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4화. >
9월 12일 오전 6시 뉴욕행 비행기를 예약했던 강기태. 9월 11일은 얌전히 호텔에서 쉬기로 했었다. 그래야 새벽부터 움직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행 취소요? 후우···”
슬쩍 TV로 시선을 돌린 강기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카지노 안에서도, 그리고 바깥에 어디를 가도, ‘울음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기태는 이내 다시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예.
“회장님··· 비행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결항 혹은 무기한 대기입니다.”
-아아, 테러 때문이겠네요.
“예··· 분위가도 좋지 않아서 휴가를 즐기기도 좀 그렇네요.”
-전세기 보내드려요?
“뉴욕에 간다고 뭐 달라질게 있을까요?”
-그래도 가세요, 분위기는 좋지 않겠지만 로스차일드 쪽에서 만나자고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전세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 전용기로 보내드리죠.
“그, 회장님?”
전화를 끊으려는 천우진을 붙잡은 강기태.
-예.
“혹시··· 알고 계셨던 겁니까?”
-오늘 비슷한 질문 많이 받네요.
“크음, 공교로워서 그렇습니다.”
-세상엔 많은 우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우연으로 돈을 벌고요.
“그렇습니까···”
-비행기는 오늘 밤에 잡아드리겠습니다. 전용기는 제재하지 않을테니까.
“예,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강기태는 찜찜함을 버리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천우진 회장에게는 선구안, 혹은 예지안 같은 것이 있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단시간에 거부가 된 천우진.
물론 그의 배경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압도적으로 공격적인 그의 투자 방법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정말 그것이 직관과 통찰로 이루어낸 것이라면.
“역사에 길이길이 회자 되겠지.”
고개를 털어 상념을 날려버린 강기태는 팔자 좋게 휘파람을 불며 칵테일을 넘기고 있는 잭슨에게 향했다.
“오늘 늦은 밤 비행편이야.”
잭슨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이 난리에 비행편을 구했다고?”
“회장님께서 전용기를 보내주신다는 군.”
“와우, 화끈한데? 하긴 우리가 벌어들일 돈이 얼마인데 당연한 건가?”
입술을 핥으며 말한 사무엘 잭슨을 빤히 바라보는 강기태. 어느새 그의 얼굴은 천우진을 약간이나마 닮아 있었다.
“허튼 생각은 버려, 명줄이 짧아지니까.”
잭슨이 아랫입술을 내리고 양손바닥을 펼쳐보이며 진정하라는 제스쳐와 함께 말한다.
“워워, 진정하라고 친구, 내가 받기로 약속된 수수료만 해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으니.”
“부디 그러길 바라지.”
잭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이 난리통에 전용기를 운용할 정도라면··· 휘유, 그런 돈을 탐내는게 미친놈이지. 걱정하지 마, 나도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놈이니까.”
“그래, 편히 쉬어 둬, 로스차일드쪽에서 연락이 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오케이.”
***
윌리엄 로스차일드가 착잡한 표정으로 시가를 태우며 서류에 적힌 숫자를 재차 확인한다.
“이거··· 정확한거야?”
윌리엄의 물음에 세바스찬이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아들··· 로이드가 싸 질러 놓은 똥이 300억 달러다? 그것도 현재까지는 말이야··· 옵션을 행사하는 날 정오를 기준으로 시시각각 변한다라··· 재미있군. 제대로 당했군··· 마치 부쉬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내 놓을 것이라 확신이라도 한 것 처럼 말이야.”
부정할 수 없는 윌리엄의 말에 세바스찬은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길게 시가 연기를 내뿜은 윌리엄이 복잡한 숫자들이 적혀 있는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옆에 다른 서류를 들어 올린다.
“대출상품을 증권화 해서 옵션 상품으로 만든다라··· 재미있는 놈들이군.”
차분한 목소리의 윌리엄.
“크로치 인베스트먼트라. 가랑이란 소리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회사 이름부터 엿 같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하는 그.
“현재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은?”
“뉴욕 전체가 마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액수만 불러.”
차디찬 음성에 세바스찬이 어렵게 입을 연다.
“180억 달러입니다.”
“망할 테러단체 놈들··· 저녁 만찬 준비해, 원로회에 손을 좀 벌려야겠어.”
“예, 가주.”
“이 놈들한테 연락해, 혹시라도 저 타워 안에서 뒤졌을지도 모르니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삭막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윌리엄.
세바스찬은 익숙한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가주의 집무실을 벗어날 뿐이었다.
***
9월 12일 오후.
워싱턴 록펠러 가의 저택에 도착한 우리들.
우희와 루시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덩그러니 웃고 계시는 대비 할아버지와 마주섰다.
“잘 다녀왔나?”
“예, 제법 힐링하고 왔습니다.”
“뉴욕이 요란할 것은 어떻게 알고 내 손녀를 챙겼구나.”
“글쎄요, 할아버지들이 증손주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파핫,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실 없는 농담에 마냥 싫지는 않으신지 크게 웃는 대비 할아버지.
“가자, 제법 나눌 얘기가 있으니.”
“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워싱턴의 9월.
한 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덥기도 하지만 늦은 오후에는 산책하기 딱 좋은 그런 날씨였다. 그늘 아래 가만히 앉아 있는다면 제법 기분 좋은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그런 날씨.
“앉자, 저녁까지 시간이 있으니 시가나 한대 태우지.”
“예.”
대비 할아버지가 주는 쿠바산 최고급 시가를 취향에 맞게 손질 한 뒤,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먼저 불을 붙인 할아버지가 운을 뗐다.
“미국이 멈췄구나.”
“예, 정확히는 금융업계가요.”
“그래, 최고, 최대의 뉴욕이 난리니까.”
‘미국의 금융이 마비됐다’란 말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 삶 911테러 이후, 주식시장은 일주일 동안 열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주식시장이 개장되자 마자 주가의 14퍼센트가 공중으로 증발해버렸었다.
과연 이번 삶에서는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원래의 역사에서는 이번 테러 사건이 미래의 서브프라임 사태와 깊게 연관이 되어 있었었다.
물론, 이제는 아니다. 내가 모기지 대출에 한발을 담그는 순간, 그 사건은 역사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라도 다시 일어난다면 원래의 역사보다 수년 뒤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것 까지 예측한 것은 아니겠지?”
“오우, 할아버지 이제 그 질문 질려요.”
“파핫, 역시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겠구나.”
“예, 꼭 한번씩은 물어 보네요.”
“우진이 네게 행운의 여신이라도 깃든 것일까? 자꾸만 좋은 조건이 펼쳐지는구나.”
뭐라 대답할까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비 할아버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행운의 여신까지 거론하기에는 너무 피가 많이 흘렀네요.”
“흠··· 그것도 그렇구나.”
슬쩍 나를 바라보는 대비 할아버지.
“허튼 동정심을 부리는 건 아니고요.”
“그래야지. 우리는 그래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요.”
“사실 굳이 로스차일드를 흔들겠다 했을때 짧게나마 고민했었다.”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기에 말 없이 경청했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모기지 대출에 편승해 서민들의 피를 빨았어도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돈이 벌리는 세상이 도래했을테니, 장기적으로 제법 대단한 액수의 돈을 벌었겠지. 그러다 끝물에 지금과 같은 옵션에 베팅했다면, 확실히 대단한 자본이 생기지 않았겠더냐?”
“단순이 그것과 현재의 수익만 놓고 보자면 당연히 말씀하신 일이 수익은 더 컸겠죠.”
피식 웃으며 말하는 대비 할아버지.
“시간이 금이지.”
나와 같은 생각이신 모양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돈이라는 놈은 눈덩이와 같아서 점점 더 불어나게 될테다. 로스차일드 놈들도 마찬가지였을테다. 물론 미래에 붙었어도 나는 그놈들이 굴리는 눈덩이보다 더 많이, 더 빨리 굴릴 자신이 있으니 압도할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대비 할아버지는 그 부분을 얘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로스차일드가 자본에서 더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부정 할 수없는 사실이다. 록펠러가는 독과점 법으로 석유사업에 대한 철퇴를 맞은 이후 쇠락을 거듭했으니까.
물론 나와 록펠러가의 자산을 다시 합친다면야 로스차일드에 비빌 수 있을 터. 그러나 나도, 그리고 대비 할아버지도 서로의 자산을 합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서운하지도, 서운하게 생각 할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우리는 놈들에게 시간을 뺏어 온 겁니다. 놈들은 쇠퇴하고, 우리는 증식하겠죠.”
“그래, 맞다. 분명 우진이 네가 제시한 방법은 그렇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으니까.”
“지금의 격차가 단순히 유지될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앞도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할테니까요.”
“그래야지··· 미국땅에 놈들이 사라지는 꼴은 꼭 보고 싶구나.”
“얼마 안 걸려요, 5년이나 걸릴려나?”
가볍게 툭 던지는 장담에 대비 할아버지가 기분좋게 껄껄 하고는 웃는다.
“이래서 우진이 너와 하는 대화가 즐거워 하하하, 꼭 내가 간지러워 하는 부분을 긁어주니 말이다.”
“다행이네요.”
그대로 앉아서 시가를 태우던 대비 할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곧, 로스차일드의 가주놈이 방문 할게다.”
이번 얘기는 제법 놀랐다.
그가 굳이 록펠러 가에 방문 한다기에.
“낯짝도 두껍네요.”
“푸핫, 자본주의에 잘 맞는 두께지.”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돈이 왕이고 신이니까.
그걸 위해서 하는 어떠한 방식도 원색적인 비난을 할 필요는 없을테다. 누구보다 이 자리에 있는 나와 대비 할아버지는 자본주의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부류니까.
“이유는 뭐, 돈이겠네요.”
“그래, 식상하게도 그렇다.”
슬쩍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가 지나가고 있는 시각.
“대충, 크로치 인베스트먼트가 재촉한 모양이네요.”
“하루가 다르게 금액이 휙휙 변할테니, 급한 것은 로스차일드겠지.”
“예.”
“미국이 멈췄으니··· 하하, 제법 애가 타는 모양이야.”
“놈들의 비자금 창고도 슬쩍 했고요.”
“그래, 그게 정말 베스트야.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지 않았다면 내게 넙쭉 고개를 조아릴 로스차일드 놈을 못 볼뻔 했구나.”
“다, 제가 선견지명이 있던 겁니다.”
“파핫, 그래 인정하마.”
마침 나와 대비 할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집사.
“윌리엄 마이어 로스차일드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예.”
집사가 사라지고, 나와 대비 할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시가를 태울뿐, 별다른 예를 갖추지는 않았다.
윗 사람도 아니거니와, 반가운 손님도 아니며 현재는 나와 대비 할아버지에게만 원수 같은 놈이겠지만, 곧 놈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품게 될게 분명했다.
철천지 원수가 될 놈에게 굳이 친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으름장을 놓던 놈이 과연, 얼마나 두꺼운 낯짝을 가지고 왔을지, 또 어떤 감언이설로 우리를 꼬시려 할지 궁금했다.
물론, 그 놈이 무슨말을 하던 흔들릴 나와 대비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며칠만에 뵙습니다 미스터 록펠러. 다시 보는군요 미스터 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고, 대비 할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손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게.”
윌리엄에게도 편하게 말 하는 할아버지.
그도 그럴게 현 로스차일드의 가주는 이제 60줄에 오른 인물이고, 대비 할아버지는 윌리엄의 아비와도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경황이 없어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했던 것 같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일테니 이해하겠네.”
“감사합니다. 언제와도 이곳은 참 푸근한 마음이 드는 곳입니다. 어렸을 때는 제법 자주 놀러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발걸음 한번 옮기기가 어렵군요.”
뭔가 유대감이라던가, 친분따위를 들먹이려는 것 같은데 나는 굳이 그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앞서 얘기했지만 시간은 항상 금과 같은 것이니까.
특히나 나와 대비 할아버지같은 거부들에게는 더욱더 시간은 귀중하다.
“피차 바쁠 것 같으니 본론만 합시다.”
마치 주인인양 툭 하고 뱉어낸 내 말에 막 입을 열려던 윌리엄이 제법 무덤덤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을테지만 꽤 괜찮은 포커페이스라 칭찬 할 만 했다.
“록펠러씨도 뉴욕의 일로 바쁘실테니 미스터 천의 요구대로 본론을 얘기하겠습니다.”
대비 할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가를 태웠다.
“록펠러씨도 모기지 대출을 내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그랬지.”
“부쉬의 주택 보급 사업 때문에 모기지 대출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 건 때문에 자금유통이 필요한데, 뉴욕이 마비된 상황이라 돈이 묶였습니다. 록펠러씨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을 조금 융통할까 싶습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결국은 ‘돈 없거든요? 빌려주세요.’였다.
“자네 가문의 일원들이 유통하는 자금이 있을게 아닌가?”
“아쉽게도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대비 할아버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도 아쉽지만 빌려줄 수 없네.”
“음, 역시 뉴욕의 일 때문에 자금이 묶인 것입니까?”
고개를 젓는 할아버지.
고개를 갸우뚱 하는 윌리엄.
대비 할아버지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손녀 사위에게 물어보게.”
별 수 없는지 내게 고개를 돌리는 윌리엄.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쉽게도, 우리가 토끼 사냥을 하는 중이라.”
< 제 16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