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2화. >
정신을 차린 건 진즉 이었지만, 고키부리는 차마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얼굴이 있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 나라 총리였던 그.
그렇기에 도쿄국립병원 특실에 멍하니 누워 TV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연일 고키부리 총리의 탄핵 시위가 펼쳐지고 있는데요, 정치인이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이것은 분명 우리 일본의 이미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죠, 저 시위대 행렬 보세요, 야스쿠니 신사를 시작으로 아사쿠사 신사, 그리고 천왕궁을 지나 총리관저에 이르기까지 제1당 자민당 자체에서도 고키부리 총리를 탈당 시키고 탄핵 소추안을 발의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라고 합니다.
“칙쇼···”
이제는 리모컨을 던질 힘도 남아있지 않은 그.
“여보··· 아이들은 먼저 미국으로 보냈어요.”
그의 아내의 말에 작게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일 고키부리의 사택 앞에 극우파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으니 두려움으로 하루하루가 피가 말라갈 지경이었다.
“잘했어.”
“동창에게 듣기로는 곧, 수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하던데··· 우리 돈은 있나요?”
“수, 수사?”
당황스러운 표정의 고키부리를 빤히 바라보던 아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당신의 하야 선언을 바라는 거겠죠, 물론 그런다고 해도 수사는 멈추지 않을지 몰라요.”
“제기랄!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소린가?”
“여기서 가만히 누워 있지 말고 뭐라도 하란 말이에요!”
빼액 소리를 지르는 아내.
고키부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흘긴다.
당장이라도 쏘아붙이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유일한 그의 편은 현재 아내가 전부였으니까.
“장인어른께서는 뭐라셔?”
“당신을 돕다가 가문까지 무너지게 생겼다고 전화도 받지 않으세요.”
“크음···”
둘이 침묵에 잠겨있을 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내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여보세요.”
-엄마, 돈을 찾을 수 없대.
“뭐? 그게 무슨 말이니?”
-계좌가 동결되었데!
“뭐어? 이, 일단 예약해둔 숙소에서 기다려, 알아보고 전화할게.”
-응.
전화를 끊은 고키부리의 아내가 말한다.
“벌써 수사가 시작되었나 봐요, 계좌가 동결되었어요. 이제 우리는 한 푼도 없다고요!”
때마침 병실의 문이 열리고, 고키부리가 침대에서 등을 때고는 벌떡 일어난다.
“장인어른!”
병실로 들어오는 인물은 고키부리의 장인과 자민당의 중진들이었다.
“아오이는 잠시 나가 있거라.”
“네, 아버지.”
고키부리의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고, 거의 둘러싸듯 고키부리 주변을 가득 채운 노인들. 그들의 면면을 살피던 고키부리는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차디찬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들의 차가운 눈을 보았다면 알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이 끝났음을.
장인이 품에서 고급스러운 소도를 꺼낸다.
“총리실에서 가져왔네.”
무슨 의미냐는 듯 장인을 바라보는 고키부리.
“하야 선언 하면서 할복해, 그래야 자네 자식들이 살아.”
“할복··· 할복을 하란 말입니까!”
장인의 매서운 손이 고키부리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쫙!
“그러니 조용히 총리의 자리에서 당의 중진들과 협의를 통해 의견을 냈어야지, 홀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되었겠는가? 자네 때문에 우리 당이 흔들려! 대일본제국의 미래가 흔들린다는 얘기야!”
고키부리가 날카롭게 중진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들도 나와 같은 뜻 아니었나? 혐한으로 물꼬를 트자고 했던 것에 당신들도 동의 했잖아!”
“총리 당신이 언론을 통제하겠다 호언장담하지 않았소!”
고키부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터넷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몰라!”
장인이 싸늘하게 고키부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처신을 잘했어야지.”
고키부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뭐라 얘기해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제 놈들 살자고 지금 고키부리 본인에게 죽으라 강요하는 것이었다. 대일본제국을 위해서라는 개떡 같은 명분을 들이밀며 제 목숨을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평소 입버릇처럼 고키부리 스스로가 하던 말과 일맥상통하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의중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이 초라한 병실에서 대일본제국의 수치스러운 총리가 자살하기를 바라지 않네.”
고키부리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다.
“하···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 당하는 것이겠죠.”
“그거나 그거나, 세상은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겠지. 마지막까지 초라하게 가느니,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명예를 지키며 가시게, 자네가 할복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마지막 명예 만큼은 지킬 수 있을테니.”
“그런다고 다시 자민당이 권력을 쥘 수 있으리라 봅니까?”
“권력이란 다 한 때지, 지금은 잠시 바람이 저쪽으로 불고 있을 뿐이야. 그 바람은 언제고 다시 우리 쪽으로 불 수 있어, 그리고 그때 우리는 다시 제 자리를 찾으면 되는 게야.”
“······”
고키부리의 장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두들기며 말했다.
“아이들을 생각해야지, 더 이상 자네에게 이곳에서 미래는 없네, 자네는 반드시 죽어. 대일본제국의 신민들이 그것을 바라고 있어! 명예롭게 죽게. 내일 오후 4시 총리관저 앞에 기자들을 모아주지, 그곳에서 끝내게 진실한 사죄의 마음을 신민들에게 보여줘.”
“······”
“그러면, 네 아이들은 살아.”
“정녕··· 그 방법밖에 없습니까?”
감정이 없어 보이는 장인의 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고키부리는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밤은 자네가 좋아하는 짓거리라도 실컷 하게 해주지, 그게 우리가 주는 마지막 자비라네.”
병실로 들어오는 커다란 식탁과 그 식탁 위에 음식과 술을 가지런히 올리고 있는 아리따운 여인들.
그것을 끝으로 중진들과 장인이 병실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특실 근처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
나와 루시, 대비할아버지와 우희까지 미국행이 확정되었고, 루시와 우희는 미국에 어울리는 옷을 산다며 쇼핑을 떠났다. 우리 할아버지는 잔뜩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TV를 보고 계셨고, 대비 할아버지는 실실 웃으면서 우리 할아버지를 약 올리고 계셨다.
“쯧쯧, 그러니 나랏일을 뭐 하러 했어?”
“저놈이 이리 부릴 줄 알았으면 안 했지.”
“부리긴 무슨, 자네도 천직처럼 생각하는 것 같던데?”
“크음, 일이라는 게 그렇잖은가? 우리 나이쯤 되면 일을 시켜주면 고마운 거라고.”
“그건 또 맞지.”
피식 웃으며 할아버지와 대비 할아버지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며 물었다.
“할아버지도 미국 가고 싶으세요?”
할아버지 대신 대비 할아버지가 말한다.
“손녀들이랑 어울리고 싶은 거지, 우리 나이 내일을 장담하기 어렵지 않으냐?”
내가 알기론 대비 할아버지는 99세, 우리 할아버지는 최소 103세까지는 끄떡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대비 할아버지는 내심 마음속에 불안함이 있는 모양이다. 언제 갈지 모른다는.
두 분 처럼 나이를 먹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두 분의 심정을 이해할까.
“그럼 장관 자리 내려놓으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날 빤히 쳐다본다.
“이놈, 진심이구나.”
“예, 복지부장관으로 가져올 이미지 다 가져왔잖아요? 허례허식만 가득하던 정책들 다 때려 부수고 적절하게 채워놓았으니, 뭐라 할 국민들은 없을 겁니다. 획기적인 정책 가령, 우유 정책 등으로 이미지도 좋게 만드셨고요.”
“내려와도 되는 자리였더냐?”
“어차피 대선 시즌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비실비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시며 말한다.
“흠흠, 명분이 있어야 할 텐데···”
마침 뉴스에서 고키부리 총리에 대한 소식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익일 오후 4시, 고키부리 총리의 기자회견이 예정되······
“저거 하시면 되겠네요.”
“으음?”
“역사 바로 알기, 제대로 하시면 되죠.”
할아버지가 팍 인상을 찌푸렸다.
“몹시 피곤할 것 같구나.”
대비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음, 저 바귀벌레 같은 놈이 자리에서 내려오는 모양이군, 다음 총리는 어떤 놈이 되려나.”
금융업계에 투신한 사람다운 얘기였다.
“대충 도게자 하거나, 할복하면서 하야하겠죠. 그게 일본 스타일이니까.”
할아버지 두 분이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지 뭐 익숙한 일 처리가 아니더냐? 재벌놈들이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 휠체어 타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뻔한 일이지.”
“크큭, 한국도 일본도 참 신기해, 매번 뻔한 짓거리를 하는데 그게 의외로 잘 통해.”
“음? 대비, 자네 위험한 얘기를 하는구만. 한국과 일본을 어설피 비교하면 큰일 나네, 바깥에서는 그러지 마시게.”
“음? 그런가?”
“그래, 득달같이 달려들 한국인들이 많아.”
“파하하, 어차피 쑤가 다 막아줄게 아닌가?”
“그것도 맞지 하하하하.”
장관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말씀드렸다고, 벌써 할아버지의 기분이 풀려 있었다.
“그나저나 대선에서는 어느 당으로 나가실 생각이세요?”
“생각해보지 않았다.”
“정말 이 나라 대통령이 쑤가 되는 것인가?”
어쩐지 몹시 부럽다는 눈으로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는 대비 할아버지.
“대비 할아버지 부러우세요?”
“크음··· 아니라고는 못하겠구나.”
“미국 대통령 만들어 드려요?”
내 말에 귀여운 손자의 재롱을 본다는 듯 크게 웃는 대비 할아버지.
“파하하하하, 말이라도 즐겁구나 우진. 그러나 나는 너무 늙었어 미국 놈들은 의외로 정렬적인 것을 좋아하지, 나는 당선되기 힘들어. 이제 와서 정치 입문하는 것도 모양새가 그렇고.”
확실히 한국과는 조금 다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는 미국. 마음 같아서는 대비 할아버지가 미국의 꼭대기에 앉으면 좋으련만, 역시 할아버지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대통령을 쉽게 주무를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마. 그래도 내 친우가, 사돈이 대통령이라면 제법 어깨는 피고 다닐 수 있겠군.”
자연스럽게 나와 대비할아버지의 시선은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아가고. 할아버지는 나름 고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관 자리를 박차고 나올 그럴듯한 명분이 보이지 않는구나.”
“역사 바로 알기 운동이 약해요?”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약하지, 대선이 코앞이라고 해도, 아직도 1년이나 남았다. 한 분기면 잊어버리는 게 한국인들이야.”
확실히 역사 바로 알기 재단에서의 활동은 분기별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아!”
문득 머릿속에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만족할 만한 명분도 채우고. 골치덩어리도 치우고, 뭣 같은 것들과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것들을 싸움 붙일 수 있는 좋은 계획.
거기에 효도까지 플러스.
아주 금상첨화란 생각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제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와 대비할아버지가 흠칫하며 날 바라보신다.
“쑤··· 어쩐지 들으면 안 될 것 같군.”
“동감이네, 어쩐지 무척 바쁠 것 같군.”
< 제 15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