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9화. >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
그렇다고 내 일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고민되는 것.
그것은 바로 루시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가 매일같이 미국에서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나의 뿌리는 대한민국에 있었으니까, SKY의 뿌리 역시 대한민국에 있었고, 완전한 장악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대한민국을 버리고 이제와 미국으로 이사를 올 필요는 없었다.
그런 비효율적인 방식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후우.”
시가를 태우며 록펠러 저택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억지스러운 기침 소리가 들린다.
“콜록콜록, 아이들이 아파하고 있어, 콜록콜록.”
루시의 장난에 피식 웃으며 시가를 꺼트렸다.
“왜 나왔어? 밤공기가 찬데.”
“우리 허니가 생각이 많아 보여서?”
“음? 그랬어?”
“응.”
옆자리에 앉아 안겨오는 누시를 받아들이고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냥, 아빠가 된다는게, 좀 싱숭생숭? 그런 느낌이라.”
루시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어떻게 말해야 일하러 갈 수 있을까 생각했으면서.”
우리 할아버지랑 붙어다니더니, 루시도 이제 돗자리를 깔아도 되지 싶었다.
“티가 많이 났어?”
“풋, 하여간 이 워커홀릭.”
“요즘 부쩍 놀고 있는 것 같아서.”
“신경쓰지 말고 다녀 와.”
“응?”
“난 그냥 휴학하고 집에서 쉬려고, 마음 같아서는 한국 집에서 쉬고 싶지만 거기는 마미가 힘들것 같으니까 그냥 여기서 쉬고 있을게,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고개를 내려 루시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녹색 연기가 자욱하지만, 그런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루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두 눈 가득 사랑과 신뢰가 넘실거렸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참 고마운 여자구나 싶었다. 곱게 자라고 귀하게 자랐다. 물론, 여느집 자식도 다 귀하고 곱게 자라겠지만 루시는 그 정도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너른 이해심도 가지고 있었다.
“난 우진의 길을 방해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가정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
“응, 우리 할아버지 말이야.”
난 조용히 루시의 얘기를 경청했다.
“할아버지는 욕심이 많은 분이었어, 아버지와 자신의 할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 하시는 분이었지.”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꿈이었을 뿐, 이루지 못하고 계셨어. 아마도 어렸을적, 가세가 기울던 시기에 충격을 받으셨던 모양이야, 일종의 PTSD랄까? 정권이 주는 강력한 힘이 두려우셨나 봐.”
“음, 대충은 알 것 같네.”
“내게는 한 없이 따뜻하고 자애로운 할아버지였지만 우리 아버지에겐 그렇지 않으셨거든.”
확실히, 대비 할아버지의 성향이나 성격도 호락호락한 스타일은 아닐테다. 우리 할아버지가 산군, 영물 호랑이라면 대비 할아버지는 사파리 초원의 지배자 숫사자와 같은 그런 느낌을 주니까.
“고집도, 생각도. 엄청 까다로운 분이시더라, 우리 파피에게는.”
“그랬구나.”
“그런 할아버지가 요즘 부드러워 졌어. 우리 파피에게도.”
“아~ 좋은 일이네?”
“응,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에 꿀이 떨어지더라, 역시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계셨던 거야, 파피는 그걸 알고 모진 시간을 버티셨겠지. 다 알진 못하지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대충, 알 것 같았다.
지금 루시는 나와 자신의 할아버지를 비교하며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런말을 했어, 우진이 자기를 닮은 것 같다고.”
“그래?”
“응, 그리고 젠틀 천도 자신과 똑같다고.”
“하하, 두분이 워낙 죽이 잘 맞잖아.”
“맞아, 친해지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 나이대에서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테니까.”
루시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허니도 할아버지들이랑 공감하던데?”
“크음, 아니거든?”
“어쨌든, 나는 우진이 좋은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우진이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책임감이라는 걸 너무 무겁게 짊어지고, 스스로를 희생하기 보다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여자다.
배운게 많아서, 교육을 잘 받아서가 아닌, 인품 자체가 훌륭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여자를 잘 선택했다는 생각도.
지금 루시는 내게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억압 받는 삶을 통해 쌓인 스트레스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말라는 말을 돌려하고 있었다.
본인은 날 억압하지 않을테니, 우리 아이들에게도 어떤 길을 강요하지 말란 얘기와 일맥상통 하고 있었다.
“루시 얘기, 명심할게.”
“일하러 가라고 하니까 아주 좋아 죽네.”
“푸핫.”
루시가 정색하고 말한다.
“대신 딱 두가지만 약속해 우진.”
“뭔데?”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날, 나와 꼭 함께 해줘.”
당연한 얘기였다.
“물론이지, 루시가 오지 말래도 갔을거야.”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말을 잇는 두번째.
“바람피면, 넌 죽어.”
나름 싸늘하고 독하게 얘기한 것 같지만, 난 그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하하하, 바람 필 시간도 없어 루시, 난 바람보다 일이 더 좋으니까.”
“과연, 그래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마님.”
“마님이 뭐야?”
“아, 그, 한국 전통적인? 호칭인데 쯧, 한국 문화에 관련해서 선생을 보내줄까? 한국을 좀 배워볼래 루시?”
잠시 고민하던 루시.
“우리 아이들 태어나면 한국에서 살겠지?”
“아마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겠지?”
“그럼 배워야겠네, 학교도 쉬는데 그렇게 할게.”
“알겠어.”
***
강기태는 오늘도 잭슨의 뒤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뱅크의 본사에 방문한 둘.
뉴욕에서 일어난 대규모 테러 이후, 벌써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스닥 시장이 다시 개장되었지만, 무려 14퍼센트가 넘게 하락해 있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시가총액이 공중으로 사라진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미국 금융계는 얼어 붙었고, 로스차일드 뱅크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유보금, 현금자본을 쓸어갈 잭슨과 강기태가 곱게 보일리는 없었다.
“오셨습니까.”
은행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을 나간 인물.
그는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였다.
잭슨은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고개만 살짝 돌려 인사했다.
“또 봅니다.”
윌리엄은 여유롭게 웃으며 가장 상석에 자리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잭슨은 자신의 앞에 노여진 서류들을 스윽 윌리엄 쪽으로 내민다.
“12시가 땡 치자 마자 받아온 시세입니다.”
여기서 말한 시세는 ‘주택 시세’를 말했다. 정확하게는 크로치 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옵션에 걸맞는 주택들의 시세.
서류의 양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시세가 어떻게 변동 될지 모르고 그에따른 지급액수의 변동이 생기고, 또 수수료 역시 바뀐다.
그러니 로스차일드 뱅크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인 상황이었다.
“바로 분석해.”
윌리엄의 말에 은행의 직원들이 빠르게 서류더미를 조금씩 조금씩 떼어간다.
바로 옆, 통유리로 된 사무실에서 전투적인 확인절차가 진행되는 사이, 윌리엄이 묻는다.
“그래서, 크로치 인베스트먼트의 주인은 누구인가? 록펠러? 삭스? 체이스?”
잭슨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앞에 있잖아, 이 잘생긴 사무엘 잭슨이 말이야.”
픽 웃은 윌리엄이 말했다.
“그래, 뭐 그렇다고 해두지. 그나저나 우리가 지급하는 돈, 잘 가지고 있으라고 네 놈의 주인에게 전해, 모가지와 함께 돈도 찾아갈테니까.”
“어이쿠야, 무서워서 살겠나.”
***
대비 할아버지와 부쉬, 그리고 내가 한 자리에 모였다. 요즘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부쉬가, 굳이 시간을 빼 우리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나와 대비 할아버지가 아주 중요한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후아, 만남이 늦어져서 미안합니다.”
부쉬의 정중한 사과에 나와 대비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그에게는 바쁜 시간일테니까.
“아니오, 미스터 프레지던트도 충분히 바쁠테니.”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스터 록펠러.”
내게 고개를 돌려 입꼬리를 돌리다 씨익 웃으며 선물을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부쉬.
그가 건네는 것은 CD였다.
“내 피앙새가 추천해주는 태교 음악을 좀 담아왔습니다. 미안함의 표시이니 받아주시오, 천 회장.”
보기보다 섬세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으며 고맙다 인사하고는 CD를 받았다.
대충 인사치례가 끝났으니, 나는 부쉬에게 말했다.
“바쁘실테니, 빠르게 본론만 나눌까요?”
부쉬가 히죽 웃으며 답했다.
“역시, 이해해주니 고맙습니다.”
대비 할아버지 역시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부드럽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술 한 잔 기울이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죠, 세상이 좀 밝아지면.”
“좋은 말이요 천 회장. 뭣보다 천 회장과 미스터 록펠러의 선견지명에 놀랐습니다. 지금처럼 미국의 시민들이 아픔에 잠겨 있을때, 주택 공급 사업은 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될 수 있다 느껴서 말이죠.”
부정적인 뉴스가 가득한 세상에, 희망이 보이는 뉴스는 언제나 환영받는다. 이럴때 터져나오는 것이 미국은 ‘히어로’기사였다.
시민을 구한 구급대원, 경찰, 또 다른 시민 등.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루가 멀다하고 부정적인 기사들이 쏟아지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또, 개인주의가 깊게 자리매김한 미국에서는 보기드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더 대단하다 얘기해주는 경향도 있었다.
“처음에는 반발도 많았습니다만, 지금 분위기는 격하게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처음 계획했던 것 보다 사업의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음을 의미하죠.”
이어진 부쉬의 말에는 나도 조금 놀랐고, 대비 할아버지도 조금 놀랐다.
“호오, 미국에게는 잘 된 일이군요.”
“사실 민주당 쪽에서 길길이 날뛰고, 공화당에서 옹호를 하니 조금 어색하긴 했습니다.”
정치적인 얘기에 난 피식 웃었다.
미국의 민주당은 한때 ‘공산당’소리를 들었던 집단이다. 그들이 ‘복지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헤프닝과 같다. 그들의 이념과는 모순되는 행위였으니까.
아마도 로스차일드의 입김이 작용 했을테다.
“로스차일드가 뒤에서 조종을 했겠지···”
대비 할아버지의 말에 부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지금은 아닙니다.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으니까요, 또 성난 민심은 대부분 테러단체에 향한 상태고요.”
내가 원하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몇 번이나 부쉬는 언론이 보는 앞에서 ‘강경대응’과 ‘공격’이란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역시, 전쟁은 피할 수 없겠죠?”
내 질문에 부쉬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쟁이 아니라, 처단입니다.”
그러고는 내 말을 정정한다.
“테러단체가 어떤 놈들인지는 확인 하셨고요?”
“물론이죠.”
미국의 정보망에는 아마 원래부터 걸려 있었을테다.
‘설마’, ‘감히’와 같은 방만한 태도 때문에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
물론 앞으로는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한 방 크게 맞은 미국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자존심에 크게 스크레치가 생겼을테다.
원래부터 미국은 ‘프라이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였다.
그 프라이드가 훼손당했으니 당연하게도 강경한 대응이 나올 수 밖에 없을 터. 내가 굳이 전 삶의 기억을 가져오지 않았어도, 앞으로 미국의 대응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또, 미국은 단순히 ‘복수’와 ‘세계평화’라는 허울에 움직이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이 ‘인력’과 ‘비용’, ‘무기’를 투입하는 것엔 반듯이 얻어와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가령 지하자원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말이다.
“파병이겠군요.”
부쉬가 스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역시 대단한 분석력입니다. 천 회장.”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거기에 나도 한 손 보태고 싶은데요?”
부쉬도.
대비 할아버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진심이야?’
‘진심입니까?’
하는 표정들이었다.
물론 난 진심이다.
굳이 완벽한 경호나 받자고 수천억을 들여 PMC를 훈련시키고 유지하고 있는 멍청한 놈이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물렁한 놈이 아니다.
< 제 16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