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3화. >
빠른속도로 빌딩숲 사이를 비행해 그대로 무역센터 건물을 들이 박은 두번째 비행기.
“아아아!”
“아아!”
“꺄악!”
TV로 보이는 화면임에도 미국인들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반응과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세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뉴욕.
그곳은 분명 미국의 중심 도시중 하나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아는 사람들이 있을 법한 곳, 그렇기에 TV를 보면서 바쁘게 전화기를 들어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내 옆에서 예쁘게 조식을 먹던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무역센터 건물과는 제법 먼 거리에 있는 학교에 재학중이지만, 그래도 뉴욕에는 루시의 지인들이 있을 터.
“레이미! 괜찮아? 별 일 없어? 왜 그러긴! TV를 봐! 뉴스를 보라고!”
나와 우희는 뉴욕에 연줄이 없으니 굳이 연락을 돌릴 곳이 없었다. 그나마 걱정되는 인물들은 JB모간의 체이스, 골드만글러브의 삭스 정도지만, 그들은 이미 대비 할아버지와 워싱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굳이 연락할 필요를 못 느꼈다.
솔직히.
대비 할아버지만 무사하면 그만이기도 하고.
체이스와 삭스는 그저 업무상 파트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니까.
전화를 끊은 루시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우진! 설마 알고 있었던 거야?”
“뭘?”
“뭐긴! 저거!”
TV를 가리키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루시.
“난 다 알지. 미래가 궁금해?”
“허억, 역시!”
입을 가리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루시. 퍽 그 모습이 귀여워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루시는 너무 큰 대운을 이미 사용했어, 앞으로는 대운이라 부를게 별로 없겠어.”
“뭐어? 왜!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데!”
“나와 결혼을 했잖아? 그게 루시의 인생에서 가장 큰 대운이었다고.”
“에이씨! 장난이었어?”
내 장난도 밝게 받아주는 것을 보니, 놀랐던 모양이지만 다행히 지인들은 무사한 모양.
지인들 중 누군가에게 큰 피해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밝게 웃고 있을수만은 없었을 터.
“친구들은 별일 없는 모양이네?”
“응, 아무래도 그 쪽은 학교랑은 거리가 있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응··· 다행이지··· 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게.”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짓는 루시의 등을 두어번 두들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분위기가 흉흉할테니, 오늘은 숙소에서 푹 쉬자.”
“그래, 그러자.”
***
같은 시각. 도쿄 부촌의 한 단독주택.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 잠을자고 있던 천혁수가 번쩍 눈을 뜨고는 말했다.
“누구냐.”
부촌답게, 집안 내부는 매우 조용했지만, 천혁수는 잠결에도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따위도 없었건만 허리를 세우는 그.
“백부님, 철웅입니다.”
“그래, 보인다.”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급히 TV를 시청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미국 뉴욕에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테러?”
“규모가 심상치 않습니다.”
“오늘이 며칠이지?”
“뉴욕 기준, 9월 11일 오전 9시 입니다.”
“으음···”
“아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읊조린 천혁수의 말에 백철웅이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하고 묻는다.
“아니다. 가자.”
“예.”
철웅이 먼저 앞장서고 천혁수가 일본식 가운을 걸치고는 거실로 나와 TV 앞 소파에 앉는다. 이미 TV에는 미국의 소식이 속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뉴욕의 트윈타워가 불타고 있는 모습.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모습이었다.
“세상이 뒤집히겠구나.”
“예.”
“고키부리 그 놈은?”
“자고 있습니다.”
“깨워 와.”
“예.”
곧 고키부리가 정신 차리지 못한 모습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천혁수는 말 없이 턱짓으로 TV를 가리킨다.
“헉, 저곳이 어디입니까?”
“미국 뉴욕.”
“저 건물 설마, 국제무역센터입니까?”
“그래.”
“미친···”
천혁수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당분간 세상이 저 일로 몹시 시끄럽겠지?”
“예, 그럴겁니다. 대다수의 언론이 미국에게 주목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별 효과가 없겠지?”
흠칫 몸을 떠는 고키부리.
지금 천혁수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네 쓰임새가 다 되었다.’하는 말로도 들리기 때문이었다.
고키부리가 바쁘게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천혁수는 피식 웃으며 어느새 대원 중 하나가 내온 따뜻한 사케를 홀짝이고 있었다.
고키부리의 머리는 더 바쁘게 돌아갔다.
지금 천혁수가 마시고 있는 저 사케가 식기전에 그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미 천혁수가 보유한 금을 본 상황.
욕심이라는 놈에게 잡아먹힌 고키부리는 어떻게든 그와의 연을 이어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왜 대답이 없나?”
고키부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 지금이 기회입니다!”
“기회?”
“하잇!”
“늦은 시간이니 살살 말했으면 좋겠는데.”
“아, 죄송합니다.”
설명 해보라는 듯, 다시 작은 잔에 따뜻한 사케를 따르는 천혁수.
“세상의 시선이 저곳에 닿아 있을때, 우리는 조용하게 금을 움직이는 겁니다.”
천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린다.
그가 바라던 대답이었던 모양.
“어떻게?”
“무역센터가 마비된다면, 일시적으로 경제공황이 올겁니다.”
“그렇겠지,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는지 고키부리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말씀이십니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금을 세탁한다.”
“하잇! 내일 당장 관련된 인물들과 접선을 하겠습니다.”
“좋아, 움직여 봐.”
“예!”
천혁수의 손짓에 대원 몇이 고키부리를 데리고 사라지자 철웅에게 물었다.
“우진이 놈이 말하던 것이 저것이었을까?”
“어떤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PMC가 필요한 순간이 생긴다고 했었지.”
“으음.”
“이건 놈을 처리하는데 굳이 군사력이 필요하지는 않았어.”
백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문적인 군사작전 훈련까지 받은 대원들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지하세계에서 군림하던 해결사들을 소집했으면 될 일이었다.
“일본, 그리고 프랑스. 그건 곁가지라는 느낌이었지.”
“예. 확실히···”
“도대체 그 녀석, 어디까지 내다 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하기가 어렵군.”
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대견스럽지 않으십니까?”
“그거랑은 별개로, 그냥 궁금해.”
“직접 물어보시지요? 조손 사이에 전화 한 통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천혁수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파하, 아주 손 쉬운 해결책이 있었군.”
철웅이 부드럽게 웃으며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더니 다이얼을 누르고는 천혁수에게 내민다.
웃는낯으로 전화기를 귓가에 가저간 천혁수.
-여보세요.
“나다.”
-예, 할아버지.
“뭐, 당연히 뉴스는 봤을테고.”
-거기 지금, 주무실 시간 아니세요?
“철웅이가 깨우더구나, 꼭 봐야 할게 있다고.”
-아아, 확실히 예삿일은 아니죠.
“그래. 네 놈은 어디더냐?”
-플로리다에요.
“또 놀고 있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천혁수.
-열심히 벌었으니, 열심히 써야죠?
“할애비는 죽을때까지 열심히 일 하고?”
-에이, 이제 일본에서 할 일도 없으실 것 같은데 이쪽으로 넘어오세요? 적어도 2개월은 미국 때문에 시끄러울테니까.
“네놈 창고에 있던 금덩이들을 세탁해볼까 싶구나.”
-아아, 일본에서요?
“오냐.”
-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게 있었다.”
-예, 말씀하세요.”
사케를 홀짝인 천혁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일어날 테러. 알고 있었더냐?”
-설마요.
“이런날을 위해서 PMC를 계획한 것이 아니야?”
-그건 맞죠, 테러가 어떤 방식일진 몰라도, 분명 비일비재하게 발생할거라 생각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상황으로 비춰봐도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고요.
“흐음, 굳이 위험한 사업에 손을 벌리는구나.”
-방산과 연결되어 있는거에요, 이번 전쟁에 손을 좀 빌려주고, 제법 좋은 무기들을 가져올까 싶어서요. 좋은 기술이나.
“녀석, 멀리도 보고 있구나.”
-겸사겸사 명성 높아진 PMC로 고급 의뢰들도 좀 받고요.
천혁수가 피식 웃어버렸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손주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고 있었다.
“녀석, 투자대비 얼마를 뽑아 먹으려고?”
-뽕을 뽑아야죠. 자주국방! 매번 대통령들이 외치던 공약중 하나 아닙니까? 그거 아마 할아버지가 실천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피식 웃은 천혁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벌써부터 피곤한 소리는 됐고, 우희나 바꿔.”
-옙!
전화기 너머 요란스러운 소리가 이어지다 이내 천혁수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아버지~
“오냐~ 우리 손녀.”
천혁수의 얼굴은 고키부리를 바라볼때와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나는 얼굴이었다. 세상 더 없이 따뜻하고 인자한, 그런 얼굴. 그에겐 지금 이 순간이 어떠한 휴가 보다도 더 달콤한 힐링이었다.
***
세계 최대. 최고의 금융도시 뉴욕.
그곳이 마비되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전 세계 금융인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식시장.
그곳은 욕망 덩어리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시시각각, 매분 매초 생사가 결정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장이 정지했으니 당연히 금융가에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금융시장의 거두라 불리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구성원들 역시 마찬가지.
점심 오찬은 자연스럽게 취소 되었다. 다들 각자의 본토에서 바쁘게 전화로 일처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미친 개같은, 테러라니!”
윌리엄은 정말이지 요즘 같아서는 콱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열이 받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위기감’이라는 존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애매했다.
“받아올 수 있는 보고서는 다 받아와! 1센트 대출이라도 상관없으니 빨리!”
세바스찬은 윌리엄이 뭐 그렇게까지 챙기나 싶었다.
“그럼 너무 방대한 양입니다.”
“각 지사의 에이스들 다 불러.”
“항공기 테러로 인해 항공편 역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전세기, 전용기 계속 돌리고 헬기도 돌려!
“예.”
“정신 똑바로 차려! 저 빌딩 안에서 사라진 사람중에는 우리 고객도 있었을테니까!”
“예!”
삽시간에 모여든 대응팀은 바쁘게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역시 서류의 무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빌릴 수 있다면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이었다.
지금 미국의 금융가는 누가 먼저 정신을 차리냐에 대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가장 빠르게 ‘마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 피해를 줄이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버럭 소리를 지른 젊은 사내.
윌리엄은 당연히 좋지 못한 표정으로 그 사내를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뭐야?”
“그, 그게 이 말도 안 되는···”
팍 인상을 찌푸린 윌리엄이 빠르게 손짓하며 말했다.
“가져와!”
사내는 뛰다시피 윌리엄에게 서류를 건냈다.
빠르게 서류를 살피던 윌리엄의 혈색이 굳어갔다.
시퍼렇게 변한 입술로 다급하게 외치는 그.
“이런 시발! 이거 뭐야! 왜 옵션 행사일이 오늘이야!”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 서류는 모두 이제는 세상에 없는 로이드 로스차일드가 처리하던 서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여, 여기도 있습니다.”
“여기도!”
“여기에도 있습니다!”
“엇, 여기도?”
윌리엄 로스차일드의 눈이 질끈 감겼다.
“담당자가 누구야!”
“그, 그것이 로, 로이드 로스차일드···”
어째서 이런 사단이 일어났는지, 이제야 알게된 윌리엄.
“맙소사··· 맙소사···”
< 제 16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