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6화. >
거의 쫓기다시피 한 고키부리.
김장원과 함께하는 SKY PMC의 대원들이 빠르게 보호했다. 달려드는 자민당 중진의원들은 감히 훈련받은 대원들을 넘어갈 수 없었다.
총 3대의 차량이 떠나고, 남은 대원들도 빠르게 움직여 총리관저 앞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놈들은 뭡니까! 고키부리에게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았습니까?”
자민당 중진의원에 말에 고개를 젓는 고키부리의 장인. 그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의아할 따름이었다.
“미친··· 공식적인 자리에서 양심선언이라니요! 대일본제국이 전범국가라니요! 미쳤습니다. 아름아름 조용히 떠들던 히키코모리 같은 놈들이 방구석을 뛰쳐나와 진실이랍시고 나라를 시끄럽게 할 거란 말입니다!”
한 의원의 외침에 모든 의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자민당의 이미지는 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맨틀을 뚫고 지하 깊숙한 곳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단 움직입시다. 어떻게든 고키부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미국으로 자식들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단 가족을 먼저 인질로 잡으시죠.”
“크음, 딸 아이에게 말해 놓겠소.”
“예, 우리는 서둘러 당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잠잘 시간도 없이 대책을 의논해 봅시다.”
***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온몸에 긴장이 풀렸을까? 아니면, 나를 보내기 싫어 앙탈을 부리던 루시 때문이었을까? 괜히 ‘2세’ 얘기를 꺼내서 스태미너를 소모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피곤한 몰골을 하고는 예정된 숙소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헬기를 타고 이동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괜히 소란스럽게 움직였다가 로이드 그 쥐새끼 놈에게 주목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로 약 50분 정도의 거리를 달리면 되니 참아 볼 뿐이었다.
-지이이잉, 철컥.
긴 전자음과 함께 철제 대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차량은 저택의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제법 들어가고 나서야 멈추었다.
“오, 좋네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록펠러 가문의 별장 외관이었다. 리틀 록펠러 저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규모는 다르지만 딱 대비 할아버지와 루시가 살고 있던 그 집과 닮아 있었다.
저택의 외관을 둘러보는 사이, 내게 일제히 경례를 올리는 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
‘충성’, ‘단결’과 같은 경례 구호는 생략한 거수경례.
일부러 주변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경례를 나도 손을 들었다 올리는 것으로 받고는 물었다.
“오, 벌써 많이 모였네요?”
“예, 회장님 현재까지 총원 21명이 집결했습니다.”
“하긴 뭐, 이제 한 이틀 남았죠?”
“정확히 56시간 남았습니다.”
“예, 들어가죠.”
총 4층 구조로 지어진 저택.
나는 3층의 발코니에 앉아 시가와 함께 마시는 맥켈렌 위스키 한잔은 쌓인 피로를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정호석이 쌍안경을 건네며 말했다.
“저쪽에 보이는 저택이 현재 로이드 로스차일드가 머무는 곳입니다.”
고개를 주억거리곤 쌍안경을 들어 올려 영점을 맞추고 저택을 살폈다. ㄷ자 모양의 저택 가운데에 작은 풀장이 있고, 그 풀장에 화려한 조명이 보였다.
“아주 신났네요.”
“예, 오자마자 저러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팔자 좋네.”
이건의 삼남 이재현도 아주 노는데 진심인 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의 망나니 로이드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마침 쌍안경에 로이드 놈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인다. 주변의 여자들이 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헐벗은 여자와 몸을 섞는다.
그러길 몇 분.
“뭐야, 저거 토끼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옆에서 다른 쌍안경을 들고 서 있던 정호석이 ‘풉’하고 웃어버린다.
“쥐 새끼인 줄 알았더니 토끼 새끼였습니다.”
호석의 말에 피식 웃으며 쌍안경을 테이블 위에 대충 내려놓았다.
“뭐, 더 볼 필요 있습니까? 저놈 하는 짓거리가 그렇지.”
“작전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까요?”
“인적도 드물고, 놈의 저택에서 처리하면 깔끔할 것 같네요.”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뉴욕에 오래 있을 일이 없으니 빠르게 처리합시다. 내일은 저놈이 머무는 저택의 정보를 수집하고, 세부 작전은 그다음에 의논하기로 하죠.”
“예, 회장님.”
잔에 남아있던 위스키를 단숨에 비워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를 들어야 할 게 제법 많고, 또 확인해야 할 보고서들이 많지만, 지금은 잠이 우선이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쉬었다 하죠.”
호석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회장님. 편안한 밤 되십시오.”
“네, 대표님도요. 직원들도 최대한 컨디션 유지하라고 해 주세요.”
“예.”
***
일본 도쿄의 한 도로 위.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주변에 날카로운 기세를 쏟아내는 사람들만 있으니, 고키부리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자신의 경호를 맡던 인물들과는 다르게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나는 사내들이었다.
“당신을 보고자 하는 분이 있어, 얌전히 가자고.”
“나, 나를?”
“그래, 당신이 받을 천억엔, 그게 어디서 나왔겠어?”
“그는 한국인입니까?”
“그분.”
이제는 숨길 게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김장원을 빤히 쳐다보는 고키부리. 그는 분명 전날 병실에서 보았던 김장원의 그 서슬 퍼런 눈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총리라는 자존심에 차마 ‘그분’이라는 호칭하기는 싫은 모양.
“일본에서는 공무원들의 하늘은 총리였겠지.”
“그렇소.”
“기업에서는 월급을 주는 사장이 하늘이고.”
“크음.”
“지금 네놈에게 돈을 줄 사람은 뭐겠어?”
“하늘···”
“그러니까 호칭을 제대로 하자고, 언제든 네놈 모가지쯤은 아무렇지 않게 따버릴 수 있는 분이니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잔뜩 붉어진 고키부리의 얼굴.
그러나 정말이지 모가지를 따버릴 것 같은 주변 사내들과 김장원의 눈빛에 이를 깨물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끝내 대답은 하지 않으려 하는 그.
“대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원한다면 그 혓바닥을 잘라 줄 수도 있다.”
김장원의 옆에 앉은 사내의 서슬 퍼런 말.
영어였지만 고키부리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품에서 작은 군용대검을 꺼내는 사내는 삼현의 이남이었던 이재형이었다.
“크음, 알겠소. 호칭에 주의하겠소.”
다시 품에 대검을 넣은 이재형은 눈도 깜짝이지 않고 고키부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왜 그렇게 보시오?”
“내 임무는 네놈을 감시 및 보호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헛짓거리만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너무나도 딱딱한 말투에 고키부리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내들에게 나는 위험한 냄새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옛날 전쟁의 생존자들에게서 나던 냄새와 비슷한 류.
“당신들은 군인인 모양이네요.”
“글쎄, 그게 중요한가?”
“한국군입니까?”
“아니다.”
“음··· 그럼 한국의 정보부?”
“혀가 길면, 명이 짧지.”
“크음.”
고키부리는 단호한 사내들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1분이 1시간 같은 긴 시간을 고키부리는 꾸욱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도쿄 외곽의 부촌에 도착한 차량은 제법 넓은 부지를 소유한 단독 가옥에 멈추어 섰다.
차는 멈췄지만 고키부리가 타고 있는 차량의 문이 열린 것은 몇 분이 지난 뒤였다. 먼저 도착한 다른 차들의 문이 열리고 사내들은 한참이나 주변을 훑어보고 나서야 고키부리가 탑승한 차량의 문을 열었다.
“내려.”
순순히 차에서 내린 고키부리.
이재형과 김장원이 그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이재형, 김장원보다 더 윗줄로 느껴지는 사내가 딱 떨어지는 수트를 입고 고키부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따, 백 대표님 겁나게 반갑네요잉.”
“며칠이나 됐다고.”
“흐흐, 어르신은 오셨습니까?”
“안쪽에 있습니다.”
이재형은 말없이 살짝 목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고키부리도 분위기와 이재형의 모습에 엉겁결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백철웅은 능숙한 일본어로 고키부리에게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통성명은 필요 없을 것 같고, 안쪽으로 갑시다. 기다리시는 분이 있으니.”
“예.”
현관에서 집안 내부 거실로 가는 그 짧은 시간에도 고키부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뭐하는 집단인지 모르지만 한 명 한 명 사람들의 분위기가 대단했다. 꼭 잘 벼려진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수십이나 자유롭게 부리는 사람이라면 필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터.
“백부님, 고키부리 총리가 왔습니다.”
백철웅이 고개 숙여 보고하는 사람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고키부리.
“다, 당신은!”
천혁수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는 저벅저벅 걸어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던 고키부리의 오른손 검지를 쥐고는 능숙한 일본어로 말했다.
“보자마자 삿대질이라니, 예의는 밥 말아 먹었군.”
그러고는 그대로 손가락을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어버리는 천혁수.
빠가각.
“끄으으 끄아아아아!”
바닥에 무릎 꿇고 제 오른손을 꽉 쥐고 있는 고키부리를 내려다보는 천혁수.
“다시 한번, 내게 손가락질한다면 그 잘난 열 개의 손가락은 더 이상 세상에 없을 거야.”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고키부리.
과연 그가 한 나라의 총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과한 감이 있었지만, 이로써 아주 쉽게 누가 우위에 있는 사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약속한 보상은 천억엔이라지?”
“그, 그렇습니다.”
“네놈이 일을 잘해준다면, 그 배도 못 줄 것이 없다.”
사실이냐는 듯 번쩍 눈을 뜨는 고키부리.
“그 돈이라면 다시 시작하는 정치 인생도 제법 화려하겠지? 안 그런가 총리?”
“크음···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뒤돌아서 다시 소파로 걸어가 앉은 천혁수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한다.
“우리가 할 건 딱 하나야, 일본이 바로잡지 않았던 잊혀진 역사를 수면위로 올리고, 그 역사를 일본인들에게 알릴 것. 나아가 전 세계에 일본의 악행을 얘기하고 사죄할 것.”
“그, 그건! 다시는 내게 일본에서 정치를 하지 말라는 통보와 같습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고키부리.
백철웅이 뚜벅뚜벅 그에게 다가가는데 천혁수가 그를 만류한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백철웅.
잔뜩 얼어붙은 고키부리가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정치를 하라며 일본을 흉보라니! 일본의 치부를 끄집어내라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국민이 날 뽑아주겠습니까!”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뢰를 잃은 정치인이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은 정직함을 보여주는 것, 그 외에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미 네놈의 정치 인생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 불씨조차 남지 않았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니 고키부리는 입술을 앙다물 뿐, 뭐라 얘기 할 수 없었다.
“그 남지 않은 불씨를 완전히 치워버리고, 새 장작을 놓아주겠다는 얘기에, 그리고 그 장작 위에 불을 올리는 건 네놈이 할 일이고. 이해되나?”
“······”
“신뢰를 잃은 정치인이 보여주는 정직함, 그것이 네놈의 정치 인생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아마도 바보가 아니라면 단숨에 이해할 테지, 어때? 그런 정직한 미친놈이라면 한번 믿어볼 만 하지 않겠어?”
부정하기 어렵고,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느껴지는 천혁수의 말. 그렇기에 고키부리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돈도 주고, 목숨도 살려줬다. 심지어 네놈의 가족들까지 책임져준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네놈이 할 일은 그저 ‘사실’을 얘기하고 다니는 것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려운 일은 없잖은가?”
“크음···”
아직까지 혼란스러운지 대답이 없는 고키부리.
천혁수가 손가락 2개를 펼치며 말했다.
“네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사실을 얘기하고 다니며 돈과 새 인생의 기회를 얻는다. 둘째, 죽는다.”
너무나도 무표정하게 생과 사를 얘기하는 천혁수의 얼굴에 고키부리는 과연, 언론에서 보던, 보고서에서 보던 대한민국의 정치인 천혁수가 맞나 싶었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정치인들은 두 얼굴, 세 얼굴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미친 살인마의 표정이 이럴까? 오사카 초교에 난입해 어린아이들을 무차별하게 난도질한 그 미친놈의 얼굴이 이럴까.
“간단하잖아, 선택해.”
이어진 천혁수의 말에 고키부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자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꺾여선 안 될 방향으로 꺾인 손가락은 1개뿐이었다.
< 제 15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