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53화 (153/458)

< 제 153화. >

날 빤히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에게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키부리, 저놈을 이용하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 두 분.

“총리 놈을 이용하자?”

“어떻게?”

“대충 저놈이 내일 할 일이 뭔지는 다들 예상되시죠?”

“도게자를 하거나 할복하거나.”

할아버지의 말에 나도 대비 할아버지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죠,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번엔 대비 할아버지가 대답하신다.

“정치생명이 끝났으니 살길이 없겠지, 아마 자민당 쪽에서도 압박을 넣을 거야, 약점 같은 것을 쥐고 흔들 수도 있겠군.”

역시 연륜을 쌓은 할아버지들은 회전이 빨랐다. 나도 대비 할아버지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정치하는 놈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와 할아버지들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돈.”

“돈이겠지.”

두 분의 대답에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바로 돈이죠, 지금 고키부리가 끝까지 몰린 이유,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돈 때문이겠죠, 받아 처먹은 약점이 있다거나 생계를 위해서거나, 자식새끼들을 위해서거나 어찌 되었든 돈이 필요 할 겁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그럼 네 말은 지금 우리가 고키부리놈의 아가리에 돈을 쑤셔 넣으면서 이용해 먹자는 소리더냐?”

“여태까지 일본의 고위 공무원 출신들이 양심고백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꺼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말을 돌리는구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키부리 저놈의 입을 통해 양심고백 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요?”

대비 할아버지가 ‘호오’하고 감탄하며 말한다.

“여러 가지로 고키부리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겠군.”

“그렇죠, 역사 바로 알기 재단의 일본의 선봉장이 일본의 ‘전 총리’라면 그 파급력은 제법 볼만 할 겁니다.”

할아버지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한다.

“그리고 그 선봉장을 진두지휘하는 것이 이 천혁수고?”

“그렇죠, 어마어마한 관심이 그쪽에 쏠릴 겁니다. 최소한 대한민국과 일본만큼은 뜨겁게 달아오르겠죠.”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림 좋구나.”

“그렇죠?”

“문제는 돈이구나.”

“맞습니다. 돈이죠.”

대비 할아버지가 ‘아아!’ 하며 놀라더니 묻는다.

“혹, 그 골칫덩이들을 쓰려고?”

그제야 할아버지도 아! 하고는 깨닫는 표정.

“예, 현금은 대현에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법 많은 현물을 쥐고 있죠, 계산해 보니 보석류와 금화, 금괴 등만 해도 12조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걸 다 역사 바로 알기라는 일에 쏟아붓겠다는 말이더냐?”

“설마요, 1조나 쓰면 많이 쓴 거죠.”

“그럼?”

“고키부리 놈을 이용해서 세탁기를 돌려볼까 싶습니다.”

할아버지도 대비 할아버지도 만족스럽게 웃는다.

“로스차일드 그놈들의 시선까지 총리 놈에게 돌리겠다?”

“하, 우진 말대로 금상첨화군.”

“좋은 계획 같으니 찬성하마.”

“나도 찬성일세 수.”

나는 웃으며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백철웅과 정호석이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찰리 박 대표 연결해주세요.”

“예, 회장님.”

금방 연결되었는지 바로 전화기를 건네는 호석.

-예, 회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고키부리 총리가 입원해 있는 병실, 면회 됩니까?”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비밀스럽게 접근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호석에게 말했다.

“일본에 있는 대원들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 정보부에서도 관심 있게 고키부리 주목하라고 해 주세요.”

“예, 회장님.”

호석이 잠시 뒤로 물러난 사이, 철웅에게 말했다.

“우리 창고에 있는 현물 중에 당장 현금화 시키기 어려운 놈들 있죠?”

“예.”

“그거 일본으로 비밀스럽게 옮길 방법 좀 강구해주세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통째로 옮깁니까?”

“일단은 큰 거 1장 정도만 가죠.”

“예, 회장님.”

철웅과 호석이 물러나고.

“나머지는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애초부터 알아서 했어도 됐다.”

할아버지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쪽으로는 오히려 나보다 더 도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잠시겠지만, 할아버지는 정치인 딱지를 벗어 던질 테다.

그 별것 아닌 허례가 사라진다면, 아마 할아버지는 날아 다니실 테다.

아직은 공식적인 일보다 비공식적인 일에 더 의욕을 불태우는 분이니까.

“그럼 대비 할아버지 우리는 예정대로 미국으로 가면 될 것 같네요.”

“그래, 알았다.”

***

늦은 밤.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끈 떨어진 고키부리의 병실.

자민당에서 마음껏 즐기라고 여자와 술 테이블을 깔아두었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미친놈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쏟아낼 만큼 병신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나라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은 어느 정도 능력은 있던 사람이라는 방증이리라.

“하···”

그의 눈에 달빛을 반사하는 소도가 들어온다.

“미친놈들.”

겉으로는 선진국인 척.

겉으로는 친절한 척.

그 어느 나라보다 우월하고 우월한 모습을 즐기는 그런 조국에 혐오가 생겨버렸다. 미치도록 야만적인 전통을 강요하다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할복이란 말인가? 그것도 전국에 생중계될 카메라 앞에서, 어쩌면 세계에 보도될 가능성이 큰 카메라 앞에서 말이다.

드르르륵.

열릴 일 없어야 할 문이 열리자 고키부리의 날카로운 음성이 쏟아졌다.

“다 필요 없으니 나가.”

드르르륵.

저벅저벅.

문이 닫히는 소리와 걷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고키부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흠칫 놀랐다.

“다, 당에서 보냈더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검은 복면에 온몸에 검은 천을 감아 놓은 놈들은 딱 봐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왔다고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고키부리는 저도 모르게 창가에 놓여있던 소도를 얼른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극우파에서 보낸 놈들이더냐!”

고키부리가 총을 들던, 칼을 들든 개의치 않겠다는 모습으로 그의 침대 옆 간이 의자에 털썩 앉은 복면인.

“거 노인네 기운도 좋네.”

낯선 언어에 화들짝 놀라지만, 이내 그 언어가 ‘한국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고키부리.

“조, 조센징?”

한국말을 뱉었던 복면인의 눈이 작게 찌푸려지며 고키부리에게 익숙한 일본어가 흘러나온다.

“조센징은 지랄하고 있네, 대한민국이 독립한 지가 언제인데?”

“크음···”

당장에라도 반박하고 싶지만, 감히 자신을 해칠 수 있을 것 같은 자에게 대들지 못한 고키부리.

“됐고, 제안이나 하러 왔어 총리.”

“제, 제안?”

“살고 싶지 않나? 듣자 하니 내일 하야 선언을 할 것 같던데.”

“다, 당신이 날 살려줄 수 있나?”

“미국에 간 당신 아이들, 지금 뉴욕의 호텔에 머무르고 있더군.”

고키부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이들이 부모도 없이, 땡전 한 푼 없는 모양이야.”

고키부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복면인이 내민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모, 모시모시.”

-아빠? 아빠야?

“하나코? 하나코냐?”

-응, 아빠··· 이분들 아빠가 보낸 사람들 맞아?

“어, 그, 그럼··· 그 분들이 잘 해 주고 있지?”

-응, 룸도 업그레이드 시켜주셨어, 둘이 자기 좁다고.

“그래, 그분들 말 잘 듣고 있어, 아빠도 금방 갈테니까.”

-응!

다시 복면인에게 전화기를 건네고, 어느새 차분한 모습으로 말하는 고키부리.

“원하는 게 뭡니까?”

이제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앞에 한국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식들까지 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얌전히 하야 선언만 할 건 아닐 거 아냐? 뭐 할복이라도 할 계획인가?”

“크음··· 당의 뜻은 그렇소.”

“하여간 또라이 새끼들··· 뭐, 됐고. 내일 기자들 앞에서 양심고백 좀 하자고.”

“양심고백?”

“그래,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 일본이 사과해야 마땅한 일이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거짓된 역사가 적혀 있다고 양심고백 하자 이 말이야.”

“미, 미친.”

고키부리는 눈앞에 사내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내일 나는 반드시 죽을 거요! 내 자식들도 다시는 일본 땅에 발을 디딜 수 없겠지.”

복면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지, 네 양심고백이 성공적으로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너는 일본 최초 양심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테니까.”

“세계적으로 칭송받을지 몰라도 적어도 일본 내에서는 아니오!”

“아따 썩을, 이 새끼 영, 감이 읎네.”

“이, 일본말로 하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담배를 무는 복면인.

“자민당에서 돈 처먹은 놈이 어디 한둘이야? 너만 해 먹었냐? 너만 비리 저질렀어? 너만 역사 왜곡했냐? 너만 독도가 다케시마라고 우겼어? 응? 아니잖아?”

대충 이해했다는 듯 고키부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들만 자신의 약점을 아는 것이 아니었다. 고키부리도 그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장인도, 그리고 자민당의 중진들도 그 점을 무섭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굳이 와이프와 자식들을 인질로 잡으면서 할복 따위를 강요했을지도 모를 일.

“어차피 너도 끈 다 떨어지고 자살이나 종용받는 신세 아니냐, 더 갈 데가 없잖아? 아니야? 그럼 그냥 자민당에 충성하면서 뒤질래?”

“크음···”

“그 개죽음 당하면 남은 네 자식은? 네 와이프는?”

“장인어른이 보살펴 줄 거요.”

복면인이 코웃음 치며 말을 잇는다.

“갑자기 믿는다고? 이미 너를 버렸는데 그놈들이 퍽이나 남은 네 가족 보호해주겠다?”

“장인어른과는 피가 통한 사이 아닙니까!”

“야이! 뭔 총리라는 새끼가 이렇게 모자라?”

“······”

“네가 아는 네놈 장인 그 늙은 귀신놈이 그럴 놈으로 보이냐?”

고키부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장인이 그럴 위인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희망이 없으니 믿어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돈 줄게.”

“돈?”

“천억엔.”

고키부리가 입을 떡 벌렸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양심고백을 하면 천억엔을 주겠다는 말입니까?”

“어, 맞아. 천억엔, 양심고백 한 번에 천억엔이면 남는 장사 아냐?”

천억엔.

그것이 현금으로 자신의 품에 들어온다면 어쩌면 일말의 재기의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굳이 자민당이 아니라, 자민당의 반대편에 서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정치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럼 그냥 뒤지시던가.”

복면인이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더니 출입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고키부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이제 좀, 관심이 생겨?”

고개를 끄덕이는 고키부리가 말을 이었다.

“양심선언을 시작하자마자, 당장 중지시키려는 놈들이 나타날 게 뻔합니다.”

“아따, 그것은 걱정을 말어.”

“일본말로 부탁합니다.”

“크음, 그건 걱정을 마.”

복면인이 탁탁, 두 번 손뼉을 치니 병실 입구가 열리며 같은 복장을 한 사내 여럿이 병실 내부로 들어온다.

“이런 친구들이 네 놈의 신변을 보장해준다.”

고키부리가 욕심이 그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돈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복면인이 툭, 통장 하나를 고키부리의 사타구니 쪽에 던졌다. 고키부리가 얼른 통장을 확인한다.

“10억엔?”

“계약금.”

“고, 고작 1프로가 계약금입니까?”

“그리고 네 놈 자식새끼들 목숨.”

“아!”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자각한 고키부리.

“천억엔 적은 돈 아니지 않나?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것 같은데, 총리씩이나 되셔가지고 배가 불렀나 적어 보여?”

“······”

“잘 생각해~ 네가 내일 할복하는 순간, 네 자식들 배도 그렇게 갈라지는 거야. 양심고백, 그게 어렵나?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말이야.”

고키부리가 말이 없자, 고갯짓으로 명령하는 복면인. 그러자 다른 복면인 하나가 성큼성큼 고키부리에게 다가가 던졌던 통장을 다시 회수하려 손을 뻗는다.

꽈악.

고키부리가 그 통장을 빼앗기지 안으려 꽉 쥐고는 말한다.

“하겠습니다.”

“잉, 인자 쪼까 말이 통헌다. 진즉에 그랬으야지, 하여간 쪽빠리 쉐키들 간사혀가지고 겁나게 재부러요, 썩을거.”

“일본말로 해주십시오.”

“조또 조온나게 시간끌어 데스네.”

“예?”

“내일 데릴러온다고 아침에.”

“하이!”

< 제 15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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