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62화. >
미국 워싱턴.
로스차일드가의 대저택에 줄지어 고급 세단이 도착하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찬행사가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정찬장에서 윌리엄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 자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윌리엄 로스차일드의 눈치를 보며 자리했다.
12개의 자리가 꽉 차고.
“다들 모이셨습니까?”
윌리엄의 말에 세바스찬이 작게 ‘예.’하고 대답했다.
“오시는 길에 소식은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현재 부쉬에 의해 새로운 사업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쪽 금융을 꽉 쥐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카룽 로스차일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예, 가주께서 하는 모기지론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염려하고 있습니다.”
카룽의 말에 다른 로스차일드들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들의 자금역시 윌리엄 로스차일드의 손에 이끌려 투자된 대출 사업이 ‘모기지 론’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진국형 대출 사업. 주거 안정 지원 대출 사업.
그런 허명을 가지고 있는 ‘모기지’ 그렇기에 브루주아들의 숙명 노블리스 오블리주까지 만족시키는 사업이라 자화자찬 하며 그들의 사재를 털어가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표정이 좋을 순 없었다.
“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어쩐지 촘촘하게 엮인 거미줄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어진 윌리엄의 말에 모두가 저마다의 표정으로 불쾌함을 드러낸다.
“감히 누가 있어, 우리 로스차일드를···”
“그 말을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가주.”
“감히 우리를?”
윌리엄의 손짓에 세바스찬이 빠르게 각 원로들에게 서류를 전달한다.
샤락샤락.
각자 서류를 살펴본 원로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딱 꼬집을 수 없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깔끔하군요.”
원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윌리엄이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보르도의 지하 저장고를 발설한 인물은 가문내에 딱 두 명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낸 윌리엄.
“한 명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나의 아들.”
가증스럽게도 원로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아직 가주께서 젊으니, 새 후계를 만드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럼요, 안 그래도 이번에 좋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남자에게 그렇게 좋다고 하더군요.”
이때가 기회라도 된다는 양, 얼른 아부에 목을 매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한 윌리엄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또 한명은, 카룽.”
카룽 로스차일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이 내가 저장고를 발설했다?”
“그대의 부인께서 저장고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계시더이다.”
쾅!
테이블을 내려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룽이 성난 불어로 자신의 시종을 부른다.
서둘러 달려온 시종이 얼른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확인은 천천히 하시고, 나는 그래서 이 일련의 과정에 외부의 인물이 우리 가문을 노리고 저지른 일이거나, 내부의 ‘카룽 로스차일드’가에서 가주의 자리를 탐내며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주! 언사가 지나칩니다!”
불 같이 화를 내던 카룽 로스차일드에게 그의 시종이 다가와 속삭였다.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카룽.
이내 그는 예법에는 어긋났지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저장고에 대한 얘기를 외부에 퍼져나가게 한 점, 우리 원로회와 가주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러나! 나 카룽 로스차일드! 단 한순간도 가주의 자리가 탐나 제살을 깎아 먹는 멍청한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다고 맹세합니다.”
그의 진실 되어 보이는 맹세에도 원로회의 분위기는 시큰둥했다. 윌리엄은 완전히 분위기를 주도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저장고 정보가 퍼져 나간 루트는 대충 알아냈습니다. 카룽경의 말처럼, 난 감히 우리 가문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원로회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떨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그들이 가진바 자본력 때문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각국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각국의 금융계를 꽉 틀어쥐고 있기 때문도 있었다.
방계까지 가지를 뻗어나간다면, 금융계는 물론 제조업, 서비스업 등, 엄청나게 방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그들의 가문이 각국의 국부를 틀어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만약, 외부의 공격이라면··· 우리는 전심전력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미국 시장에서 로스차일드가 무너진다면, 다음은 유럽일겁니다.”
윌리엄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카룽은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저장고 정보 유출 건은 이렇게 조용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것은 윌리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윌리엄의 아들, 이제는 죽은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입을 통해서도 세상에 널리 퍼졌던 정보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가주인 자신에게 ‘약점’이 되고 있으니까.
“대안은 있으십니까?”
카룽의 질문에 윌리엄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 원로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오늘은 머리를 맞대고 감히 우리를 적대하는 세력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상의 해 보시지요.”
회의는 해가 지고도 한참이나 진행되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윌리엄 로스차일드는 ‘돈 내놔’이고, 다른 원로회들은 ‘확실하지 않으니 투자 하지 않겠다.’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싸움이었다.
본래 모기지로 윌리엄 로스차일드가 얻어야 할 수익률은 연간 60퍼센트에 육박했다. 최장 10년을 바라보고 시작한 일이었으나, 미 정부의 주택보급 사업 때문에 모든것이 일그러졌다.
60퍼센트는 커녕, 어쩌면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럴때 지하 저장고라도 있었다면, 돈을 좀 끌어다 썼을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리스크를 나눠가지자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미 기 대출에 들어간 자금도 어마어마 할 텐데요?”
윌리엄이 짧게나마 카룽을 날카롭게 쏘아보다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선,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쉬시지요,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내일 오찬 이후에 다시 진행하기로 할까요?”
원로회도 지쳤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윌리엄의 뜻에 동의를 표했다.
***
미국의 금융계, 부동산은 갑작스러운 정부의 주택보급 사업 때문에 시끄럽고, 대한민국과 일본은 연일 이슈가 터져나오는 천혁수와 고키부리의 행보 때문에 시끄러운 상황.
나는 그저 한가롭게 플로리다 비치의 해변에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물론 선글라스에 가려진 내 눈동자가 책을 향해 있는지, 해변을 거니는 아름다운 여인들을 향해 있는지는 나 밖에 모른다.
쫙!
상의를 벗고 있는 내 몸뚱이에 찰진 손바닥이 떨어져 내렸다.
“앗 따거.”
말 그대로 따가운 손바닥 맛에 고개를 돌리니 루시가 도끼눈을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쭈, 다른데 한눈을 팔아?”
“무슨 소리야 루시, 책 보고 있었다고.”
“무슨 저기 검은색 비키니 입은 여자 보고 있었으면서.”
여자의 감은, 때때로 소름돋도록 정확한 순간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걸렸다고해서 인정해서는 안 되는 일. 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흔들며 말했다.
“오해야, 오해.”
“아주 체력이 남아 돌지?”
“거참, 아니라니까.”
슬쩍 손을 뻗어 루시의 아름다운 허리춤을 끌어당겼다. 흰색 비키니가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루시에게 말했다.
“누가 이렇게 벗고 다니랬어?”
“웃겨, 다른 여자 벗은 모습은 헤벌쭉 웃으면서 구경하더니.”
“뭘 또 헤벌쭉 씩이나.”
“됐고, 체력이 남아도는 것 같으니까 따라와.”
저 멀리 호석에게 수영을 배우고 있는 우희를 쳐다보았지만, 교육삼매경에 빠진 둘은 나와 루시를 아랑곳 하지 않고 있었다.
“우희 수영 가르쳐 준다며?”
“나보다 마스터 정이 더 잘 가르쳐.”
“크음.”
검지 손가락을 까딱 거리며 고양이처럼 요염하게 걸어가는 루시의 뒤태를 감상할 정신도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처럼 그녀를 따라갔다.
요즘 부쩍 기운이 딸리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다시 해변에 나와 뜨겁게 데워진 몸을 미적지근한 바닷물에 식히고는 걸어나왔다.
“오빠!”
멀리서 우희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맥주와 함께 새우튀김을 흔들고 있었다.
얼른 다가가 맥주를 반병이나 비우고 새우튀김을 와작 씹어 먹었다. 껍찔째로 튀긴 것이지만 뻣뻣하다는 느낌없이 바삭하게 잘 씹혀 넘어간다. 고급 리조트의 요리사 답게 제법 훌륭한 솜씨였다.
막 남은 맥주병을 비웠을 때, 호석이 전화기를 건넨다.
“강기태 본부장입니다.”
전화기를 건네 받고 잠시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시가를 입에 물었다.
“네, 본부장님.”
-하하 회장님 휴가는 즐기고 계십니까?
“뭐, 그렇죠.”
-내일이 옵션 행사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행사되기 힘들 수 있습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뉴욕으로 넘어가지 마시고요, 12일날 넘어가세요 뉴욕으로는.”
수화기 너머 피식 웃는 강기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설마 로스차일드씩이나 되는 놈들이 행사일을 미루겠습니까? 하루 수수료가 얼마인데요.
“그렇게 될 겁니다.”
-확신하시는군요.
“뉴욕이 마비 될 겁니다.”
강기태의 당혹성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올뻔 했다.
-예?
보이지 않지만, 몹시 당황한 강기태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어쨌든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12일날 넘어가세요.”
-예, 지시하신 일이니 그대로 수행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마자.
“허니! 빨리 와! 튀김 나 혼자 다 먹는다?”
반쯤 태우다만 고급 미니 시가를 대충 끄고는 서둘러 미녀와 맥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토끼들은 조용한가요?”
맥주를 마시던 호석이 푸훕 하고는 맥주를 뿜어냈다. 내가 말한 토끼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따로 정한 암호거나, 은어가 아니지만 찰떡 같이 알아 듣는다. 로이드 로스차일드를 제거하던 작전명이 ‘래빗 헌팅’이었으니까.
“조용합니다. 나이든 토끼들이 제법 모여서 그런가 아직은 잡음이 없군요, 토끼굴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모르나 보네요.”
“그럴 것으로 추측됩니다.
“내일이 되면 발칵 뒤집히겠군요.”
“우두머리 토끼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죠?”
우희와 루시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던 신경쓰지 않고 저들끼리 작게 소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제법 곱게 빚은 몸뚱이를 자랑하는 백인 놈들 몇이 보였다.
놈들을 슥 훑었는데 별거 없어 보였다.
제법 헬스장에서 웨이트 운동을 한 모양이지만 글쎄, 주변에 아저씨처럼 숨어 있는 우리 대원들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질투심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만약, 우두머리 토끼에게 대표님의 힘이 필요하다면, 대표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호석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두머리 토끼가 약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겠죠? 토끼굴의 식량창고가 털린 상황이거든요.”
“그럼 다른 토끼들이 우두머리 자리를 탐낼 수도 있겠군요.”
난 빤히 호석을 바라보았다.
호석은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론 제가 그 토끼라면, 우두머리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질문이었지만, 두가지 대답을 원하던 내 의중을 정확히 꿰뚫고는 정답 두가지를 말했다.
나도 그를 따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과연, 놈들에게도 대표님같은 충성스런 토끼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자본주의에 찌들어 있는 놈들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부류의 마음가짐이겠죠.”
***
9월 11일 미국 동부 표준시 08시 46분.
리조트의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던 사람들이 충격적인 뉴스가 송출되고 있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맙소사.”
“이런 미친! 지금 저게 뉴욕의 실시간 상황이라고?”
“저, 전화, 전화!”
< 제 16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