스 정장이나 원피스를 즐겨입던 소피아지만 오늘은 어쩐지 특이한 의상을 입고, 특이한 모자를 쓰고는 천우진을 맞이했다.
“음?”
식당이 변했다는 걸 느꼈을가 천우진이 피식 웃으며 박수를 쳐 준다.
“고생하셨겠네요.”
“이번 금화 경매에 사용될 아이디어를 미리 선보여 봤습니다.”
“해적과 보물, 그런 분위기네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역시 SKY 그룹의 오너답게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시장하군요.”
“바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장내를 둘러보던 천우진. 드문드문 피식 거리며 웃는 것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아 소피아는 내심 다행의 한숨을 내뱉었다.
“테마는 좋네요, 문제는 가격이겠죠?”
준비없이 훅 들어오는 천우진의 본론.
소피아는 오늘만큼은 당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기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금화의 가치에 예술적 가치를 더한 뒤, 경매에 올릴 생각입니다.”
“예술적 가치라.”
“금화의 양이 상당한 만큼, 그 희소성이 빛바랠 것을 대비해, 다양한 예술가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천우진.
“훌륭하네요.”
“기존 금화의 가치 역시 보존하면서 더 큰 이익을 안겨드릴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잠시 빤히 소피아를 바라보던 천우진이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계약 진행하시죠, 서류는 SKY로 따로 보내세요, 금화는 SKY LINE을 통해 소더비로 보내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밥이나 먹죠, 시장한데.”
“그럼요! 해적 요리를 선보여드리겠습니다.”
제법 기대하는 얼굴이 된 천우진은 조용히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가를 입에 물 뿐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태연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 제 18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