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86화 (186/458)

< 제 186화. >

점심을 먹고 루시와 우희가 먼저 떠나야 하기에 짐을 싸고 있는 중이었고, 나는 제법 요란한 방을 나와 한가롭게 시가를 입에 물었다.

아직 소더비 측에서 이렇다할 얘기가 없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는 중이었다.

“허니~”

루시가 맞은편에 앉으니 어쩔 수 없어 아직은 많이 남은 시가를 비벼 껐다.

“응.”

“우린 또 언제 봐?”

“12월엔 한달 내내 미국으로 가있을게.”

“정말?”

“그래, 정말.”

한달동안 붙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까? 루시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랑 우희 아가쉬, 할아버지가 먼저가고 우진은 언제 가?”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에 갈 것 같아.”

“아직 여기서 일이 있구나?”

“응, 어쩌다 보니.”

루시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하루 더 있을까?”

나 또한 아쉽기는 매 한가지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냐, 먼저 가. 대비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일이 있거든.”

“음, 그럼 어쩔 수 없네.”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를 뒤에서 한 번 안아 주고는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얼른 짐 싸세요.”

“칫, 알겠어.”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루시를 확인하고는 꺼졌던 시가에 불을 붙이려는 찰나, 호석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시칠리아, 카모라 마피아들이 늙은 토끼에게 접근했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어느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으니까.

“놈이 결국 선을 넘으려고 하는군요.”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미국내에서 로스차일드 뱅크에 대한 기사가 터지고 나서 모든 영업점이 예금해지 고객들 때문에 업무가 사실상 마비상태라고 합니다.”

은행이 신뢰를 잃었다.

이건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돈을 보관하고, 빌려주는 것이 은행의 주 업무라고 할 수 있었다. ‘빌려주는 것’역시 은행의 자본이 아닌 고객의 자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은행의 영업이익이 수직하강하고 은행의 경영주라는 놈은 6억달러가 넘는 사치품을 사고 있다.

당연히 일반 고객들의 생각으로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은행이 될테고, 자연스럽게 예금 해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낸다더니, 딱 그 짝이군요.”

“아가씨와 루시 아가씨를 최대한 안전하게 미국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맞는말이니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들은 입국했나요?”

“오전부로 모든 대원들이 도착했습니다.”

“몇명이죠?”

“총 47명입니다.”

“무장 갖추세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합니다.”

“예, 회장님.”

로이드가 윌리엄의 핏줄이라면.

그리고 윌리엄의 교육을 받고 자란 로이드가 한 행동은 분명 윌리엄도 할 줄 아는 일일테고 어쩌면 과거에는 로스차일드가도 자주 같은 방식을 사용했을지 모른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4명은 ‘암살’이라는 방법으로 생을 달리했다.

암살이 성공한 것이 고작 4번인 것일 뿐, 이후로도 이전에도 암살 시도는 여러번 있어왔다. 시간이 계속 흐름에 따라 기술이 발전하고 보안이 강화되며 이제는 사실상 ‘대통령 암살’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지만, 여전히 암암리에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재력가나 정치인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정치인들과 재력가들은 과거엔 분명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 ‘꼭두각시’를 앉히고 싶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총잡이들, 특수훈련받은 자들,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인물들 중, 역시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가장 접근성이 쉬웠다. 도처에 널려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들의 목적이 ‘돈’인 만큼 쉽게 유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인간사회의 보이지 않는 최상층의 계급과 최하층의 계급이 서로 돕고, 돕는 아이러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로스차일드가 이탈리아의 마피아 놈들과 짝짜꿍을 하고 있는 것 처럼.

“있는 것들이 더 해.”

내가 굳이 PMC와 보안회사등을 설립하는 이유에 그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분명, 전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그 ‘더러운’일에 손을 담그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로스차일드 놈을 욕할 생각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옳다고 생각하니까.

야생의 세계에서 먹이를 노리고 동종끼리 싸우는 것이 어찌 인간뿐이겠는가? 본능이 살아 숨쉬는 동물도 그럴진데, 탐욕과 욕망으로 똘똘 뭉친 인간들이 그렇지 않다는게 더 웃긴 얘기다.

동물의 세계보다 인간의 세계가 더욱 치졸하고 불합리하며 약육강식이 그대로 살아 숨쉰다. 있는 놈들은 애써 도덕이니 윤리니 운운하며 정체를 숨기고 가리며 살지만 뒤쪽에서는 이런 더러운일도 서슴치 않는 놈들이란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경쟁자란 싹을 제거 하기위해 커다란 수컷 곰이 어린 새끼 곰을 도륙내는 것 처럼. 언제나 있는 놈들은 싹이 보이는 새싹을 밟고, 치우고, 방해가 된다면 죽이기를 서슴치 않아왔다.

그런 놈들의 꼭대기에 서야 하니까, 나는 더러운 일을 처리해주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나와 함께 같이 피를 묻힐 전우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내가 PMC를 만들고 보안회사를 설립한 이유였다.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선민의식에 찌들어버린 기득권 놈들은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알려줄 필요가 있다.

“흐음, 표정이 좋지 않구나.”

어느새 다가온 대비 할아버지의 질문에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꼭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장군 같은 얼굴이야.”

“하하, 그래 보였나요?”

“늙은 토끼놈이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모양이구나.”

“예, 그런 것 같네요.”

쯧쯧 하고 혀를 차던 대비 할아버지도 작은 시가를 입에 문다.

“능력을 과신하면 명이 짧지. 천갈래 만갈래로 찢겨진 록펠러가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세상의 무서움을 알고 몸뚱이를 웅크렸기 때문이란다.”

대충 항상 조심하고 신중하라는 조언으로 이해했다.

스윽 나를 쳐다본 대비 할아버지가 말했다.

“우진이 너는 명이 길 것 같구나.”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몸을 웅크리고 있나요?”

대비 할아버지가 스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애초부터 용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웅크릴 필요가 없지, 똬리를 풀면 될 것을.”

***

이탈리아의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콘도 빌리지. 속속들이 고급 세단이 줄지어 진입하고 있는 그 건물은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묶고 있는 숙소였다.

차량에서 내리는 이들은 속속들이 눈매가 날카롭고 어딘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국의 갱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무게감이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거만하게 엔틱한 소파에 앉아 꼬냑을 홀짝이며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뉴스가 시끄럽습니다. 미스터 로스차일드.”

제일먼저 말을 꺼낸 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윌리엄이 말했다.

“우리는 굳건하니 걱정은 사양하지. 미스터 비지니.”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혹시나 의뢰금이 모자를까 하여.”

“이탈리아 정부가 어쩌지 못한다고 나도 그럴것 같은가?”

서슬퍼런 윌리엄의 경고가 날아들지만 시칠리아의 보스 비지니는 피식 웃으며 풀썩 맞은편에 앉는다.

“원하는 게 뭡니까? 미스터 로스차일드.”

건방진 태도에 열불이 나는 윌리엄이지만 꾸욱 화를 누르고는 말한다.

“처리할 놈이 있다.”

“암살?”

“이왕이면.”

“호오, 오랜만에 요청하십니다?”

“로이드의 소식은 들었겠지.”

“아,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됐고, 아무래도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든게, 그 놈인 것 같아.”

“피의 복수를 해달라?”

윌리엄이 손짓하자 세바스찬이 테이블 위로 서류를 내려놓는다. 시칠리아의 보스 비지니도, 카모라의 보스 파벌도 얼른 서류를 들어 확인한다.

“미친.”

“으음.”

비지니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나왔어도 파벌은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장내에 있는 윌리엄과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파벌, 내 눈깔이 제대로 박혀있는게 맞나?”

“음, 멀쩡해 보이는군.”

시선을 옮긴 비지니가 윌리엄에게 묻는다.

“이건 우리 보고 뒤지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만.”

카모라의 보스 파벌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손을 떼겠습니다. 애초에 미국에 진출할 마음도 없었소, 여기 미스터 비지니 형제와 굳이 경쟁체제를 만들고 싶지도 않고.”

파벌의 말에 흐뭇하게 웃던 비지니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고는 서류를 스윽 윌리엄쪽으로 밀었다.

“나는 오래 살고 싶어서 거부하겠습니다.”

윌리엄이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오래 살고 싶으니 해야지, 그리고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고.”

무슨 소리냐는 듯 윌리엄을 빤히 쳐다보는 비지니.

다시 세바스찬에세 손짓하는 윌리엄, 세바스찬이 공손하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번스 국장, 나 로스차일드입니다.”

-예, 미스터 로스차일드.

“요즘에 시칠리아 마피아 놈들 수사하고 있습니까?”

-그 개같은 놈들은 언제나 수사 중이죠.

시칠리아의 비지니는 윌리엄 번스 국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CIA의 머리였으니까. FBI와 CIA에게 언제나 비지니는 쫓기는 입장이었다. 아직까지는 혐의를 입증시키지 못해 이렇다 할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비지니가 윌리엄의 호출에 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의 이유였다. 재력가들과 정치인들이 뭉친다면, 없던 죄도 만드는 것이 현대의 법이고 법칙이었으니까.

“어떤점이 수사의 난항을 주고 있소?”

-놈들이 입을 벌리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니겠소? 입을 벌렸다 하면 배신자로 낚인 찍혀 일가족이 몰살되니, 어디 입을 벌릴 수가 있나.

“증거가 없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증거만 있다면 언제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 증거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여쭸습니다. 요즘 뉴욕이 통 시끄러워서.”

-후우··· 예, 정보가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부탁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 로이드를 살해한 놈들에 대한 정보는 있습니까?

-······ 미안합니다. 미스터 로스차일드, 정말 프로페셔널한 놈들이었습니다. 시칠리아의 마피아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만 끊죠.”

-예.

통화를 끝내고 여유롭게 휴대폰을 내려놓는 윌리엄.

“네 놈의 목숨줄, 어디에 있는 것 같지?”

“······”

시선을 옮겨 카모라의 보스 파벌을 바라본다.

“이탈리아 정부? 전화를 해 볼까?”

“죄송합니다. 여기 비지니 형제와 최선을 다해 의뢰에 임하겠습니다.”

곧 시칠리아의 보스, 미국의 CIA, FBI도 이탈리아의 정부도 어쩌지 못하는 마피아계의 거두 비지니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윌리엄이 서류속 사진을 하나 콕 찍으며 말했다.

“나머지는 다 죽여, 이 놈은 숨만 붙여서 데려 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사진에는 흑발의 동양인이 근사한 양복을 입고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 제 18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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