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2화. >
내 말에 크게 웃으며 식탁을 두어번 탁탁 두들긴 장저민이 말한다.
“오늘 정말 즐겁기 그지 없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호탕하기 그지 없소.”
“빙빙 칼을 숨기는 대화는 추구하는 방식이 아닌지라.”
“옳소, 나도 그런 대화를 싫어하지.”
손을 들어 올려 왕충현에게 손짓하는 장저민.
곧 왕충현이 서류철을 내 앞에 내려 놓는다.
“그대가 온다는 소식을 늦게 들어 많이 준비하지 못했지만, 일단은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조건들이오.”
어디 욕심많은 늙은이가 과연, SKY를 또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들여다 볼까 싶었다.
중국어 원본과 한국어 번역본이 쓰여져 있는 서류였다. 중국어 원본을 먼저 읽고 한국어로 쓰여진 번역본을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중국어 원본을 읽었는데 함정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이 서류로 인해 현재 장저민이 중국 내부에서 가진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으며, 그의 위기감 역시 실감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향후 2년 안에 우진타오에게 거의 모든 것을 양보하며 주석 자리에서 내려오는 인물이었다. 그때는 그저 높은 자리에 있던 놈이 과연 양보를 하고 내려올리가 있겠나 하는 의문만 품었을 뿐이었지만, 이제 그 의문은 확신이 되었다.
장저민은 저 왕좌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 으리으리한 별장부터 늙은이의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나오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야 내게 이렇게 후한 조건들을 내걸리가 없을테니까.
중국이 이런식으로 나온다면, 나 역시 편안하게 내가 취하고자 하는 것들을 요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의도치 않은 행운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실 중국을 건드리는게 가장 어려운일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준비하신 것 치고는 대단히 후한 조건이군요.”
“오, 만족스러운 모양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는 장저민.
나는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아니요, 만족스러운 것 까지는 아니군요.”
미세하게 장저민의 얼굴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의 평소 성격과 위치로 예상컨데 ‘감히?’하는 표정 같았다.
“하면, 조건을 말씀해보시겠소?”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왕충현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SKY는 제조부터 유통까지, 그리고 고객의 집에 설치까지 하나의 라인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장저민도 바보는 아닌지라 내가 말하는 것을 단숨에 이해했다.
“SKY LINE까지 들여오겠다라.”
“맞습니다. 다른 유통사를 신뢰하지 못하겠더군요, 아무래도 자신들은 유통만 담당하니 우리 제품에 대한 지식과 전반적인 서비스 마인드까지 부족할 수 밖에 없겠죠.”
“단숨에 우리 인민들을 사로잡고 싶은 모양입니다?”
채찍이 조금 아팠을까 장저민이 제법 발끈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 당근을 줘볼까?
“대신, SKY LINE의 원활한 유통과정을 위해 유통망이 제대로 설치 되지 않은 도서산간 지역의 도로 개발에 힘쓰겠습니다.”
“흐음.”
“물론, 모든 도로를 닦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유통에서 피로한 경로들을 말하는 거죠, 그것만 해도 현재 개발되지 않은 많은 도시들에 큰 이득이 될 겁니다.”
“모든 비용은 SKY가 부담하겠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수야 있습니까? 적당한 비율로 같이 하시죠?”
“결국 돈을 내 놓으라?”
“도서산간 지역의 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공사를 맡긴다면 경제 활성화 효과가 대단하리라 봅니다.”
“일자리를 만든다?”
“현재 중국은 도시 중심, 그것도 몇몇 도시에 집중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는 형태입니다. 도시들은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지만 소외된 지역은 그렇지 않죠, 극과 극. 양극화가 되고 있단 얘기입니다.”
“그걸 어느정도 완하 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피식 웃는 장저민.
“역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생각이 다르오.”
“너무나 당연한 원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즘 주변에 너무나 이상적인 당론만 씨부리는 사람들이 넘쳐 새롭게 느껴지니 흥미롭소. 조건은 그것이 전부요?”
“그럴리가요.”
“아직 더 있다?”
장저민은 과연, 나에 대한 조사를 했을까?
아직 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만든 페이퍼 컴퍼니가 왜 크로치, 즉 ‘아귀’인지를 모르는 모양.
“노는 땅을 좀 주셨으면 좋겠군요.”
“토지를 내놓아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땅이면 됩니다. 이왕이면 수풀이 우거지지 않은 초원이 좋겠군요.”
중국은 땅 덩이가 넓은 만큼, 남아도는 땅이 많았다.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 땅도 많으니 쓸모 없는 땅이라 일컬어지는 곳이 사방에 광범위하게 널린 편.
보통 그런곳에는 군사시설이나 개간을 통해 새로운 터로 탈바꿈 되기 마련이지만, 워낙 넓은 땅덩이를 가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는 땅이 많았다.
“그 땅에서 무엇을 하려하오?”
“아직은 연구중이지만 훗날 많은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아이템이 있습니다. 가령 에너지 발전소등을 설립하는 일이겠죠.”
“발전소라···”
“비나 눈이 적게 오는 지역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저민은 잠시 말 없이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굳이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손익 계산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터였다. 노는 땅을 주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
“또 있소?”
더 요구할 것이 있냐는 질문.
그리고 질문과 함께 품고 있는 불만 역시 표출되는 느낌이었다. 채찍, 당근, 다시 채찍이었으니 이제 또 당근을 던져주어야 할 때였다.
“우선은 이정도입니다.”
“우선은이라···”
“앞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면 또 어떤어떤 것들을 상호 협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호적 흐음.”
“중국 내 공장 설립 위치는 주석께서 결정하시지요, 문제만 없다면 찬성하겠습니다.”
“호오.”
내가 던진 당근이 제법 맛이 좋은 모양.
크기도 탐스러울테니 끌리는게 당연하다.
단순히 SKY의 공장이 설립되는 위치가 뭐 그리 대단하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라 말하고 싶었다. 현재 대한민국에 SKY전자 임직원은 총 14만명이 넘어가는 상태.
다른 국가에서도 SKY전자를 위해 일하는 직원들의 수까지 더한다면 족히 20만명은 훌쩍 넘어간다. 이 상황에서 중국의 공장이 설립된다면? 국가 단위의 경제기여도는 몰라도 적어도 도시 하나가 완전히 탈바꿈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SKY전자의 공장이 중국에 설립되는 만큼, 중국내부에도 SKY전자의 제품들이 활발히 유통되게 될 것이다.
그로인해 파생되는 경제효과는 결코 무시 할 수 없었다. 도시 하나를 SKY전자가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니까.
간단하게 생각해서, SKY전자 임직원 10만명이 하루 세끼를 꼬박 챙긴다고 했을때, 평균 1인당 한끼 식사비용으로 5000원을 소모한다고 생각해보자. 하루면 인당 15000원. 10만명이 소비를 한다면? 당장 수십, 수백억이 왔다갔다 하는 경제효과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하루’단위로.
그러니 지금 장저민의 머릿속엔 고민과 기쁨, 그리고 내가 내건 조건이 어떤 리스크가 있을지 바쁘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중일테다.
“음, 단기적으로 결정할 사안은 아닌것 같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에 난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검토가 필요할 듯 하니 오늘 대화의 내용을 토대로 세부적인 검토 후, 다시 만남을 가지는 것이 어떻겠소?”
“좋습니다. 연락주시죠.”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말하고 싶군.”
행여나 내가 다른 곳으로 갈까 미리 밑밥을 던져놓는 장저민. 나 역시 중국땅을 원한다. 중국 내부의 시장이 갖는 경제효과가 앞으로는 지금과 차원이 다르게 성장할테니까.
“그럼 나중에 뵙죠.”
“그럽시다.”
***
한, 중, 러 삼국 정상회담에서 내가 얻을건 별로 없었다. 중국과의 대화와 공장진출 등은 괜찮은 일이지만 러시아쪽과 친분을 유지하기에는 미국의 눈치를 안 보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해당 정상회담에는 관심이없었고 바로 소더비 경매가 열리는 유럽으로 향했다. 경매 따위의 일보다는 훨씬 중요한 ‘내 가족’과 루시의 뱃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을 내 아이를 보기 위해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언제봐도 어여쁜 루시를 반갑게 불렀다.
“루시!”
도도도 달려와 품에 쏙 안기는 루시가 퍽 귀여웠다.
“허니!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루시는?”
“나도~ 우리 해랑 별이는 잘 지냈어?”
루시의 배를 토닥이며 뱃속의 아이들의 태명을 불러주었다. 별처럼 반짝이고 해처럼 에너지 가득하라고 지어준 태명이었다.
“대디~ 건강하게 잘 지냈어요~ 해봐.”
자기 배를 통통 토닥이는 루시를 귀엽게 바라본 뒤.
“나는 뒷전이구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대비 할아버지에게 밝게 인사했다.
“하하, 그럴리가요.”
“쯧, 됐고 움직이지.”
“예.”
이번 소더비 경매는 전통이 숨쉰다고 얘기하는 로마로 정해졌다. 보통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자주 열리던 경매가 특별하게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다.
차량에 오르자마자 대비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금화까지 경매에 올리겠다니, 이제 대놓고 로스차일드 놈을 약올리고 싶은가 보구나.”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지만 반 이상은 옳은 말이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흥분했을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죠.”
“계속해서 멘탈을 흔들어야 한다?”
“예, 놈이 실수 할 수록 우리가 실패할 리스크는 줄어들테니까요.”
“단 0.1퍼센트의 실패확률도 없애겠다라··· 좋은 마인드구나.”
루시가 날카로운 눈으로 대비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랜파, 지루하고 위험한 얘기 그만~ 베이비들이 들어요~”
“크흠, 알겠다.”
루시와 함께 달달한 시간을 보내다 약속 시간이 되어 대비 할아버지와 함께 외출했다.
소더비경매회사의 사주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굉장히 젊은 여자가 예의를 갖춰 대비 할아버지와 나를 반겼다.
“만나게되어 영광입니다. 미스터 록펠러, 미스터 천. 저는 소피아에요.”
소피아의 뒤에서 헤벌쭉 웃으며 한국식 예의를 갖추는 사무엘.
“오랜만입니다. 빅보스.”
누구냐는 듯 날 바라보는 대비할아버지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는 그 투자회사의 대표직을 맡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아, 크로치.”
“예.”
“반갑네.”
“영광입니다 미스터 록펠러!”
소피아가 웃으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자 귀한 손님들을 모신 만큼, 귀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고맙소 소피아 양.”
이탈리아식 정찬을 즐기며 한가롭게 대화를 나눠도 되겠지만, 나는 굳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서 두눈 부릅뜨고 내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처자가 있으니 말이다.
“시간이 많지 않아 말을 줄이겠습니다.”
젊은 나이 답게 당황한 기색을 살짝 내비치는 소더비의 경영자 소피아. 그러나 이내 반색하며 특유의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말씀하세요 미스터 천.”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바짝 다가온 호석이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낸다. 금화를 받아든 소피아가 눈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금화를 살핀다.
“굉장히 오래된 물건 같네요, 보관상태가 정말 양호해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요?”
“99.99프로 순금입니다.”
“역시···”
약간은 실망의 기색을 내비치는 소피아.
무려 미국의 명문가라 불리는 록펠러 가의 가주와 현재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SKY그룹의 오너가 제시하는 물건이 금화라니 하는 표정이었다.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소피아가 흠칫 놀라다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대로 된 감정평가도 내리지 않고··· 죄송합니다. 미스터 록펠러, 미스터 천.”
스테이크를 큼지막하게 썰어 입에 넣어 씹어 삼키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금화는 하나가 아닙니다.”
소피아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하나가 아니라면 양이 얼마나 되죠?”
“현재 순금 1g이 대한민국의 원화로 약 1만2천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돈 냄새를 맡았을까? 조금전 실망했던 기색은 온데간데 없고 내 말에 집중하는 소피아.
“단순 순금으로 계산했을때 대한민국의 원화로 5조원에 육박하는 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툭.
손에 들고 있던 원하를 테이블에 떨어뜨린 소피아가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그, 그것들 전부가··· 이것과 같은 오래된 금화인가요?”
“아마도?”
“마, 맙소사.”
얼굴이 잔뜩 상기된 소피아가 말했다.
“정말 어메이징한 양이군요··· 어떤 단위로 처분해야 할지 놀라울 정도로···”
“우리가 굳이 시간을 낸 이유가 있었겠죠?”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소피아.
“그 금화는 선물로 드리죠, 내부에서 어떻게 할지 회의 후에 다시 한 번 뵙는걸로 합시다.”
내 말에 소피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반드시, 만족하실만한 조건으로 찾아뵐게요!”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일어나 계시던 대비 할아버지와 함께.
아직도 금의 양에 넋을 놓은 사무엘 잭슨은 덩그러니 식탁위에 남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인사도 없이 우리를 배웅했다.
< 제 18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