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4화. >
SKY항공우주기술의 실무진들과 한참을 군사용 GPS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가지고 갑론을박을 말하고 있을 때, 호석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소더비에서 초대장이 날아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스윽 들어 올렸다.
내 표정에 뭔가 있었을까,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자자, 일들 보세요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결정되는 것들은 따로 보고서 올리시고.”
““예, 회장님!””
직원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뿌듯한 웃음으로 받아주고는 회의실을 벗어났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오후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뻣뻣한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호석을 바라보았다.
“아오, 오늘 너무 열심히 일 했네요.”
“하하,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초대장 좀 볼까요?”
“차량에 가서 확인하시죠.”
걸으면서 보지 말란 얘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량에 오르자마자 서류를 내미는 호석.
다양한 경매 물품들을 슥, 슥 스쳐지나가다 잭슨이 들고갔을 목걸이가 메인에 떡하니 걸려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오우야, 마리앙투아네트?”
“거의 기정 사실화되고 있습니다.”
“이야, 역사적 가치까지 더해지면 돈 많은 여자들이 환장하겠네요.”
“사치 부릴게 없을까 하는 부호들에게는 제법 욕심나는 아이템일겁니다.”
“루시나 줄 걸 그랬나.”
내 혼잣말에 정호석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사모님은 그런 목걸이보다, 회장님과의 데이트가 더 좋다고 생각하실겁니다.”
일 적당히 하고, 가족들이랑 시간이나 보내라는 잔소리였다. 백번 옳은 말이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정말 오랜만에 ‘일’이라는 놈을 위해서 움직였더니 약간의 피곤이 올라온다. 그러면서 ‘살아있다’라고 느낀다라니 나란 인간도 정말 신기한 인간이다.
“윌리엄인지 하는 늙은 토끼가 제대로 약 올랐겠네요.”
눈을 감아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있을 호석이 말한다.
“만사를 제쳐두고 날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죠?”
“역시 회장님은 남을 괴롭히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호석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신 것 같은데요, 지금 표정 어우야.”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호석.
“선민의식 가득한 제가 귀족이라고 믿는 것들을 엿 먹이는 것은 언제나 즐겁죠.”
***
영국의 귀족들이 즐겨 찾는다는 레스토랑.
그 레스토랑에서 자주보기 힘든 흑인이 몸에 딱 떨어지는 수트를 입고 맞은편에 앉은 미인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물품을 의뢰하셨습니다 미스터 잭슨.”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줄은 몰랐는데요?”
“정말 설레고 있습니다. 이 물건이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달까요? 아마 소더비 역사상 최고의 경매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 흥분해서 계속 떠들어대는 소더비의 어린 대표에게 뭐라 말해야할지 모르겠는 잭슨은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경매품 답게, 그 시작가 역시 흔치 않게 시작하고 싶은데요, 의뢰인이신 잭슨씨의 생각은 어떨까 하여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경매 시작가라···”
“보석 감정사들의 감정결과 보석의 가치만 대략 5천만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의 희소성과 세공, 그 크기까지.”
가격에 흠칫 놀란 잭슨이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해서, 경매 시작가를 5천만 달러로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잭슨 경, 아니 잭슨 씨의 생각은 어떠실까요?”
“경매쪽의 전문가들이 내는 의견이라면 받아 들여야지요.”
“감사합니다. 잭슨, 아마 이 정도 물품이라면 욕심을 낼 부호들이 정말 많을겁니다. 사전에 잭슨과 접촉하려는 인물들도 많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욕심많고 성격 급한 부호들이야 자주 봐왔던 잭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입장에서는 꼭 이 물건을 경매에 올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전 만남을 차단하고자 하는데, 혹시라도 의뢰인의 기분이 상할까 조심하고 있는 상태고요.”
이제 굳이 의뢰인을 만나고자 했던 본론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잭슨.
“그렇군요.”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소더비의 어린 대표는 바로 다이렉트로 말했다.
“대신 이번 경매의 수수료를 딱 필요경비 수준에서만 받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퍼센티지가 아닌 금액을 결정하겠다는 얘기입니까?”
“예, 이번 경매의 수수료는 131만 달러, 우리가 목걸이를 위해 움직이는 순수 비용만 계산한 것입니다.”
잭슨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는 알지 모르지만, 잭슨 입장에서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개인정보를 외부에 유출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소더비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 오니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기존 경매 수수료 4퍼센트가 절대 비용으로 바뀌었으니 131만 달러라는 돈은 정말 저렴한 비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천우진의 명령이 있으니 소더비가 얼마를 부르더라도, 그 경매장에 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소더비측에 전적으로 맡기죠.”
어린 대표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벌떡 일어나 잭슨의 악수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잭슨.”
웃으며 젊은 대표와 악수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잭슨. SKY PMC의 대원들이 그를 맞이한다.
“호텔로 가죠, 중국음식 배달이라도 시켜먹어야지, 영국음식은 정말 똥 같아요.”
피식 웃은 대원들은 별 말 없이 그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로비의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한다.
“좋은 시간 되셨습니까? 미스터 잭슨?”
“예, 뭐.”
“손님이 찾아와 계십니다.”
“손님이요?”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잭슨. 자연스럽게 SKY의 대원들의 표정이 굳는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인물이 찾아온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호텔 로비를 전세라도 낸 것 처럼.
제법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는 양복쟁이들 사이.
잭슨의 입장에서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인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보였다.
문득 천우진의 말이 떠오르는 잭슨.
‘위험할 수 있으니 경호는 두배로 늘려주겠다.’
어째서 그런말을 했는지 이제야 깨닫은 잭슨.
“망할 목걸이가··· 로스차일드 거였습니까?”
대원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도 모르기 떄문이었다.
분명 방금 전 만나고 왔던 소더비의 젊은 대표는, 의뢰인인 자신의 신상정보를 까발리기 싫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저렇게 떡 하니 자신을 찾아온 로스차일드를 보자니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돈 앞에 장사 없다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젊고, 유능하고, 똑똑하다 생각했는데, 그냥 자본주의에 절여진 인재였나보다.
***
우희도.
할아버지도.
사랑스러운 루시도.
모두가 없는 집. 아산댁과 호석만 있는 집은 꽤 썰렁했다. 아산댁의 음식은 훌륭하지만 그렇게 마냥 맛있지는 않았다.
새삼 가족들과의 삶이 익숙해졌나 싶은 순간이었다. 어째서 노인들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괴팍해지는지 조금은 알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들 거리는 다리, 욱신거리는 무릎의 통증을 뒤로 하고 굳이 동네를 걷고, 친구를 찾는 이유를 알겠달까? 전 삶에서는 익숙한 외로움이었는데, 간사한 인간의 몸뚱이는 너무나도 지금 삶에 적응을 잘 해 놓은 상태인 것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잠은 들었다. 글랜피딕 고급 위스키를 반병이나 비웠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술기운을 빌어 잠을 잤단 얘기다. 너무 일찍부터 잠에 들어서 그랬을까?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났다.
물론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영향도 컸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발코니로 가 앉았다.
시가를 태우다보니 혼잣말이 툭 나온다.
“아무래도, 얼른 가야겠어.”
눈 앞에 루시와 루시의 뱃속에 있을 나의 아이들이 그리웠다. 고작 3일 만에.
“일어나셨습니까?”
새벽부터 나와있는 호석.
“일찍 나오셨네요.”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요?”
“늙은 토끼가 제 식량을 찾으러 왔다는 보고입니다.”
제법 비유적인 보고에 피식 웃었다.
“윌리엄이 잭슨을 찾아갔어요?”
“예.”
“푸하하, 늙은 토끼가 약이 바싹 오른 모양입니다. 서류더미에 묻혀 바쁜 와중에 영국까지 날아가다니.”
정호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잭슨 그 친구가 제법 잘 받아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짧은 고민이 스쳤다.
이제 슬슬, 윌리엄 그 늙은 토끼에게 이빨을 드러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천천히 사냥감의 기운이 빠질 때 까지, 어둠속에서 공격한다는 흑표범처럼.
이제는 그림자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내도 좋지 싶었다. 로스차일드는 힘이 빠지고 있으니까.
그건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 더욱 가속도를 내며 진행될 예정이었다.
미국에서 돈 귀신 셋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대비 할아버지, 삭스, 체이스.
록펠러, 골드만글러브, JB모간.
그 덩치가 어마어마한 금융회사들이 공공의 적 ‘로스차일드’를 암암리에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곧, 부쉬의 공급주택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진행될 일련의 과정이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다.
“잭슨한테 연락하세요.”
호석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예, 회장님.”
***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잭슨은 알아서 윌리엄의 맞은편에 앉았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그의 모습이 약올랐을까 윌리엄은 불쾌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는다.
“천한 것이, 겁을 상실했구나.”
“이야, 대 로스차일드가 이렇게 무력 시위까지 벌이시고?”
“꼭, 찢어 죽이고 싶은 놈이 있어서.”
잭슨이 과장된 몸짓으로 제 사타구니를 살피며 말했다.
“어이쿠, 무서워라 지린거 아닌가?”
윌리엄의 얼굴은 흉신악살 처럼 일그러졌다.
“어휴, 명문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그렇게 포커페이스가 안 되서야. 비즈니스 한다는 사람이 기본이 안 되셨네.”
윌리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깟 놈에게 할 비지니스가 없으니, 표정관리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지, 네 놈에게는 내 모든 수를 다 보여줘도 상관 없거든, 어차피 못 막으니까.”
잭슨은 특유의 껄렁한 발음으로 말했다.
“오우, 노인네 말빨 한번 살발하다 살발 해.”
윌리엄은 모멸감에 치를 떨면서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했다.
“그래, 노예 놈아··· 네 주인이 누구더냐.”
“21세기에 노예는 쯧, 어디 18세기에 살다 오셨나?”
윌리엄을 잔뜩 비꼬고 있는 잭슨에게 다가간 PMC대원이 전화기를 내민다. 전화기를 내민 상대는 잭슨이 아닌, 윌리엄이었다.
뭐냐는 듯 올려다 보는 윌리엄.
대원은 말 없이 전화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우리 보스가 할배를 쫓아내고 싶은 모양인데?”
잭슨의 말에 전화기를 집어든 윌리엄.
“누구냐.”
-오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윌리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네 영화, 대사 좋다.
“네 놈은 누구냐고.”
-기억력이 많이 나빠지셨네, 내 목소리도 몰라보고.
머릿속을 스처가는 하나의 인물.
“우진 천?”
-빙고.
쾅.
테이블을 내려친 윌리엄이 전화기를 부술듯 꽈악 쥐었다. 그러나 SKY가 만든 휴대전화는 튼튼하게 그의 악력따위는 가뿐이 버텨준다.
“네 놈이었어? 아시아의 천한 놈이 감히!”
-천하다니, 우리 가문도 제법 유서 깊은 가문입니다만?
“우리 저장고를 털고··· 감히 로스차일드의 행차를 방해해? 그러고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가?”
서릿발 날리는 윌리엄의 분위기에 잭슨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잭슨의 행동을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윌리엄 로스차일드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없는데?
“그걸 알면서 그런 짓거리를 벌렸다?”
-죽을 자신이 없어
“이 놈!”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네, 더 격노하고 막 뒷목잡고 쓰러지고 그럴 줄 알았는데.
“흥, 우리 로스차일드가 고작 이정도에 무너질소냐.”
-그니까, 나도 그럴거 같더라고.
어쩐지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윌리엄.
자신이 언제 이런 감정을 느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이 준비 했어, 기대 해도 좋아.
“뭐, 뭐라?”
-뭐야, 노환으로 이제 귀도 잘 안 들리는건가?
수화기 너머 제법 큰 목소리로 외치는 천우진.
-다른건 안 서면서 자존심만 세우는 대 로스차일드 가주님! 당신을 위해 많이 준비 했으니 즐겨보세요~
부들부들 떨다 소리라도 지르려는 찰나.
-뚝.
전화는 그렇게 끊겼고, 윌리엄의 이성의 끈도 그렇게 끊겼다.
“으아아아아아!”
< 제 17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