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4화. >
아침부터 집 안이 분주했다.
오늘은 이 집 안의 사람들이 바쁜 날이기 때문이었다.
루시와 우희, 대비 할아버지는 미국행 때문에.
우리 할아버지는 사직서 때문에.
그리고 눈 뜨자마자 전화를 받는 나는 김장원 사장의 보고 때문에.
“예, 김 사장님.”
-흐흐, 회장님 아침은 자셨습니까?
“아직 식사 전입니다. 이제 7시가 조금 넘었잖아요?”
-아, 제가 너무 일찍 전화드렸는가 봅니다.
“말씀하세요.”
-예, 어제 새벽에 고키부리 그놈 만나고 왔습니다.
목소리에서부터 김장원 사장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보나 마나 넘어왔다는 소리일 터.
“말씀드렸잖아요? 꼬시지 못했다면, 돈이 부족했던 거라고.”
-흐흐, 예. 세상천지에 꼬시지 못할 놈 없다고 하셨죠잉, 만약 실패했다면 그건 돈이 부족한 거라고. 그려서 확실허게 꼬셔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언젠가 한 번.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느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다.
그때의 난 그렇다고 생각했다.
만약 돈으로 행복을 사지 못했다면, 그건 돈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었다.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지만.
천억엔, 우리나라 돈 1조 3000억은 고키부리 놈에게 충분히 행복을 살 수 있는 돈으로 느껴질 테다. 적어도 희망의 불씨를 키울 수 있는 장작 정도로는 느껴졌을 터.
-이따 오후에는 회장님께서 즐거워하실 기자회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나보다는 할아버지가 더 즐거우시겠죠?”
-그렇습니까? 근디 말입니다. 회장님.
“네.”
-그, 참말로 1조 주실 겁니까?
“정확히는 1조 3천억이죠?”
-예.
“어떨 것 같으세요?”
김장원이 보일 리 없지만, 어쩐지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들어 올리고 있을 김장원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완벽허게 이해혔습니다.
“당장은 아니고, 고키부리놈을 이용해서 세탁기를 좀 돌려볼까 싶네요.”
-아아! 워따 회장님은 진짜 천재인 것 같습니다. 감히 나가 따라갈 수가 없네요잉.
“아침부터 아부는 괜찮습니다.”
-아따, 아부가 아닌디··· 제 배창시라도 갈라서 확인시켜드려야 하나 싶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흐흐, 그라믄 마무리까정 확실허게 해 놓겄습니다.
“예, 앞으로 핸들링은 할아버지가 직접 하실 겁니다.”
-이야, 오랜만에 어르신 현장 복귀하시네요.
“글쎄요? 김 사장님이 기대하시는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산군이 움직이는데 피 냄새가 안 나면, 그것이 더 웃긴 일이지요.
“어쨌든 고생하셨습니다. 더 고생해주시고요.”
-옙! 회장님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고 가장 늦게 식탁 위에 앉게 되었다.
“김장원?”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예, 넘어왔다고 하네요.”
“세계 천지에 그 정도 돈 거부할 놈 없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 식탁 위에는 제법 보이는데요? 거부할 사람?”
할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식탁 위에 놈이 어디 있더냐? 사람만 있지.”
확실히, 고키부리 그놈은 이름부터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바퀴벌레 같은 놈.
“자, 밥 먹자. 오늘은 바쁠 것 같으니까.”
“예.”
***
같은 시각 뉴욕.
SKY인베스트먼트의 투자총괄 강기태와 크로치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잭슨이 뉴욕의 야경을 감상하며 와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봐 캉.”
“왜.”
“그런데 왜 우리 회사 이름이 크로치야? 가랑이 투자회사 뭔가 이상하잖아?”
“불교의 전설 중에 ‘아귀’라는 존재가 있어. 평생을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일종의 몬스터 같은 존재지.”
“아구이?”
“아귀,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번역은 영어로도 되어 있지. ‘crotch’ 그게 아귀야.”
잭슨이 흑인 특유의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흰자위를 더욱 많이 보여주며 ‘와우!’하고 감탄한다.
“미친 듯이 먹겠다는 뜻이군!”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아 뿌듯하군.”
“정말 좋은 이름이야, 크로치 인베스트먼트.”
“푸핫, 아마 우리 보스의 작명센스를 칭찬한 건 잭슨 네가 처음일걸?”
“뭐? 왜? SKY인베스트먼트도 좋은데? 누구보다 정상을 찍을 것만 같은 이름이잖아?”
“푸하하, 우리나라에서는 유치하다는 평가가 많아.”
“오, 맙소사 감각들이 썩었군.”
광역 어그로를 끌어올지도 모를 멘트에 피식 웃은 강기태가 말했다.
“오늘은 적당히 마시자고, 내일부터는 또 바쁠 테니까.”
“쯧, 며칠은 편하다 싶었어.”
“잭슨을 생각해서 분석을 더디게 했다고.”
“퍽이나, 밤마다 네 방에 불이 켜져 있던걸? 도대체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모르겠어.”
“그러는 잭슨 너도 충분히 벌 만큼 벌었는데 열심히 살잖아?”
“노노, 나는 그저 이 일을 즐길 뿐이야! 내가 언제 그 망할 로스차일드 놈들을 엿먹일 수 있겠어? 이런 기회는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제법 언성이 높았기에 강기태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훑는다. 프라이빗 레스토랑이었기에 다행히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입조심 하자고 잭슨.”
“아아, 쏴리.”
“하여튼 분석은 끝났어, 이제 BB 등급까지 매수할 거야.”
“그건 정말 위험부담이 크지 않겠어? 지금도 옵션 유지비로 나가는 돈이 ‘헉’소리가 난다고.”
피식 웃은 강기태가 말했다.
“잊었어? 우리는 아귀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이잖아?”
“와우, 정말 배고픔과 갈증이 끝이 없나 보군!”
“보스가 말하길 천가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더군.”
“천가?”
“우리 보스의 가문 말이야, 보스의 성이 영어로 번역하자면 SKY야.”
“아아! 그래서 SKY인베스트먼트군! 하늘가문이라니 정말 그레이트하잖아?”
“하여간, 이제 로스차일드의 간판을 당당히 달고 있는 은행에서도 옵션을 만들 테니까, 바짝 긴장하라고.”
“오케이.”
잭슨이 다 식은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넣고는 말했다.
“그런데 정말 집값이 떨어지기는 하는 거야?”
피식 웃은 강기태가 말했다.
“그건 하늘이 할 일이지.”
“풉, 제법 중의적인 걸?”
“시인을 했어도 난 꽤 성공했을 거야.”
“우웩, 캉 이제 완전히 미국인이 다 됐군. 자의식 과잉이라고.”
***
같은 시각.
뉴욕의 알짜배기 부자들이 산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 뉴저지주 알파인.
알짜배기 부자들은 도심이 아닌 도심 바깥에 산다는 그 말이 사실이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한 눈에 보아도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줄지어 있는 그곳에 검은색 세단 하나가 빠르게 도로를 가로질러, 웅장한 저택의 대문을 넘는다.
“아오, 갑갑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깨를 털며 저택 내부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로이드 로스차일드.
이곳은 로스차일드가문의 저택 중 하나였다.
미국 전역 주요 도시 인근에는 이렇게 하나씩 저택들이 존재했다. 정확하게는 별장의 느낌이었으나, 그 규모가 남다르니 별장이라 부르기 애매한 느낌이었다.
“안톤!”
“예, 보스.”
“집에만 있었더니 갑갑하다고, 파티 좀 준비해.”
오자마자 벌써 헛짓거리를 생각하는 로이드가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안톤.
그러나 그의 업무는 보스를 모시는 것.
“예, 보스.”
“오늘은 적당히 오르비스에 애들 둘만 보내라고 해.”
오르비스는 VVIP매춘 서비스를 일컬었다.
아주 비밀리에 운영되는 곳이며 제법 상류층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성은 물론 남성까지.
“예 보스. 집무실에 은행들이 올린 보고서를 가져다 두었습니다. 잠시 레이디를 기다리며 확인해 보시죠.”
“쯧, 오늘까지 굳이 일을 해야 해?”
“최대한 가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는 세바스찬 집사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에이씨, 알았어!”
신경질을 부리며 집무실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로이드. 집무실 문을 여니 절로 인상을 찌푸리는 광경이 그를 맞이했다.
4열 종대로 가지런히 쌓여있는 서류 더미들.
“미친.”
보고서를 하나 들어 대충 휙휙 훑어보는 그.
“뭐야 이게?”
이어서 다시 다른 보고서를 살피고, 또 살피고, 또 살폈다. 보고서 하나를 살피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략 2~3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렇게 보고서를 보기도 30분가량.
“안톤!”
“예, 보스.”
언제 집무실로 들어왔는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톤.
로이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보고서를 그대로 쓸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신규옵션 생성 보고서가 왜 이렇게 중복되어 있지?”
“요즘 신규 투자회사가 새로운 옵션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가리에 똥만 찬 회사가 옵션을 만들든 말든! 그까짓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미친 듯한 양의 보고서를 올리냐고!”
“은행의 전문가들이 아무래도 그들의 동향이 의심된다고 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따로 보고드린 모양입니다.”
로이드가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으며 손짓으로 안톤을 부른다.
안톤이 빠르게 로이드의 코앞까지 다가간다.
책상에 남아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로이드.
“신용등급 CC등급자에게 발행한 모기지 대출 수익성에 대한 반대 매매의 일종인 옵션으로, 집값이 떨어졌을 때 수익을 얻어내는··· 주변 은행에서도 계속해서 같은 옵션을 생성하는바, 주의가 필요해 보임.”
“······”
서류를 다 읽은 로이드가 날카롭게 안톤을 쏘아보았다.
“뭘 느꼈어?”
“집값이 떨어지면 위험하다?”
“집값이 언제 떨어지는데?”
“그건···”
“누가 떨어뜨려? 집값을? 로스차일드가? 록펠러가? JB모간이? 골드만글러브가?”
“······”
“돈 놓고 돈 먹는 이 사업에 어떤 미친놈이 찬물을 끼얹냐고!”
“음, 정부라면 가능성 있지 않겠습니까?”
“그 정부 월급 주는 사람들이 누구야? 주급 주는 사람들이 누구야? 누가 벌어다 준 돈으로 목구멍에 와인칠하는데?”
“크음···”
로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딴 보고서 올릴 시간에, 한 명의 고객이라도 더 모객해서 대출이나 발행하라 그래, 알아들었어?”
“예, 보스!”
막 자리를 벗어나려는 안톤을 불러세우는 로이드.
“아, 이 호구 같은 옵션 만드는 놈들 말이야.”
“예.”
“돈은 많아 보인데?”
“예, 저번에 한번 보고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사회재단 쪽 자금···”
“아아, 기억난다. 그 흑인 놈?”
“예, 그렇습니다.”
“옵션 유지비가 상당하겠어?”
“예, 그렇습니다.”
“깎아 줘.”
“예?”
“깎아 주라고, 유지비가 부담되서 못 만들 거 더 만들게 만들란 말이야.”
“아아.”
“뽑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 먹어야지, 마른걸레도 쥐어짜면 돈이 나오는 법이라고.”
안톤이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표정으로 ‘예!’하고는 크게 대답했다. 로이드는 그 모습이 퍽이나 만족스러운지 올라갔던 눈꼬리를 다시 부드럽게 내리며 묻는다.
“애기들은?”
“레이디들은 20분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호오, 그럼 나 먼저 욕조에서 몸 좀 녹이고 있을게.”
“예,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질 좋은 샴페인도 좀 보내고.”
“예, 보스.”
***
직원들에게 수화물을 맡기는 사이, 루시가 불쑥 물어온다.
“우진.”
“응?”
“오늘이 8월 14일 이니까, 정확히 9월 14일까지만 워싱턴에 있으면 되는 거지?”
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가 나와 한 약속을 확인하는 모양.
“응, 꼭 워싱턴일 필요는 없고, 뉴욕만 피해 줘.”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안 알려줄 거야?”
“음, 임신 계획?”
루시가 엉큼하다는 듯 팔꿈치로 툭 내 옆구리를 찌른다.
“피, 마음에도 없는 소리.”
“무슨 말이야? 루시가 졸업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정말이야?”
“응.”
어쭈 하는 표정을 짓는 루시가 손짓으로 루시의 담당 경호원을 부른다.
“미코.”
“네, 아가씨.”
루시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전한다.
“이거 좀 버려줘.”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코, 콘돔입니까?”
“버려, 미코 남자친구한테 선물하던가.”
“네, 네.”
미코란 경호원이 황급히 품에 콘돔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우리 방 말이야 미코.”
“네, 아가씨.”
“제일 끝방, 아주 음습한 곳으로 부탁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미코란 경호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네, 아가씨. 승무원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항상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란걸.
그렇다고 루시가 놈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허니~ 오늘 기대할게~”
“어, 그으래.”
어쩐지 전 삶의 선임이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회장님.”
마침 등장한 호석 덕분에 나는 제법 활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말씀하세요.”
루시가 입술을 빼꼼히 내밀고 우희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휴우.”
“예?”
“아, 말씀하세요.”
“금일부터 천천히, 집결지로 대원이 모일 겁니다.”
“아아, 17일까지 총원 몇 명으로 계획되었죠?”
“43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좋네요.”
정호석이 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작전명은 무엇으로 하달할까요?”
“흐음, 작전명이라···”
정호석의 그 모호한 표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 제 15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