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7화. >
헛구역질.
결혼한 유부녀가 헛구역질 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인 모양.
“우웁.”
다시 헛구역질을 한 루시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장인어른은 루시가 아닌 날 바라보신다.
장인어른의 눈이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근데 자네 뭐하나?’
‘예?’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장인어른이 내게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다.
“루시, 괜찮니?”
“루시 언니 설마?”
“오오, 드디어!”
루시에게 관심이 몰려있는 그때.
‘이럴때 남자는 고비를 맞이 하지.’
나는 장인어른과 뜨거운 눈빛의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고비죠?’
‘여자는 첫 아이를 평생 기억하는 법이야.’
‘그렇습니까?’
장인어른이 손가락 두개를 쫙 펼쳐서 들어올린다.
‘준비 되었는가?’
‘크음··· 꼭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필수네.’
‘장인어른의 경력을 믿겠습니다.’
‘걱정말게, 도가 텄어.’
‘아까 분명 피를 흘리셨습니다만.’
‘기분탓일세.’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장인어른의 손은 무하마드 알리의 잽보다 빨랐다.
퓩.
“크윽.”
신음과 함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 삶,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리고 우희와 차안에서 울었을 때를 이어 세번째 눈물이 내 두 눈에서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루시! 루시!”
헛구역질 때문에 힘든지 파리해진 얼굴의 루시가 날 확인한다.
나는 빠르게 루시에게 접근했고, 루시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뜨겁게 포옹했고.
짝짝짝짝.
“루시, 우진! 축하한다!”
“축하해요 언니, 오빠!”
“흑흑, 내 딸이 아이를 가지다니!”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한 상황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인어른 너무 세게 찌른 것 아닙니까?’
‘원래 처음이 어려운걸세.’
슬쩍 엄지를 들어올려 장인어른께 보여드렸다.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
루시가 입덪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는 유야무야 종료되었다.
그래도 경험이 있는 록산나 장모님은 능숙하게 입덪에 대처했고, 루시는 ‘절대안정’이라는 대비 할아버지의 명령에 방으로 돌아가 록산나 장모님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후우.”
록펠러 저택의 정문에서 나는 호석, 장인어른, 대비할아버지와 함께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사내 넷이 시가를 입에 물고, 다 같이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을 까닥이거나 하는 꼴은 제법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진심이었다.
“언제오는 거야?”
대비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록펠러 저택의 집사가 말했다.
“이제 10분이 지나고 있습니다. 30분 내로 도착하겠다고 했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크음, 겨우 10분 밖에 지나지 않았나?”
대비 할아버지가 민망함을 감추고, 다시 시가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다. 장인어른과 나, 그리고 호석도 마찬가지였다.
“장인어른, 그리고 호석삼촌. 아빠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빠라···”
“아버지라···”
두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
내가 어려운 질문을 했나 싶었다.
“강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호석삼촌의 말에 고개를 주억 거리던 장인어른이 거들었다.
“그렇지, 나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진짜 남자가 된달까?”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대비 할아버지에게 닿았다.
잔뜩 무게를 잡고 있던 대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남자의 삶은 끝이고, 아버지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
호석삼촌과 장인어른이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후우~’하고 길게 시가 연기를 뱉어낸 대비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먼저간 영원한 나의 피앙새에게는 미안한 말이겠지만··· 그녀를 잃고 2년이 지났을 때는, 다시 사내가 된것 같아 제법 좋은 날도 있었지.”
“아아, 아버지···”
“네 놈은 있을 때 잘해, 록산나 같은 여자가 어디 있더냐?”
“맞습니다.”
대비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내게 말씀하셨다.
“우진아.”
“예.”
“바람피면 넌 죽는다.”
장인어른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는 두 눈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신다.
“어우, 여자는 돌이죠 돌, 세상에 여자는 딱 세명뿐입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장모님, 지켜주고 싶은 내 동생 우희, 언제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줄 루시.”
장인어른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답이 썩 만족스러웠는지 장인어른이 말한다.
“뭐, 비즈니스 차 술집에 드나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버지.”
대비 할아버지도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지, 사내들이란 그런 동물이니까 크흠.”
호석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철컥, 끼이이익.
록펠러 저택의 철제 문이 열리고, 은색 봉고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드디어 왔구만.”
대비 할아버지가 최고급 시가를 대충 바닥에 버리고 비벼 꺼버린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잠시 후.
“임신이 확실합니다. 미스터 록펠러.”
장인어른의 힘있는 팔이 어깨춤에 느껴졌다.
‘됐다!’하는 반응들이었다.
“자세한 결과는 병원에 내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닥터.”
“아닙니다. 항상 후원해주시는 미스터 록펠러께 우리 병원이 감사하지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예, 적당한 날 연락주시면 예약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대비 할아버지가 방 안으로 날 먼저 집어 넣었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장모님과 우희가 바깥으로 나갔다.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가 보였다.
“루시.”
“허니··· 농담처럼 말하던 일이 진짜 벌어졌네?”
“고생했어, 뭐 먹고 싶은건 없어?”
“응, 괜찮아.”
“그래···”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었다.
피식 웃는 루시.
“우진 답네.”
“응? 뭐가?”
“여자 잘 모르는 거.”
나는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루시에게 입맞춤을 해주고는 말했다.
“사랑해.”
“응, 나도.”
루시가 짝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맞다! 젠틀 천에게 얘기해야지!”
“아, 그래.”
나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
새벽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천혁수는 바빴다.
고키부리가 금 세탁을 확실하게 준비했다 장담하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양을 옮기는게 문제군.”
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백부님. 확실히···”
“쯧, 십조 단위 세탁이라니 하, 덩치가 커도 너무 컸어.”
안타까운 음색이지만 천혁수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약간을 붉어진 얼굴, ‘돈’을 생각하니 흥분되는 모양.
지이잉. 지이잉.
진동소리가 전화기를 들어올린 천혁수.
“오냐.”
-할아버지.
“왜. 새벽에 전화질이냐.”
-꼭 말씀드려야 할 소식이라서요? 허니! 내가 할래!
루시의 음성에 천혁수의 표정은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있었다.
“오냐 루시.”
-젠틀 천!
“하하, 그래.”
-저 아이를 가졌어요.
눈을 크게 뜨고 일순간 자리에 굳은 천혁수.
“임신?”
-네!
“당장 가마, 집이니?”
-네! 빨리와요! 우리 아기도 젠틀 천이 보고 싶을 거에요.
“그래야지! 바로 날아가마.”
-우진이 벌써 비행기를 보내놨어요, 나리타 공항 오후 2시에요.
“가서 보자, 몸조리 잘하고.”
-네~
전화를 끊은 천혁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으니 철웅역시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묻는다.
“아가씨가 아이를 가졌습니까?”
“그래, 증손주가 생기겠군.”
“축하드립니다 백부님.”
“크하하, 철웅이 네 놈도 축하한다 이제 할애비가 되겠구나.”
“하하하, 우진이가 더 강해지겠습니다.”
“음··· 그래야 할텐데.”
천혁수는 뭔가 걱정되는 듯 했으나 철웅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어쨌든 고리타분한 돈 얘기만 하다가 제법 좋은 소식이구나.”
“그렇습니다. 백부님.”
“우진이 놈, 아이는 먼 나라 얘기라더니, 부쩍 금술이 좋아진 것 같더라니 결국 결실을 맺었어.”
“아가씨가 워낙 미인이시잖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천혁수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츄하이를 마저 마셔버리곤 말했다.
“우선 고키부리 놈에게 계속 바쁘게 움직이라고 해.”
“예, 백부님.”
“들어가 쉬어, 증손주 보러가는데 초췌해서야 되겠어?”
“맞습니다.”
***
우리 할아버지까지 미국으로 날아오고, 한바탕 기쁨의 눈물바다는 다시 한번 터져나왔다. 이번에도 눈깔을 손가락으로 찔러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나보다는 더 뜨겁게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덕분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대비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까지 셋이서 미국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일은 잘 되고 계세요?”
내 질문에 할아버지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고키부리놈이 제법 수완이 좋더구나, 로스차일드 놈들에게 털어온 귀금속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정확하게는 ‘금’을 위주로 말이다.”
“오, 그 양을 전부 소화시킬 수 있다고요?”
“빠칭고 장과 동인도회사의 후신을 이용할 모양이야, 정부의 힘도 살짝 끌어오고.”
나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날파리들이 제법 욕심을 내겠는데요?”
할아버지가 가소롭다는 얼굴로 말씀하셨다.
“감히.”
대비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우리 할아버지가 설마.”
“그래.”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시가를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제법 까다로운 일은 있더구나.”
“어떤 일이요?”
“한국에서 일본까지 금을 옮기기가 까다로워 양이 양이라.”
“아아, 그거요.”
“그래.”
“그거 준비중이었는데요?”
할아버지가 눈을 ‘음?’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대비 할아버지 역시 흥미롭게 날 바라본다.
“잠시만요, 얼마나 준비됐는지 체크를 안 했네.”
나는 전화기를 꺼내 일본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찰리 박에게 전화했다. 지금 시간이라면 아마도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짧은 신호음이 지나가고.
-예, 회장님.
“아 대표님, 주무셨나요?”
-아닙니다. 일어나 있었습니다. 이제 막 조깅을 가려고요.
“역시 부지런 하시네.”
-뛰어야, 뇌가 돌죠.
“그런가요?”
-예.
“SKY LINE 제팬. 준비되고 있나요?”
-모레 설립 확정 낼 생각입니다.
역시 찰리 박.
굳이 내가 체크하고 있지 않아도 알아서 일처리를 똑부러지게 하고 있었다.
“좋네요, 유통망은 장악했죠?”
-예, 일본은 IT버블과 함께 우리나라보다 사정이 좋지 않은편이라 도산할 회사들이 많았습니다.
“반도체 소재는요?”
-오늘 마지막 회사를 인수하는 것으로 명령하신 회사들은 모두 우리 소유가 될것입니다.
“완벽하네요.”
-감사합니다.
“모레 SKY LINE 제팬을 끝으로, 휴가좀 다녀오세요, 이왕이면 중국쪽으로.”
중국 얘기를 살짝 꺼내니 대비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의 눈이 일순간 빛났다.
두분 역시 앞으로 중국이 어마어마한 성장세를 보여줄 것이라 확신하시는 모양이다.
-으음··· 다음은 중국입니까?
“슬슬, 중국이 살아날테니까.”
-알겠습니다.
“보름은 다른 나라 경유하셔도 좋고요, 뭣하면 SKY LINE에서 여객기라도 전세해드려요?”
-하하, 괜찮습니다. 퍼스트 클래스로 충분합니다.
“그럼 고생하세요.”
전화를 끊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놈,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피식 웃으며 답했다.
“사업은 디테일이죠.”
“범죄겠지.”
“안 걸리면 합법인 세상 아닙니까?”
“그것도 맞지.”
“스카이 라인의 일본 진출, 더불어 자금세탁까지 일석이조 아니겠습니까?”
“은근슬쩍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동상까지 처리할 셈이구나.”
“그건 할아버지가 하셔야죠. 저는 그냥 준비물만 챙겨놨을 뿐이고요.”
“죽을때까지 부려먹겠다는 소리구나.”
할아버지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이며 위스키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나저나, 우진이 네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대비 할아버지는 뭔가 공감하는 것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말씀하세요.”
“너도 이제 한 아이의 아비가 되겠구나.”
“예.”
“나는 우진이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어떤 것이요?”
< 제 16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