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65화 (165/458)

< 제 165화. >

“아쉽게도, 우리가 토끼 사냥을 하는 중이라.”

“푸핫.”

내 말에 대비 할아버지가 마시던 홍차를 뿜었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듯 살짝 손을 들어 예를 표하고, 윌리엄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뭐,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고, 현재는 우리도 써야 할 곳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치 대비 할아버지에게 ‘이 말이 맞습니까?’하고 물어보듯 쳐다보는 윌리엄.

무언의 긍정.

할아버지는 묵묵히 옷깃에 묻은 홍차를 털어내고 시가를 입에 물 뿐이었다.

“음, 다시 고려해주시겠습니까? 미스터 록펠러.”

“담보라도 내밀면서 요구하는 것이 맞지 않나?”

이어진 내 말에 다시 내게 시선을 옮긴 록펠러.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이 부족하다?”

이건 뭐, 자의식 과잉도 아니고 돈 빌리러 왔다는 놈의 태도가 영 꼴불견이었다.

“필요한 액수가 얼마인데 로스차일드라는 당신 가문의 이름으로 담보가 충분하지? 모기지 대출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이 구입할 주택을 담보로 잡지. 당신의 신용등급이 아무리 최상이라고 해도, 적절한 담보는 필요한 법 아닌가? 그게 금융업, 그리도 대출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기본을 들먹이니 자존심이 상했을까, 더는 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대비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역시 말 없이 시가와 차를 즐기는 할아버지를 확인하고는 그에게서 명백한 거절 의사를 느꼈는지 윌리엄은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록펠러씨의 의사, 잘 알겠습니다. 오늘일은 나 역시 기억하겠습니다.”

강한 프라이드가 느껴지고, 꽤 건방져 보이는 태도에 어처구니 없는 실소가 세어 나왔다.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신이 났다.

“아직 궁하지는 않은 모양이죠? 꽤 뻣뻣하군요.”

“돈을 빌리러 왔고, 빌리지 못했다. 이 이상 필요한게 있나?”

“자존심같은 것 까지 챙길거 다 챙기면서 돈을 빌리겠다라···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사정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글쎄. 그런 태도라면 과연 누가 돈을 빌려줄까?”

윌리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역시···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

“그러시던가.”

이제는 얼굴 가득 불쾌함을 매달고 있는 윌리엄.

“들어가시게. 배웅은 안 나가네.”

이어진 할아버지의 축객령.

윌리엄은 까드득 어금니를 짓씹으며 성큼성큼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할아버지가 묻는다.

“저 놈이 토끼더냐?”

“아뇨, 저 놈 아들이 토끼더라고요.”

“어째서?”

“3분을 못 버티던걸요?”

“푸핫.”

“그 핏줄을 타고 났을테니, 늙은 토끼쯤 되겠죠.”

피식 웃은 대비 할아버지가 웃음기를 지우고는 말했다.

“토끼는 제법 꽤가 많은 동물이지.”

“동화속에는 거북이에게도 지는 토끼도 있습니다.”

“그래, 자신 있어 보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항상 그랬던 것 처럼.”

“예, 걱정하지마세요.”

“너무 날카롭게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구나, 맹수는 확실한 순간이 아니라면 발톱을 감추고 있으니.”

대비 할아버지는 아직 날 잘 모르시나 보다.

나는 맹수따위가 아니었다.

“저는 태생이 ‘용’이라 발톱은 드러나 있어서.”

“하하하 드래곤이다?”

“드래곤이랑은 좀 다르죠, 동양의 용은 드래곤 정도는 찜쪄 먹을 테니까.”

***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

그는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옷을 거의 찢듯이 벗어 던지고는 있는대로 분노를 표출했다.

“애송이가··· 하!”

세바스찬은 단박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바스찬이 아닌 그 누구라도 현재 그가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터.

“후우··· 세바스찬.”

“예, 가주님!”

“원로회에서는 아직 별 말 없지?”

“예···”

“쓋,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가증스러운 것들··· 이 내가, 고작 100억 달러에 고개를 숙여야 하나?”

“······”

세바스찬은 지금이라도 100억 달러가 끝이 아닐지 모른다고 얘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윌리엄도 알고 있을테다. 지금은 그냥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나 뱉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100억 달러를 위해 록펠러에게 고개를 숙인 것도 같은 이유다.

장례식장에서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윌리엄.

당연히 이제와 손을 벌리는 것은 웃긴 일이라는 걸 그도, 세바스찬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동산 가치는 하락할테고, 유례없는 대테러 때문에 도무지 얼마나 떨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

자연스럽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 로스차일드 가문이 ‘파산’하는 것은 당연히 말이 안되지만,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주 자리에서는 어쩌면 내려와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임에는 분명했다. 정확히는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파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회사 로스차일드 뱅크에 타격을 받는 것일 뿐.

아직도 굳건한 미국의 1등 은행이고 앞으로도 그 순위는 변치 않으리라 확신했지만, 순위 변동에 이어 어쩌면 당장 경영난에 시달릴 만큼 큰 현금유동임에는 틀림 없었다.

“제기랄··· 고객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린 윌리엄, 세바스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처럼 너무 한번에 큰 금액의 손실을 본다면 자연스럽게 고객들에게 그 사실이 퍼져나갈테고, 신뢰를 잃은 금융사는 사장의 길을 걷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테러가 도움이 되는 것인가···”

테러의 여파라는 프레임은 ‘어쩔 수 없는 일’로 포장하기에는 제법 좋을지 모르지만, 과연 고객들이 관대하게 받아들여 줄지는 의문이었다.

“후우··· 그 잭슨이라는 놈 연락은 닿았나?”

“오전에 뉴욕 본사에 방문했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처는?”

“기다려달라 통보했습니다.”

“쯧··· 비행기 준비해, 직접 만나야겠어.”

“예.”

***

편안하게 쉬고 싶었지만, 아직은 쉴 때가 아닌 모양이다.

“네, 본부장.”

-회장님, 로스차일드 뱅크에서 기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기다리세요, 어차피 시간은 우리편이니까.”

-예.”

“단, 이번달을 넘기는 것은 안 됩니다.”

-테러의 여파러 부동산 가치도 수직 하리라 보시는군요?

“그것도 그거고, 부쉬의 주택공급 사업계획이 곧 발표 될겁니다.”

-아아, 정보가 있으신가 보네요.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발표가 될 겁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러니 옵션 행사는 며칠 뒤에 하는 것이 더 이롭겠죠?”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척하면 척이니, 일이 편하다.

주식시장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무릎에서 매수하고, 어깨에서 매도 해라.’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있으면 투자하고, 익절은 항상 옳다는 말로 들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유는 정보의 차이.

발바닥에서 사서 정수리에서 파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들의 정보 수집량은 어마어마하고 노력도 상당하다. 어떤 슈퍼개미는 투자전에 직접 해당 회사에 수십번이나 방문해 둘러보고, 움직이는 물류를 확인하고 직원들의 표정 그들의 생활의 질까지 확인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사소한 것, 작은 정보 하나라도 주식시장에는 예민하게 작용한다는 방증이다.

나는 확실히 집값이 떨어지리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테러의 여파도 있겠지만, 곧 발표될 주택공급계획도 언질을 받았으니 기다릴수록 로스차일드가 나에게 지급해야 할 액수는 늘어난다.

복리의 마법이라는 말 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당장 현금이 말랐을테니 돈을 빌리러 온 윌리엄, 범의 아가리에 손수 찾아오다니 웃긴 일이다.

그 돈이 많고 대단하다는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누가 자신을 공격하는 줄도 모르고 공격자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아이러니.

윌리엄의 강한 프라이드와 정보의 부재가 오는 시너지였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것이 이번 테러 사건이었다.

지원하던 정치인이 낙선하고, 아들이 죽고, 금고가 털리고, 가문내에서 입지가 흔들리니 정치도 해야 할테고. 몸이 두개라도 바쁠 그에게 정보의 부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크로치 인베스트먼트가 생성한 옵션의 컨펌은 로이드 로스차일드가 한 모양이니 정보의 부재는 더 컸으리라.

“상식적으로 망나니가 일까지 잘한다는 건 오바지.”

“응? 허니~ 불렀어?”

막 시가를 물려다가 황급히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잠깐 일 때문에 통화 했어.”

루시가 뒤에서 안겨오며 말했다.

“우진도 너무 워커홀릭이야, 조금은 쉬어~”

“안 그래도 그럴려고 했어.”

가슴과 복부에 닿아있던 손이 점점 내려간다.

“이건 휴식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임신 한다면 어쩐지 딸일 것 같아.”

“확실해?”

“응, 느낌이 와.”

“그건 못 참지.”

나도 토끼 같은 딸내미와 놀아보고 싶었다.

전 삶, 유독 딸바보 동료들이 많았는데, 도대체 그 심정이 무엇인지, 매일 뭣 같은 직장생활을 하다가도 딸 이야기만 나오면 함박웃음을 짓던 그들처럼.

그저 평범한 아빠도 되어보고 싶었다.

***

도쿄 외곽의 고급 풍속 주점.

“크음, 불쾌한 얼굴들이 있군.”

사회당 당대표 스기하라의 말에 민주당 당대표 자토이치가 마찬가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민당 독주를 막기 위함이니까 서로 얼굴은 붉히지 맙시다.”

공화당 당대표 이치로가 손을 들어올리며 둘을 중재하려고 입을 열었다.

“자자, 진정들 하십시오 동지들.”

“동지는, 쯧.”

“후우···”

어쨌든 그들은 자리에 앉았고, 방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고키부리 전 총리는 언제 온답니까?”

이치로에게 묻는 스기하라.

“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일찍 왔군요.”

“예의를 안다면 그래야겠죠.”

민주당대표 자토이치가 살짝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나라의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는 사람과 만남을 가지는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한다. 확실히 고키부리의 행실이 정치계에서는 좋지 못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의 지지율이 점점 회복세를 띄고 있으니 그의 영향력이 전혀 없다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

“그나저나 테러라니···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피해도 피해지만 나스닥이 멈췄어요, 심각한 일입니다.”

“후우··· 우리 경제의 잃어버린 세월을 이 일로 매꿀 수 있다면 다행이건만.”

“쯧쯧, 미국이 망하면 우리가 망하고 세상이 망할텐데요? 당장 우리 주식시장도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전혀 크게 관심도 없는 문제들을 시시콜콜하게 털어 놓는다.

‘희생자들이 안타깝다.’, ‘경제위기를 어떻게 타파해야 할까?’와 같은 그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주제의 대화였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표심’ 그리고 오래도록 장기집권하고 있는 ‘자민당’을 몰아내는 것이었지만, 누구 하나 목적을, 목표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드르륵.

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문이 열리고 고키부리가 뚜벅뚜벅 자신있는 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스기하라 대표, 자토이치 대표, 이치로 대표.”

“오랜만이오 고키부리 전 총리.”

“전 총리, 조금 늦으셨습니다.”

“요즘 다시 이미지를 회복하고 계십니다? 전 총리.”

세 명의 당대표 모두 굳이 ‘전 총리’라는 말을 언급함으로써 이제는 그들과 비슷한 위치에 고키부리가 서 있음을 강조한다.

고키부리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짧은 악수를 나누고는 그들을 자리에 앉혔다.

“시간은 금과 같으니, 본론을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당대표 모두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키부리를 쳐다본다. 그도 그럴것이 언제나 길게 말하고, 술 자리를 즐기며, 여성편력이 심했던 고키부리의 평소 행동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요즘 내가 누구와 함께 다니는지 알고 계시지요?”

“크음, 한국의 정치인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스기하라 대표. 천혁수 전 한국 복지부장관이지요.”

“그래서요?”

“그도 우리와 같은 정치인 아니겠습니까?”

세 당대표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천혁수 그치도 결국은 표심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치로의 말에 고키부리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 저 몰상식한 자민당을 밀어내볼까 싶습니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세 명의 당대표가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민당은 내게 할복을 권유했습니다. 총리의 자리에 있을때는 보이지 않던, 내 몸뚱이에 연결된 선이 보였지요··· 나는 한낱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할복을?”

“할복? 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야만인도 아니고··· 쯧.”

고키부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치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끝내고는 비릿하게 올라간 고키부리 총리의 입꼬리.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세 명의 당대표.

““오카네.””

네 명이 동시에, 똑같은 말을 뱉었다.

일본어 ‘오카네’

그것은 ‘돈’을 의미하고 있었다.

< 제 16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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