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3화. >
천우진과 데이비드 록펠러가 떠난 자리.
소더비의 최고경영자 소피아는 더 이상 같은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모레 있을 경매도 경매지만 지금 선물이랍시고 천우진이 던저놓고 간 금화의 가치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포크 한번 찔러보지 못한 스테이크를 덩그러니 남긴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는 소피아.
“안드레이.”
“예스, 마담.”
“최고등급의 감정사들 바로 부르세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잠시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소더비 경매가 열리는 로마의 한 박물관 내부의 창고였다.
말이 창고지 여러 고미술품, 골동품등을 관리하기 위한 최상의 설계가 되어 있는 해당 건물은 다양한 경매 물품을 보관하고 관리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당 건물에서 금화 감정이 시작되었다.
소피아는 조용히 감정사들이 금화를 씹고 보고 맛보고 즐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다른 감정사들 역시 자연스럽게 한참 금화를 연구하고 토론하고 있는 감정사들에게 섞여들어가 금화에 집중했다.
“휘유, 소피아 도대체 저 물건은 뭐야?”
“오늘 받은 선물.”
“맙소사, 소피아도 드디어 남자가 생긴건가?”
“아쉽게도 유부남.”
“아, 불륜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잖아?”
“헛소리 하지 말고 감정이나 제대로 해 수잔.”
거의 옷을 입지 않았다고 설명해도 좋은 복장의 수잔이란 인물은 소피아의 옆자리에 풀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보관상태가 굉장히 뛰어나고 세공기술 역시 현대에는 없는 것들이야.”
“그래서?”
“정확한 시기는 감정을 더 해봐야겠지만, 금화 뒤에 그려져 있는 16~17세기 프랑스에서 유통되었을 것 같아. 음각된 글자가 당시의 프랑스를 알려주니까.”
소피아가 스륵 고개를 돌려 수잔을 바라보더니 말한다.
“가치를 물어봤어.”
어깨를 으쓱이는 수잔.
“가치야 그건 소피아 네가 더 정확하게 결정하겠지?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해주는 거라고.”
“쯧, 더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구나?”
“저기 가치 매기기 좋아하는 아저씨들이 열심히 일하고 계시니 곧, 나오겠지? 그보다 금화를 선물 했다는 남자는 어떤 사람이래?”
어차피 제 금이 아니어서 일까, 제 보물이 아니어서 일까? 수잔이란 인물은 욕심없이, 오히려 소피아의 연애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젊고 멋지지, 동양인이라는 단점이 없어질 만큼.”
“오, 동양인이었어? 신기한 걸? 동양인이 유럽의 금화를 가지고 있다라··· 칭기즈칸의 후예라도 되는 건가?”
“헛소리 그만하고, 역사적 가치가 있어 없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지. 국가차원에서 생산한 금화는 아닌 것 같아, 어느 유망한 가문에서 보관을 위해 생산한 느낌? 기사들을 위해 지급할 봉급이었을지도 모르고, 상인이었을지도 모르지.”
“유통되던 화폐가 아니라는 얘기네? 흐음··· 그럼 더 희소성 있겠는데···”
어떻게든 가치를 끌어올릴 생각만 가득해보이는 소피아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수잔.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는거야?”
“수잔, 저 금화를 비싸게 팔아먹어야 그가 나를 한번이라도 더 생각해줄거 아냐?”
수잔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맙소사, 소피아! 지금 네가 사랑에 빠진거니?”
수잔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소피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어마어마한 양의 금화를 어떤식으로 경매해야 할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수잔의 착각이자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소피아는 분명히, ‘돈’과 사랑에 빠져있었으니까.
“절대 이번 한번이 끝이 아닐거야.”
소피아는 어떠한 강력한 이끌림을 느꼈다.
SKY그룹의 오너 천우진을 잡는다면, 앞으로 소더비는 더욱 빠르고 가파르게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의뢰 한방에 최소한 한화 5조원의 가치를 투척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가 만족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투자회사 못지 않은 수익은 안겨주어야 함이었다. 단순한 금값만 받아서는 절대 안된다는 얘기.
“대항해시대에 해적들이 약탈했을지 모를 보물이란 테마가 좋겠어.”
“소피아, 내 말은 듣고 있니?”
“그래! 금화를 오래된 나무 상자에 포장하는 거야! 포도주나 럼주같은 것도 같이 들어있다면 예술적인 가치도 보여줄지 모르지.”
“저기, 소피아?”
“닥쳐! 한가롭게 떠들때가 아니니까.”
“어, 응.”
***
루시는 임산부 답지 않게 씩씩하고 건강했다.
무슨 의미냐면, 노는것에 진심이고 열정적이라는 얘기였다. 우희에게 ‘로마’에 대해 설명해주고, 자신이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얘기해주며 이태리의 온 도시를 점령이라도 할 기세로 이곳 저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나와 루시, 우희의 경호원들은 죽을맛일지도 모르겠다.
“어휴, 지치지도 않나.”
그녀들과 약 30미터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시가를 입에 문 내 투덜거림에 호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이 좋아할 것들이 지천에 널리지 않았습니까.”
“그런가요?”
“아름다운 풍광, 이색적인 환경, 추파를 던지는 젊은 놈들. 심지어 이곳은 어린아이들도 추파를 던지는군요.”
여행은 자유다.
어느 여행사가 열심히 외치던 슬로건 같은 것이었는데,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기에 경호의 수준을 매우 낮췄다. 외부인이 접근해 올때 빠르게 그를 스캔하고 무장을 했는지 여부를 체크하는 경호원들은 무기가 없다면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인 나, 친오빠인 나는 그녀들과 30m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자유롭게 시가를 태우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쨌든.
“도파민이 분비 되서 힘든걸 모르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여자들은 관심 받는 걸 좋아하니 말입니다. 특히나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들은요.”
제법 박사처럼 말하는 호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남자! 남자!’를 외칠것 같은 호석이 의외로 섬세한 부분이 있구나 싶어서였다.
“저녁 때가 된 것 같으니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시는게 어떻겠습니까?”
확실히 걷기도 많이 걸었더니 배가 고팠다.
“아주 유명한 식당으로 준비했습니다.”
여행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새로운 음식,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나였으니 엄지를 척 들어올려 호석에게 내밀고는 말했다.
“힘들었는데 잘 됐네요, 바로 이동하시죠.”
“그럼 저기 아가씨들은 회장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죠.”
태우던 시가를 호석에게 건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활짝 웃고있는 그녀들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루시, 우희야 밥 먹자.”
“풋.”
“킥.”
내 말이 뭐가 웃긴지 피식거리며 웃는 그녀들.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웃는다는 낭랑 18세도 아닌데, 마냥 기분들이 좋은 모양이다.
“저녁은 뭐야 우진?”
“고기 먹고 싶다 오빠.”
그녀들도 많이 걸었으니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
“호석 삼촌이 아주 기똥찬 식당을 예약하셨다는데?”
루시와 우희가 저 멀리 시가를 태우고 있는 호석을 힐끗 바라본다.
“맛있겠다 언니, 빨리가자.”
“그럴까?”
둘은 어느새 팔짱을 끼고는 베시시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안녕! 아가씨들! 와, 여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정말 놀라운 하루가 되겠어, 괜찮다면 여신분들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아, 당신의 검은 머리는 꼭 내 심연을 닮은 것 같아요, 반짝이는 두 눈을 보자면 그 곳으로 날 인도하는 등대와 같달까요? 혹시, 당신이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울까요?”
이탈리아 특유의 영어발음으로 잔뜩 버터에 절인 멘트를 쏟아내는 사내 두 놈. 힐끗힐끗 날 바라보면서 견제하는 꼬락서니가 제법 웃겼다.
루시와 우희도 웃긴지 피식 웃으며 내 양쪽에서 루시는 왼팔, 우희는 오른팔에 팔장일 낀다.
미녀 둘이 내 양쪽에 서니 놈들의 얼굴이 똥 씹은 것 마냥 찌푸려진다.
착, 착.
지갑에서 달러 두 장을 꺼내 놈들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디가서 피자라도 사 먹어.”
루시와 우희가 놀란 표정을 짓지만 이유가 다 있었다. 놈들은 루시와 우희에게 이태리 사내들처럼 추파를 던졌지만, 내 눈에는 놈들의 몸뚱이에서 흘러나오는 선명한 붉은색 연기가 보이니까.
어느새 내 주위로 호석을 필두로 한 경호원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녀석들은 똥 씹은 표정에서 설사를 씹은 표정으로 변하더니 내 손에 들려있던 지폐를 공손히 받아서는 자리를 벗어난다.
“정 대표님?”
“예, 회장님.”
턱짓으로 놈들을 가리켰다.
“예.”
***
소더비 경매 때문인지 아니면 유명한 식당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식당은 한 눈에봐도 ‘나 돈 있어!’하는 사람들 천지였다. 난 유럽의 식당이 이런게 불편했다.
드레스 코드가 맞지 않으면 입장이 제한되는 점 말이다. 특히나 고급 식당이면 고급 식당일수록 유독 그런것이 심한 편이었다.
대체 비싼 거적때기를 두르고 불편하게 움직이며 밥을 먹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와, 정말 맛있는 집인가봐 사람들이 많네.”
“그러게 언니, 벌써부터 어떤 맛일까 막 설렌다.”
“나도나도.”
여자들은 특이하게도 이런 식당을 좋아하더라.
물론 루시나 우희는 순댓국도 사랑하는 여자들이었다. 유럽에 왔으니 유럽맛을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불편해도 내가 참을 수 밖에.
식당 내부에 유일한 동양인이 우리였기 때문일까? 여기저기 곁눈질로 우리를 쳐다보는 외국인들이 느껴졌다.
루시와 우희는 워낙 시선에 익숙하니 그러려니 하는 듯 하나, 곳곳에서 보이는 주황빛 경계의 눈초리는 자꾸만 날 신경쓰이게 만들었다.
“뭔가 경계심이 가득한 식당 같은데요?”
“경매에서 경쟁자일지 모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아아.”
호석의 말이 대충 무슨뜻인지 알것같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보니 루시의 저 새하얀 목에도 다이아 목걸이는 제법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내 음식들이 나오고 우리는 조용하게 즐기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한참 식사를 이어나가다 디져트가 나오는 순간.
멀리서 익히 아는 얼굴이 천천히 걸어오는게 보였다. 디저트에 집중한다 해서 보지 못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주아주 시뻘겋게 검붉은 연기를 풀풀 흘리며 입장하는데 내 시선이 그쪽에 닿지 않을리 없었으니까.
“반갑군, 미스터 천.”
“글쎄, 난 그다지.”
내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인물은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였다. 한창 바쁠시기에 이런 식당을 방문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나보다 싶었다. 어쩐지 아까전 붉은색 연기를 풀풀 휘날리던 사내놈들이 우리를 미행한 이유가 지금 이 만남을 위해서였나 싶었다.
자연스럽게 퉁명하게 반응했던 나 때문일까 루시가 내 옆구리를 쿡 한번 찌르고는 이내 활짝 웃으며 윌리엄을 아는채 했다.
“어머! 로스차일드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루시, 많이 컸구나 더 예뻐졌어.”
“이태리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하하하, 어떤 쥐새끼 같은 놈들이 우리 가문의 보석을 경매에 올렸다기에, 구경하러 와봤네, 다시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갈 생각이지.”
얼마나 배알이 꼴렸으면 저런 도발을 하나 싶었지만 지기 싫어하는 내가 굳이 양보할 필요는 없었다.
“오, 로스차일드 뱅크가 자금난이 심각하다던데, 경매에서 사치품을 구매할 정도로 지갑사정이 괜찮은 모양이네요.”
눈썹을 꿈틀거리다 호탕하게 웃은 위리엄이 말을 잇는다.
“설마, 지갑이 홀쭉해질리가 있나? 대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래요? 다행이네요, 요즘에 소문이 흉흉해서 망하나 싶었거든요.”
“그럴리가 뜬 소문이겠지.”
“듣기로는 오늘인가 내일 보도도 된다고 하던데, 뉴욕타임즈였나?”
몰랐던 사실인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는 윌리엄의 얼굴에 쩌적 하고 금이가는 것 같았다.
언론사에 금융계, 그것도 은행가의 큰손의 자금난이 보도된다면, 당연히 고객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돈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기 마련이다. 그럼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예금 ‘인출’을 감행 할 것이고, 은행은 자연스레 휘청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현재 윌리엄이 지갑이 얇은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어 열심히 이곳 저곳에 ‘뇌물’을 뿌리며 입막음 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고객 이탈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 조용조용히 미국 상류층들 사이에서만 묻힐 수 있기를 말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내 계획이 그럴리가 있나.
놈을 한시라도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은 찰나.
마침 디저트 위에 올려져 있는 금가루가 보였다.
디저트용 스푼으로 금가루가 올려져 있는 부분을 퍼 올리며 말했다.
“루시 목이 너무 허전하다. 목걸이 하나 살까? 마침 이번 경매에 좋은 다이아 목걸이가 나온다고 하던데? 듣기로는 마리앙투와네트? 그 여자가 아끼던 목걸이래.”
루시가 ‘으~’하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촌스럽고 주렁주렁 반짝이는 보석이 가득한 목걸이는 취향이 아니야 허니, 꼭 졸부들이나 사치스러운 귀족들이 하고 다닐것 같잖아?”
누가 부부는 닮는다 하였던가?
루시는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닐테지만 의도치 않게 윌리엄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윌리엄을 슬쩍 보니 모가지가 뻘겋게 물들었다. 가까스로 얼굴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
“에이, 언니~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 않을까?”
“응? 어째서?”
“엄청 귀하고 가치있는 보물처럼 생각하고 보관하던 사람들이 속상할지도 모르니까?”
우희도 분명히 내 핏줄이 맞았다.
동생이니 날 닮은 것은 당연한데. 우희마저 윌리엄의 시끄러운 속사정은 모르니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닐터. 윌리엄은 슬슬 턱까지 벌겋게 물드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기 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죠, 대~ 로스차일드의 가주님. 속이 든든해야 언론의 공격에도 굳건히 버티죠? 곧 고객들이 여기저기서 예금해지 하겠다고 난리를 칠텐데 드실 수 있을때 식사 하십쇼.”
푸들푸들 떨리는 볼을 꽈악 부여 잡은 윌리엄이 씹듯이 대답했다.
“그러지.”
그가 자리를 떠날 것 같자 루시와 우희가 속도 없이 활짝 웃으며 이별의 인사를 말한다.
“반가웠어요 로스차일드 씨.”
“저도요~ 로스차일드 씨.”
“반가웠네, 루시 양, 그리고 미스 천.”
< 제 18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