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0화. >
미국으로 며칠 뒤에 돌아갈지는 미정이지만, 오늘 일정만큼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바로 휴식이다.
미국에서 이건에 대한 일을 시작으로 벌써 근 한 달째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하루 이틀의 휴식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했다.
내 왼팔을 베고 누워 있던 루시가 작게 날 불렀다.
“우진.”
“응?”
“며칠 쉬어, 힘들어 보여.”
“그래 보였어?”
“응, 이제 아가쉬도 괜찮아 졌으니까 허니도 며칠은 쉬어, 오늘도 제대로 못 잤잖아?”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정도는 쉬려고 했어, 나흘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자.”
“잘 생각했어.”
루시의 따뜻한 체온에 절로 눈이 감겨 온다. 고작 오후 5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지만 저녁은 거르고 잠이나 자볼까 싶었다.
루시는 새벽부터 점심도 거르고 자다 깼기 때문인지 심심했을까? 자꾸만 내 가슴과 옆구리 부분을 쓰다듬는다.
“쉬라더니.”
내 투정에 루시가 ‘풉’하고 웃어버린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모양이다.
쉬란다고 진짜 쉬었냐는 욕을 먹을 순 없으니, 나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얼른 덮쳤다.
제법 긴 훈풍이 지나가고, 격하게 움직였더니 허기가 밀려온다. 샤워로 흘렸던 땀을 날려버리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잠시 기절하듯 누워있던 루시가 부스스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는 욕실로 향했다.
“저녁 먹자 루시.”
욕실 안에서 어색한 발음의 한국어가 들려온다.
“뉘에~”
저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였다.
피식 웃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새 우희도 일어났는지 멀쩡한 모습으로 거실에서 할아버지들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대부분 여행하면서 경험한 색다른 것들에 대한 설파였다.
우리 할아버지도, 대비 할아버지도 옆에서 애교를 부리는 손녀를 바라보듯 따뜻한 눈으로 적절한 리액션을 해주며 우희의 자랑 아닌 자랑을 듣고 있었다.
여행했으면 수십 번을 더 했을 것이고, 외국을 경험했으면 수십 번을 경험하셨을 두 분에게는 자신이 보고 온 것을 자랑하는 어린 손녀가 마냥 귀여워 보이는 모양.
나는 풀썩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우희야?”
“저녁은 참소라 된장국! 참소라 삼합! 그런데 할아버지가 메인은 여수 돌갓김치라고 하셨어.”
“오~! 아산댁 아주머니 갓김치 장난 아니지.”
할아버지가 흡족하게 웃으며 말한다.
“제철은 맞은 소라에 잘 삶은 수육 한 점 올리고 그 위에 갓김치 한 점 올리면 술이 그냥 쭉쭉 들어가지.”
대비 할아버지는 한국말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눈을 크게 뜨고 군침을 다시는 우희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묻는다.
“술 안주 얘기하는건가 수?”
“아아, 그래 아마 자네가 좋아하는 곤드레 막걸리와 잘 어울릴걸세.”
“호오.”
“갓 김치라고 외국인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김치도 나올거야, 알맞게 익었을테니 지금이 딱 먹기 좋은 계절이지.”
“기대되는구만, 저번에 홍어? 그것도 아주 좋았었네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지.”
갑자기 시작된 두분의 음식 토크에 집중하는 우희, 아마도 영어를 배우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테다. 아직까지 나와 할아버지에게 이렇다 할 부탁 한 번 하지 않고, 예쁘게도 나와 할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마냥 좋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루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멀리서 날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당으로 나가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무슨일 있어요 삼촌?”
호석이 스윽 다가와 시가를 건넸다.
“낮에 말씀하셨던 그 뉴스는 전파를 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연기를 두어 번 뱉어내고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대현쪽에서 라인을 세웠습니다. 석간 신문에 보도자료를 뿌렸고요.”
“아아, 그쪽이 먼저 움직였네요.”
“정확히는 우리가 움직이니 맞춰서 대응한 것 같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해처럼 정상영 회장도 저물어 가는 해지만, 아직은 노장의 노련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과연, 그도 대현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미안하게도 나는 대현이 이렇게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였다. 사실 진즉부터 대현은 라인을 세웠어야 옳았다. 오히려 내가 한국에 없으니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대현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어째서냐는 듯 날 바라보는 호석.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 법이죠.”
“우물이라··· 돈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대현은 돈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내 유보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리콜’과 생산라인 중단은 그들에게 부담될 테니까요.”
“전화가 온다면 뭐라고 전할까요?”
“이틀은 휴가라고 해주세요.”
정호석이 피식 웃었다.
“이틀동안 속 좀 썩겠군요.”
“그거야 그쪽 사정이죠. 차승호 사장에게 보고서 들어왔나요?”
“예, 쉬시는 동안 도착했습니다.”
시가를 태우며 차승호가 보낸 서류를 한참 읽어내려갔다.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많이도 해먹었네요?”
“전부 몰수 했습니다.”
저번 대양실업이 쏘아 올린 공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SKY자동차 내부의 썩은 물을 완전히 도려내는 과정이었다.
제법 많은 임직원이 ‘리베이트’라는 썩어빠진 문화에 길들어 있는 상황, 현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문제고,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날까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일들이었다.
“관련된 자들 사돈에 팔촌까지, SKY에 발을 디딜 수 없게 하세요.”
호석이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대답했다.
“예, 회장님. 정보부에 따로 체크 해 놓으라 하겠습니다.”
“과한 처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튼튼한 회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러면 됐습니다. 법적인 절차가 가능하다면 징역도 보내세요 솜방망이를 휘두르면 재범만 늘어날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파트너 기업들은 품질을 최우선 해야 하고, 공평하게 경쟁해야 합니다. 그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에요.”
나는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는 사람이라서, 몇 푼의 리베이트 때문에 협력사들을 결정하게 된다면, 조금씩 조금씩 우리 SKY의 제품들의 품질을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곧 경쟁에서 도태되게 될 테고, 그때와 바꾸는 것은 늦는다.
a부터 z까지 모든 제품을 SKY가 자체생산 할 수는 없다. 규모도, 자본도 너무나도 손해를 보는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핵심만 SKY가 틀어쥐고 있으면 되었다. 나머지는 제대로 된 협력사를 키워주어야 함이 옳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 SKY가 성장하는 데 있어 더욱 큰 도움을 줄 것이고 SKY가 흔들렸을 때, 국가의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를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삼현이 SKY에 흡수하기 전, 대현과 삼현, 타타다우가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생각했던 국민이 많았다. 그리고 그 국민은 두려움에 ‘재벌’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했다.
재벌이 망한다고 기업이 망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재벌과 기업을 동일선상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굳이 얻을 수 있는 힘을 뿌리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천가가 망하면, 천우진이 망하면 SKY가 망하고, SKY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굳이, 바꿔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SKY의 영향력은 나날이 이땅 위에 퍼져 나갈 테니까.
“허니~ 밥 먹어~”
루시의 부름에 시가를 비벼끄고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참소라 숙회 삼합이라니, 벌써부터 군침이 도는 조합이었다.
***
로이드 로스차일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 멍청한 놈! 네놈 때문에 우리가 입은 피해가 얼만 줄이나 알아! 가주의 자리도 위험해졌어!”
윌리엄 로스차일드의 호통에 대꾸할 마땅한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가 잘못한 것이 분명했다. 결코 발설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발설했으니 그 가벼운 입은 욕을 먹어 마땅했다.
“죄송합니다···”
“입이 가벼워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잖으냐! 입이 가벼운 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수십, 수백번을 얘기했건만.”
같은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던 로이드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처음 로이드가 윌리엄의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그때 막 불을 붙였던 시가가 이제는 뿌리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시가 보관함에 들어있는 다른 시가의 굵기와 길이를 봤을 때, 로이드는 최소한 2시간은 부동자세로 서서 욕을 들어먹고 있었을테다.
결국, 윌리엄의 개인비서 역할을 수행하는 집사 세바스찬이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며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가주님, 이제 도련님도 충분히 알아듣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잘못은 이번을 계기로 반드시 고치도록 앞으로 지켜보시는 것은 옳은 일이나, 현재 훈계로 계속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옳지 않은일이라 보여집니다.”
“크음, 세바스찬. 자네 눈에는 로이드가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아 보이나?”
“예, 가주님. 이제 해결책에 대한 의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로이드가 곁눈질로 세바스찬에게 감사를 표한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가연기를 뱉어낸 윌리엄이 물었다.
“로이 네게 저장고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인물들은 누구야?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로이드.
윌리엄은 로이드가 편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말 없이 시가만 태우고 있었다. 로이드가 고개를 돌리고 세바스찬에게 묻는다.
“집사님, 작년 자선파티 참석자 명단 찾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한 번 언급했던게 전부입니다.”
윌리엄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자리에서 그 얘기를 흘렸어?”
“참석자는 많았지만, 제가 술에 취해 얘기를 했을때는 제 주위에 다섯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셋은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 둘이 헛갈립니다··· 그러니 명단을 보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이 세바스찬에게 말했다.
“명단 가져오고, 로이가 지목한 다섯 신상정보 가져와, 조사는 내가 직접할테니.”
“예, 가주님.”
막 나가려던 로이드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돌아선다.
“아! 아버지.”
“왜?”
“다섯이 아니라 여섯입니다.”
“또 늘었어?”
“그게 아니라, 테드 존스도 포함시켜야죠? 이제는 우리 사람이 아니잖아요?”
“음? 그러고 보니 테드가 보이지 않는구나?”
“배신했습니다.”
윌리엄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 놈은 멍청한 놈이 아닌데?”
“제가 시켰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윌리엄은 굳이 로이드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다.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력을 산다.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테드 존스가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로스차일드에 그런 인물들은 차고 넘쳤으니까.
“알았다. 테드는 바로 조사해보마.”
“예.”
***
저녁식사로 시작된 자리가 어느새 술자리로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 두 분이 술을 좋아해서도 그렇지만, 안주가 워낙 훌륭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우희와 루시의 식욕도 대단한 편이었다.
한참을 즐기는데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온 호석이 내게 조용히 다가왔다.
“회장님.”
나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말씀하세요.”
“대현 정상영 회장입니다.”
내게 전화를 건네는 호석.
며칠 뒤에나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로 유명한 대현 일가의 사람답게 성격이 급한 모양.
“전화받았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천 회장.
“예, 오랜만이네요.”
-천 회장도 사족을 붙이는 것을 싫어할테니, 본론만 하겠소.
“그러시죠.”
-알겠지만, 돈이 필요합니다.
“대현이요?”
-하하, 천 회장이 만들어 놓은 판 아니오? 이제와 모른척 하기있습니까?
노인네.
빠꾸가 없이 훅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돈이라···”
-대한금고에서 대출을 내주도록 허가해주시오.
“위험한 말씀을 하시네요? 대한금고 경영에는 나와 관련 없습니다. 지분만 소유했을 뿐.”
-파하!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닐테지요?
“어쨌든 대한금고는 대현에게 돈을 빌려주기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정상영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길게 찢어진다.
-원하는게 있습니까? 천 회장.
“글쎄요.”
-천 회장이 원한다면 대현을 삼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그리 하지 않는 이유는 불필요해서가 아닙니까?
그의 말은 맞는 말이다.
내가 삼현을 삼킬 때, 대한민국 대부분의 재벌가들이 가진돈을 끌어모아 자신들의 지분을 더 확보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보였었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이다. SKY가 가진 어마어마한 자본력이 말이다.
그들이 열심히 방어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기업들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그럴필요가 없기에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오만하다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내것’이다.
그리고 그걸 정상영도 알고 있었다.
-이 노인네가 사정하겠습니다 천 회장. 도와주시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그래야죠··· 당장 내놓으란 얘기는 아니겠죠?”
-염치가 있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럼 이틀뒤에 식사나 하시죠 인천쪽에서”
-좋은 곳으로 예약하겠습니다.
“세탁기는 있죠?”
-으음?
“깨끗하게 세탁해서 쓰셔야 할 겁니다. 담보는 정상영 회장님의 지분으로 받겠습니다.”
-크음···
정상영이 본능적으로 어떤 위험을 느낀 모양이다.
“이자는 안 받죠.”
-정말입니까?
“그 정도 서비스는 해드려야죠, 세탁기까지 직접 돌리셔야 되는데.”
-그런조건이라면··· 알겠습니다.
전화를 다시 호석에게 건네며 말했다.
“지하에서 꺼내온 현금들 있죠?”
“예, 회장님.”
“그것만 따로 빼서, 인천 한 쪽에 잘 준비해주세요, 이틀뒤에 대현에서 가져갈겁니다.”
“대현이 그걸 사용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경쟁자 하나 줄어들면 나야 편하죠?”
“독인줄도 모르고 정상영 회장은 삼키겠군요.”
“원래 모르면 맞아야죠, 세상이 쉬운가요.”
정호석이 물끄러미 날 바라본다.
“참 가끔··· 회장님이 20대라는게 믿기지 않습니다.”
“말에 뼈가 있는데요?”
“들어가시죠, 백부님 기다리시겠습니다.”
“예, 삼촌도 얼른 오세요~ 안주가 기가막히네요.”
“그러죠.”
< 제 150화. > 끝