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9화. >
10월 7일.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에 초토화 된 아프간, 그 소식은 전세계를 며칠동안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앞으로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탈레반 정권은 ‘알카에다’세력을 내 줄 것인지에 전 세계인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빨리 파병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건 옳지 않았다.
적어도 미군이 아프간 내에 주둔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원활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된다는 얘기.
괜히 9월이 훌쩍 넘었을 때 ‘한달’이라는 기간을 대원들의 훈련에 사용한 게 아니었다. 미군이 최소한의 주둔지 시설은 완성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 미군이 주둔지를 완성한다면, 그때부터 파병단이 꾸려질터였다.
세상이, 국제정세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난 한가롭게 ‘피맛골’이라는 작은 식당가 골목에서 대통령을 만났다. 말로는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 했던 대통령이었지만 뭔가 원하는게 있을 것이었다.
“모레 정상회담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경에서 말이죠?”
“예, 천 회장도 함께 가시겠소?”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내렸다. 내가 먼저 대통령에게 요구하려 했던 것이었다. 대통령이 내게 저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분명 그도 뭔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터.
“뭐, 문제 있습니까?”
숨김없이 다이렉트로 물었다.
피식 웃는 대통령이 막걸리를 들이켜고는 말했다.
“이참에 대한민국의 무기 규제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저기 위에 친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핵실험을 하니···”
“부쉬를 잘 구슬려 보라는 말씀이군요.”
“허허, 예 간단한 표현입니다만 그렇습니다.”
“ICBM개발 허가까지만 받는 것으로 하죠, 아직 핵개발을 얘기하기는 시기상조입니다.”
눈을 번뜩이는 대통령.
사실상 ICBM.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술만 보유하더라도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쉬운일이었다. 이미 핵융합 기술이야 전 세계에 공공연하게 퍼져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전 세계적으로 두뇌가 좋기로 소문난 국가였다. 핵무기 ‘허가’만 받아낸다면 정말 하루아침에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핵 폐기물에 대한 재사용 문제는 이미 언질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 지난 미사일 사거리 문제를 다루던 회담에서 그 부분에 대해 미국의 뜻을 표현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예,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얘기가 있었죠, 그 덕에 미사일 사정거리는 획기적으로 늘었습니다만. 역시나 아쉬울 따름이죠.”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는 ‘핵’이 있냐 없냐에 따라 강대국과 약소국이 결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까지 일본 놈들에게 휘둘렸던 대한민국이 ‘핵폭탄’이라는 신무기를 개발 할 수 있을리 없었다. 당연히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시간이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60년대 초, 러시아의 원조를 받은 중국이 핵무기를 완성시키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암암리에 핵실험을 진행하던 북한은 80년대 후반, 혹은 90년대 초. 이미 핵무장을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아직 그들이 ICBM까지 개발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해에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으니, 국가 예산을 그쪽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어차피 미군의 GPS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결국 우리도 인공위성을 쏴야합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내년까지, 3대의 인공위성 발사를 목표로 가시죠.”
대통령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SKY항공우주기술이 벌써 그만큼의 기술 진보를 이루었습니까?”
“무기 판 돈으로 뭐 하겠습니까? 항공기 판 돈으로는 뭐 하고요? 전부 재투자 중입니다.”
입을 크게 벌리는 대통령.
분명 조 단위의 돈이 소모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마어마 하군요.”
“기술투자에 아끼지 말아야 미래가 있죠.”
“음, 천회장은 역시···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으니 미래지향적이군요.”
기분좋게 웃으며 막걸리를 마시는 대통령.
나는 그가 확실하게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현의 정상영과 같은 사업가였다면, 지금 이 순간 해당 GPS기술을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이용료를 내야 하는지, 아니면 개발비에 지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GPS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SKY항공우주기술이 인공위성을 쏘아보낸다고 해서 그게 대한민국의 기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SKY의 ‘소유’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당연히 군부도, 민간도 SKY의 인공위성에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다만 그 혜택을 누리는 ‘대가’가 무엇일지는 오직 ‘나만’ 알고 있다.
“그럼 모레 함께 가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 회장은 따로 가시겠습니까?”
“예, 공짜를 좋아하면 머리가 벗겨져서.”
“예?”
“아닙니다. 제 전용기로 움직이죠, 또 다른 곳으로 움직일지도 모르고요.”
“알겠습니다. 한-미 회담이 끝나면, 같은 장소에서 장쩌민과 푸틴, 그리고 우리까지 또 자리가 마련될 겁니다. 천 회장께도 좋은 자리가 될 것 같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
고키부리가 총리 자리에서 내려온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집권여당이었던 자민당을 제외한 나머지 야당들은 새로운 총리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금’이라는 물질로 똘똘 뭉친 소수정당과 일본의 제 2정당인 민주당을 주축으로 모인 인사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막아야 합니다!”
“쯧, 고키부리 전 총리가 사퇴 했으니··· 관례상 현 여당에서 새로운 총리를 뽑지 않겠습니까.”
“관례는 어디까지 관례인법입니다!”
각 당의 대표들이 시끄럽게 서로의 주장을 설파할 때, 고키부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음 총리 후보를 누구로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기 우리의 소속에서 나간다면요.”
다들 욕심에 눈을 빛내지만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고키부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벌써부터 이빨을 드러내 저들에게 경계를 살 이유가 없어요. 일본에서 관례는 마치 규칙과도 같은 겁니다. 누군가는 먼저 나서서 그 관례를 부수겠지만, 그게 우리일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민주당대표가 고개를 주억 거리며 말했다.
“모난 돌이 정을 맞으니 몸을 사리자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2003년 총선까지는 잠시 기다리는게 좋겠습니다.”
“대신, 다음 총리는 자민당과 뜻을 같이하는 보수당과 공명당의 인물을 추대하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자민당의 영향력이 조금씩조금씩 옅어지게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호오’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확실히 효과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자민당에 대한 네거티브를 퍼뜨리고, 우리의 영향력을 넓히다. 2003년 총선에는 자민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당당히 총리의 자리를 쟁취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금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고키부리의 화려한 언변이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모든 의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고키부리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혼란한 일본의 정국을 정비하고, 나아가 국민들에게 바른 정치, 옳은 정치를 얘기하며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겁니다. 여기 계신 모두, 주머니가 두둑해 지시지 않았습니까?”
이어진 마지막 농담에는 다들 ‘껄껄’거리며 웃었다.
“크흠, 요즘 먹지 않아도 배가 불르더이다. 크하하하.”
사회당대표의 말에 곳곳에서 피식 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완전히 이 자리의 리더가 되어버린 고키부리가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고리타분안 정치 얘기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얘기를 말이다.
“자자, 그런 의미에서 요즘 부쩍 회전율이 별롭니다. 세탁기 엔진을 바꿔야 할까요?”
의원들이 헬쑥한 표정을 짓는다.
“고키부리 전 총리··· 자민당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곧 있으면 벌써 2002년입니다. 총선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런 세탁 속도라면 총선 전에 끝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란 얘기입니다. 지금 우리의 황금쩐주께서 돈을 빼겠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으음! 그건 안됩니다!”
“그러니까요, 여기 계신 힘 있는 의원님들이 제 힘을 발휘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침묵을 지킨다.
행여나 문제가 생겨 자신의 자리를 위협당할까 싶은 모양.
“지금 자민당도 혼란스러울겁니다. 다른 당들의 성장세가 무서우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도 자민당에게 딜을 칩시다.”
“딜을요?”
“니네가 총리 해라, 그 관례 우리는 찬성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2003년 총선에 제대로 붙어보자 정정당당하게.”
눈을 빛내는 민주당대표.
“호오, 확실히···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자금세탁 문제를 눈치껏 넘어가준다?”
“그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앞으로 ‘자민당’을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아요, 지금처럼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는 어렵다는 얘깁니다.”
‘설마’따위의 표정들을 짓고 있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물과 기름같은 관계처럼, 당의 신념이 맞지 않는 그들이 다시 이렇게 어울리기는 힘들 것이라는 걸 말이다. 현재 그들을 묶어놓은 줄이 ‘황금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민주당대표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만큼, 그가 먼저 나서서 결심이 선 얼굴로 말했다.
“좋습니다. 하이리스크 하이 리턴인 법이죠.”
***
데이비드 록펠러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인물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셨는가?”
“반갑습니다. 미스터 록펠러.”
“글쎄, 자네의 눈에 독기가 가득한게, 썩 달갑지 않은 일로 온 것 같은데?”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방문을 알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맞이 하러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현 록펠러가와 로스차일드가의 사이가 어떤지 짐작케 해주는 방증이리라.
보통은 한 가문의 가주가 왔다면, 예의상 인사라도 하는게 관례였으나, 오로지 록펠러만 따로 나와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록펠러가의 정원이 보이는 곳.
제법 쌀쌀한 가을 날씨지만 로스차일드도, 록펠러도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고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홍차를 홀짝이던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뒤통수가 얼얼 하더군요, 미스터 록펠러.”
“무엇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말하는 록펠러의 태도에 윌리엄은 화가 날 법도 하건만, 태연하게 말했다.
“하하, 모기지를 그만두고 공급주택 사업에 뛰어든 것이 말입니다. 체이스도, 삭스도··· 다른 금융업계 사람들도 우리 로스차일드에게 아무런 언질이 없었군요··· 심지어 정치하는 작자들도 마찬가지고.”
“글쎄, 그들도 몰랐던게 아니었을까?”
의뭉을 떨더니 시가를 입에 무는 록펠러, 그런 록펠러를 잠시 빤히 쳐다보던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
“다른 금융사들은 확실히··· 몰랐을수도 있겠습니다. 그들도 활발히 모기지 대출을 시행하고 있었으니까요.”
록펠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우리 은행이 모기지 대출을 내주지 못한건, 어떤 망나니 같은 놈들이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대출을 내주기에, 그 은행으로 사람이 몰렸기 때문일세.”
죽은 자신의 아들을 나무라는 록펠러였다.
그러나 윌리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삭스와 체이스도 마찬가지랍니까?”
“글쎄, 그건 그들한테 물어야지.”
“미스터 록펠러. 우리 가문은 록펠러 가와 척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록펠러가 고개를 돌려 윌리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말했다.
“자식 교육이 문제인게지.”
윌리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로이드를 말합니까?”
“용 인지 모르고 하룻강아지가 덤볐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쯧쯧, 집안 단속부터 잘 하지 그랬는가?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버릇이 없는 법이지.”
록펠러의 말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까? 윌리엄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혹··· 록펠러씨의 손녀 사위와 연관된 일입니까?”
“자네의 망나니 아들이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말이야.”
록펠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윌리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감히, 네 놈의 망나니 아들이 내 손녀를 제것처럼 떠들더군, 그 것은 나도 불쾌했지··· 마치 록펠러 가문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이야. 어떤가? 지금로 로스차일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팍 인상을 찌푸리는 윌리엄.
지금 록펠러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선하기도 하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불쾌함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기분이 나쁜가? 자네 아들놈이 하고 다니던 일일세, 이런 일을 말이야.”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입니까?”
피식 웃어버리는 록펠러.
더 인상을 찌푸리는 윌리엄.
“고작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니··· 자네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군.”
“무엇을 말입니까?”
“내 손녀사위, SKY 그룹의 오너는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지.”
가만히 듣고 있는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
“all or not. 전부가 아니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내라네, 그는 자네의 전부를 빼앗을 거야, 어쩌면 자네의 목숨까지.”
윌리엄은 부들부들 떨리는 제 볼살을 숨길 수 없었다.
< 제 17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