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57화 (157/458)

< 제 157화. >

부러진 손가락을 애처롭게 들고있는 고키부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 천혁수.

“현명한 선택이다.”

고키부리는 스륵, 조심히 팔을 내리고는 천혁수의 눈치를 살폈다. 일국의 총리라는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루한 모습이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얘기가 있지. 일단은 살고 보는거야,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순순히 고개만 주억거리는 고키부리. 그에게 이제 반항이라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천혁수가 백철웅에게 말했다.

“수습해, 며칠은 쉬게 둬, 당분간 전 세계 언론이 시끄러울테니까,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더 시끄럽게 불타오르겠지.”

“예, 백부님.”

백철웅이 대원들을 시켜 고키부리를 치우자, 김장원과 이재형이 꾸벅 허리를 접으며 천혁수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겁나게 반갑습니다.”

“처음뵙겠습니다. 이재형이라고 합니다.”

천혁수가 이재형을 바라보았다.

이재형은 떨리는 동공으로 애써 천혁수의 범과 같은 두눈을 피하지 않는다.

“제법 쓸만한 놈이구나. 그래, 이건 그놈의 핏줄이라고.”

“핏줄이 흐른다고 다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렇겠지, 나와 내 손주놈이 다른 것 처럼.”

이재형은 다행히 천혁수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것 같아 속으로 안도했다.

“부디 네놈이 이건의 좋은 것만 닮았으면 좋겠구나.”

감시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천혁수의 이어진 말.

“예, 감수하며 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시가에 집중하는 천혁수.

대충 인사도, 분위기도 적당하다 싶었는지 김장원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란디 어르신.”

말 하라는 듯 조용히 시가를 태우는 천혁수.

“굳이 저런놈헌티, 그 큰돈을 쓸 필요가 있습니까?”

“우진이 놈이 하는일이 못미덥다?”

“아따, 설마하니 지가 그렇겄습니까. 그냥 쪼까, 아까버서 그라지요.”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이 생각하는 일본이란 나라의 가치는 얼마더냐?”

“예?”

“이 일본이라는 나라가 얼마의 가치를 가졌냐고.”

김장원이 구렛나루 근처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마가 적절한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 1조가 넘는 그 돈으로 일본을 살 수 있다면, 살테냐?”

“아따, 그것은 당연히 사부러야죠, 당장 한달치 세금만 꿀꺽해도 본전은 뽑겄는디요.”

“헌데 왜 돈이 아까우냐?”

김장원과 이재형이 크게 놀란 얼굴을 하며 천혁수의 말을 곱씹는다.

지금 천우진과 천혁수는 ‘일본’을 ‘갖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따··· 우리 회장님 그림 그리는 싸이즈 한번 기똥차네요잉.”

천혁수가 어느새 싸늘하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가치는 주인이 정한다. 우진이가 생각할 때 저놈의 가치가 1조는 넘나보지.”

“예, 인자 확실허게 이해했습니다.”

‘후우~’하고 시가연기를 길게 뱉어낸 천혁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돈이 저 놈의 손에 들어갈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김장원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흐흐, 회장님이랑 비슷한 말씀을 허시네요.”

천혁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한다.

“노잣돈으로 1조는 과하지.”

“예, 어르신 그리고 회장님 뜻 잘 알겄습니다.”

***

확실히 며칠 피곤했는지,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제법 오래 잤음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호석의 아침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1층 테라스에 앉았다.

“브런치를 준비해드릴까요?”

“좋죠.”

정호석이 저택 사용인 하나를 불러 뭐라뭐라 얘기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곧, 강기태 본부장이 저택으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호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랑이라도 되는 듯이 검은색 세단이 저택의 입구를 지나는 것이 보였다.

“마침 오네요.”

“보안상의 이유로 ‘잭슨’이란 인물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적절한 조치라고 느껴졌다.

굳이 신뢰가 부족한 일회성 인물에게 정보를 흘릴 필요는 없으니까.

“잘 하셨습니다.”

“회장님이 주무시는 동안 총 6명의 대원들이 더 도착했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겠네요?”

“예, 말씀하신 시간보다 12시간정도 빠르게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한국에게 우호적인 입장이다 보니, 출입국의 관리가 소홀한 편입니다.”

확실히 아직까지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랬다.

세계 초강국, 세계의 수호자라는 자부심 가득한 프라이드가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도 며칠뒤면 말도 안되는 일이 될 테다.

앞으로 미국의 출입국 절차는 제법 까다로워 질테니까 말이다.

물론, 거기서도 한국인은 제법 우대 받겠지만.

브런치와 함께 도착한 강기태.

“아직 식전이셨습니까?”

“예, 방금 일어나셔요.”

“아아, 아직 시차적응이 어려우신 모양이네요.”

자연스럽게 호석의 옆자리에 착석한 강기태.

그가 서류 가방에서 묵직한 서류뭉치를 꺼내들었다.

“됐습니다. 말로 듣죠.”

나는 딱 잘라 서류를 거부했다.

강기태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예, 서류는 많은데 말로는 간단합니다.”

“예, 보고 하세요 보고 듣고 식사하게.”

“잘 되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심플한 보고.

보고 만큼 자신감 넘치는 표정.

저 정도면 모든 보고를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숫자 놀음에서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최고라 자부하는 인물이 뱉은 말이니까.

“좋네요.”

“전제가 붙습니다.”

“뭔데요?”

“집값이 떨어지지 않으면, 백지가 됩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무조건 떨어집니다.”

강기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겠죠, 회장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는 정말 완전하게 100퍼센트를 넘어 200퍼센트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수십조가 공중으로 분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날리면 좀 어떻습니까? 다시 벌면 되지.”

이어진 말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이제는 수십조단위의 돈도 쉽게 벌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과연 몇천만원, 몇 억에 벌벌 떨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쉽게 말씀하시네요?”

“회장님 곁에서 몇년 있다 보니, 돈이 영··· 돈 같지가 않아서요, 그냥 1과 0으로 된 디지털 신호 같달까요?”

“간이 커진 건 마음에 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한국말로 얘기하니까 기분이 다 좋아지네요.”

“자, 드시죠.”

센스 넘치는 정호석은 브런치를 3인분이나 준비했다. 나와 호석, 강기태는 자연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는 에그베네딕트를 썰었다.

짧은 식사가 끝나고 여유있는 티타임이 시작되자 잠시 자리를 벗어났던 정호석이 얇은 서류철을 내게 건넸다.

“저택의 도면과 경비원들의 정보입니다.”

내가 이곳으로 도착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게 뻔했다. 그러니 이렇게 자세한 보고서가 나왔을테다.

“대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나 보네요.”

호석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예.”

“경비가··· 서른? 제법 많네요?”

“아마 저번 포도밭 때와 비슷한 수준의 경비들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들보다 조금 아래수준의 경비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분명 로스차일드 가문의 중요인물로 분류되는 만큼, 제법 괜찮은 개인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닐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우리 대원들을 걱정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대원들의 실력이야말로 익히 잘 알고 있으니까.

실전에서도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투자한 수백억이 전혀 아깝지 않을만큼 말이다.

물론, 아직 그들의 진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다만 그들의 소속인 SKY PMC의 명성은 곧 드높게 치솟을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고위층에는 말이다.

어쩌면 그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 고위층들에게 이름을 날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우리 PMC도 대단한 캐시카우가 되어 줄 것이다. 어쨌든 기업가는 손해보는 투자는 해서는 안되니까 말이다.

“언제라도 놈의 모가지를 딸 수 있다는 얘기처럼 들리네요?”

내 질문에 자신감 가득한 호석이 당찬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가져올까요?”

피식 웃으며 서류철을 덮고는 말했다.

“대원들 다 집결하면 하루 휴식후 바로 진행하죠, 9월이 되기전에 이땅을 떠나는게 좋을테니까.”

“예, 회장님. 세부 작전은 완성되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아! 작전명은 뭘로 정할까요?”

내가 오늘 늦은 아침에 일어난 것에 저놈에 작전명이란 놈도 제법 기여했다고 본다.

어쩐지 ‘멋있는’ 작전명이 나올것이란데 베팅한 대원들을 내기에서 이기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내가 ‘구린’작전명을 내놓을거라 확신하는 호석의 코도 눌러주고 말이다.

“래빗헌팅.”

호석이 ‘호오’하고 잠시 감탄했다.

“오, 이번엔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요?”

“아, 예. 예상과는 달리 좋았습니다.”

“한국말로는 토끼사냥이죠.”

“토끼 사냥이라···”

“어제 보니까 토끼던데요? 3분도 안되는 것 같았는데?”

호석이 마시던 차를 고개를 돌려 뿜었다.

“그래서 토끼사냥인 겁니까?”

“에이, 래빗헌팅이라니까요?”

“크음··· 대원들에게 꼭 작전명과 함께 그 이유도 설명해주겠습니다.”

“예, 지친 대원들이 적어도 한번은 웃을 수 있겠네요.”

나와 호석의 대화가 무엇인지 모를 강기태는 그저 묵묵히 차만 마셨다. 고개를 돌려 그런 강기태를 바라보았다.

“며칠이나 남았죠?”

“내일이면 지시하신 일은 모두 마무리 될 겁니다.”

그동안 미국에서 고생했을 강기태에게 말했다.

“일이 마무리 되는데로 뉴욕을 벗어나세요, 음··· 대충 라스베가스에서 며칠 놀다 오시면 되겠네요.”

“오, 휴가입니까?”

잔뜩 들떠보이는 강기태.

“예, 너무 도박에 빠지지는 마시고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뉴욕에는 9월 11일까지 절대 돌아오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명령이니까, 잊지 마시고요.”

“예, 저승사자가 머리에 총을 들이밀어도 꼭 9월11일까지는 쉬겠습니다.”

“하와이 같은 곳에서 쉬셔도 좋겠네요.”

“오오.”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하와이를 갈까 싶었다. 미국에서의 일이야 대비 할아버지가 알아서 완벽하게 처리하실테니 루시와 함께 하와이 휴향이라니 벌써 설레는 기분이다.

물론, 래빗 헌팅이 끝난 후에 말이다.

***

저택 입구에 도열해있는 40명의 대원들.

그들은 어느새 완전무장을 갖춘 채로 흉흉한 눈을 번들거리며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방심 했는지 안 했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로이드 로스차일드의 모가지를 가져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쉬운일이었다.

사실 원래의 나는 놈을 조금 더 괴롭히다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또 현재의 나는 조금 달랐다.

굳이 보잘것 없는 놈을 위해 허비해야 할 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도, 그리고 우희도. 그 밖에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즐기기에도 시간이란 놈은 턱 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런 별것아닌 놈에게 오랜 시간을 쓰기가 아깝단 생각이었다. 지금의 나의 시간은, 예전의 나의 시간과 천지차이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이런 하찮은 놈에게는 최대한 조금의 시간을 할애해야 함이 옳다 생각했다.

“다치지 말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그만큼 대원들에게 전하는 당부도 짧았다.

자신감 넘치는 대원들의 눈을 보자니 걱정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인 것도 한 몫 보탰다.

얼굴과 몸, 손과 발, 목까지 모두 가렸지만 두 눈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호석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대원들이 보고하면 그때 여기서 출발해도 늦지 않습니다 회장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코 앞이라지만, 그래도 대원들만 보내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지휘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니까. 적어도 그들의 뒷 모습을 최후의 최후까지는 봐줘야 했다.

“아뇨, 입구까지는 가죠.”

호석은 별 수 없다는 듯, 미리 준비해온 복면을 건넸다.

나는 망설임 없이 복면을 뒤집어 쓰고는 말했다.

“출발 합시다. 작전명 ‘래빗헌팅’ 속전속결로 처리하죠.”

대원들은 묵음의 경례를 하고는 차례차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나는 산책을 하듯 천천히 토끼놈이 머무는 토끼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제 157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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